기독교강요강해(155)_프린트물_2026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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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5-04 17:21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5)
[ 제3권 제24장 11항 – 제24장 14항 ]
성경본문: 로마서 9:21-22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11항.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그러면, 악에 철저하고자 하는 듯이 가장 추악하고 가증한 죄 속에서 뒹굴면서 평생을 여러 가지 더러운 생활을 하던 사람에게서 어떤 선택의 씨가 싹텄다는 말입니까? 만일 바울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생각이었다면(고전6:9-11 참조), 그들을 이런 추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의 추종자들이 선택의 영원한 씨에 대해 감사하도록 권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의 정욕을 따른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경고합니다(벧전4:3). 실례들을 든다면, 기생 라합에게는(수2:1) 믿기 전에 어떤 의의 씨가 있었습니까? 예언자들의 피로 온 예루살렘이 거의 적셔졌을 때의 므낫세(왕하21:16), 죽는 최후 순간에 회개를 생각한 도적(눅 23:42) -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씨가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성경에 없는 일을 꿈꾼 이런 주장을 버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6), 즉 멸망으로 갔습니다. 이 멸망의 구렁에서 구출하기로 결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적당한 때까지 연기하시며, 그동안은 다만 그들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죄는 저지르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12-17항)
12항.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한 계획으로 그들에게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과 같이,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계획도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행하십니다. 그러면 현세에서 치욕을 받으며 사후에는 멸망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되며 준엄성의 실례가 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예정대로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혹은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며, 혹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키십니다.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는 예는 무수하므로 그 중에서 가장 명백하고 현저한 것을 하나만 택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약 4천 년이 경과하였고, 그 동안에 그 분께서는 구원의 교리의 빛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숨기셨습니다. 그들을 무가치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은혜를 나눠주시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후손들 또한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말라기가 유력한 증인이 됩니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과 심한 모독적인 행위를 폭로하면서 구속자가 오리라고 선언합니다(말4:1이하). 그러면 왜 구속자를 전자에게는 주시지 않고 후자에게만 주셨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넘어 더 깊은 원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고통만 당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지 않으면, 폴피리(Porphyry)의 어떤 제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태연하게 헐뜯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도 부당하게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이 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궤변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심판자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의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두운 상태에 버려두심으로써 그의 예정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눈이 먼 예는 매일 볼 수 있고, 성경에도 증거가 많습니다. 같은 설교를 백 명이 들을 때, 20명은 곧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거나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런 차이는 그들의 악의와 타락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본성은 다른 자들과 꼭같은 악의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묻는 (고전 4:7) 바울의 질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심중에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그의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3항.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십니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가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행13:48).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 (롬9:21-22) 이유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과 같이 다음의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만이 아신다.” 즉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크리소스톰과 같이, 원하는 사람, 손을 뻗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당기신다고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적절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판단에 있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결정에 있는 것같이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 자체에는 그런 충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부인이었으나, 바울의 말을 듣고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행16:14). 이것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경건의 길에서 전진하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는 왜 바로에게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십니까? 사자를 자주 보내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내시기 전에 결과를 아셨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라”(출4:19),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4:2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을 때에도, 완고하고 배반하는 백성에게 보내신다고(겔2:3) 미리 경고하셔서, 그가 귀가 먹은 자들을 상대로 노래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겔12:2).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그가 전하는 말이 불같이 되어 백성을 나무같이 멸망시키며 흩어버리리라고 하십니다(렘1:10,5:14 참조). 이사야의 예언은 이 점을 더욱 철저하게 주장합니다. 그를 보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마13:14-15; 막 4:12; 눅 8:10; 요 12: 40; 행 28: 26-27; 롬 11:8 참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되 그들의 귀를 더욱 막히게 하시려는 것이며, 빛을 비추시되 그들의 눈을 더욱 멀게 하시려는 것이며, 진리를 가르치시되 그들을 더욱 우둔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약을 쓰시되 그들을 낫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예언을 적용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능히 믿지 못한 것은(요12:39) 하나님의 이 저주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고자 하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씀을 수수께끼에 싸서 보내심으로써 그들이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고 더 심한 우둔에 빠지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신 비유를 사도들에게만 해석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실 때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십니다(마13:11). 알아듣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의 허물인지를 생각하고, 더 묻지 마십시오. 말씀에는 모호한 점이 많을지라도, 악인의 양심을 정죄할 만한 빛은 언제든지 충분히 있습니다.
14항.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의 불경건과 사악과 배반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차이 즉, 왜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강퍅한가의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모세에게서(출9:16) 주목한 점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즉, 주께서 처음부터 모세를 세우신 것은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롬9:17).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악의와 사악한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첨부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즉, 그들이 그 패악한 상태에 넘겨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정당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이 그들을 세워, 그들의 정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일한 훈계를 무시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할 때에(삼상2:25), 그 귀절은 그들 자신이 사악해서 그런 완악한 태도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을 그 완악한 상태에 버려두신 이유도 언급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의 확고부동한 결정이 그들을 멸망에 예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도 이와 같이 같은 뜻을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하였더라”(요12:37-38,사53:1). 요한은 완악한 자들을 책망받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성령께서 그 맛을 보게 하시기까지는 그 맛을 모른다는 이유로 만족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의 말을(요6:45,사54:13) 인용하시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교회와 멀어진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확인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참조).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을 노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배척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고전1:22-24 참조). 그는 조금 전에(고전1:21) 이런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고 불렀지만, 믿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당연히 차지할 자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정정하는 의미로 두 번째 발언을 첨부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 뒤에 그들을 “하나님께서...택하사”라고 가르칩니다(고전1:27-28).
불경건한 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서, 하나님은 그 무절제한 권능으로 가련한 피조물들을 학대함으로써 잔인한 쾌락을 누린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일천 가지 죄상에 대해서 한 가지도 만족한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악인들이 당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극히 의로운 판단에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지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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