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56)_프린트물_2026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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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6-09 18:15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6)
[ 제3권 제24장 15항 – 제24장 17항 ]
성경본문: 에스겔 33:11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15항.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성경 귀절: (가)에스겔 33:11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반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 귀절에서는 악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대의 소리를 높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부정하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귀절들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그것이 우리가 위에서 표명한 견해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에스겔서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한 말을(겔 33:11), 그들은 인용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류 전체에 적용하기를 기뻐하신다면, 복종할 가능성이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고무하시지 않고, 매일 불러도 마음이 점점 완악해지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것과 같이, 복음선포와 기적은 유대에서보다(마11:23) 니느웨와(마12:41 참조) 소돔 사람들 사이에서 (마11:23) 더 많은 효과를 나타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를 원하신다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예언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대립시킨다면, 그것은 이 귀절에 대한 극심한 곡해가 될 것입니다. 예언자의 진정한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용서의 소망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예언자가 전하는 소망의 요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동안은 그가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자들의 회개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은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속임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외면적인 부르심은 그것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의 모든 핑계를 빼앗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베푸시는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죄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목적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보증하려는 것이며, 악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과 친절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이중으로 커진다는 느낌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든지 회개하는 자를 맞이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16항. (나)디모데전서 2:3-4, 기타 유사한 귀절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한 귀절을 인용합니다(딤전2:3-4). 이 귀절은 위에서 말한 이유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의 대답은, 첫째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일을 원하시는가는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만일 반대자들이, 이 일은 그들이 구원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확정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음의 모세의 말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주시고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서는 빼앗으신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경건의 교훈을 겨우 그 희미한 초보라도 맛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순수한 인식에도 결코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점을 보아서, 바울이 추론하는 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조금 전에 디모데에게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에서 엄숙한 기도를 드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딤전2:1-2). 그러나 거의 소망이 없는 종류의 인간들을, 즉 그리스도의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다소간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부합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3-4). 바울의 이 말은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층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길을 막으시지 않고,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명할 뿐입니다.
다른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감추인 판단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하셨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선언할 뿐입니다. 만일 반대자들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신다는 말씀을(롬11:32 참조) 끝까지 주장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는 뜻에서 다른 곳에 있는 말씀을 제시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이 말씀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신(출33:19) 말씀과 조화가 되도록 해석해야 합니다. 자비를 반드시 베푸셔야 할 사람들을 택하시는 그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개인들이 아니고 사람의 계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이 어두워 극력 반대하는 자들이지만 왕과 고관들까지도, 복음에 참가하게 만드실 자유가 하나님께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벧후3:9) 한 말을 근거로, 그들은 더욱 강력한 반대론을 제기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곤란은 그 다음 귀절에서 곧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여야 한다는 그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마음을 주시되 소수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36:2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신 말씀은(슥1:3) 부적당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해주시지 않으면 죽을 인생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사람 편에서 회개를 선택한다면, 바울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딤후2:25)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히 회개를 권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활동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렘31:18-19).
17항.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증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불가침의 결정과 반대되는 일을 원하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약속은 그것이 아무리 보편적일지라도, 그 약속의 결과를 주의해본다면, 버림받은 자들이 예정되었다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동시에 약속도 폐지됩니다. 이것이 약속의 성격이라면, 약속과 예정이 서로 어긋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이 말씀들은 서로 완전히 합치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를 찾으며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자비가 미친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조명하십니다. 약속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고 신실하여 어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 분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증거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십니까? 믿음만 있으면 죄인들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건한 자들이 양심에 더욱 든든한 확신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피난처를 제공했는데도 그 은혜를 잊고 거절했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피하여 숨을 만한 피난처가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복음을 통해서 이 두 종류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입니다. 그 결과 경건한 사람은 복음의 역사를 느끼고, 불경건한 사람은 복음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조명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척도가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그리스도의 비탄을(마23:37) 인용하지만, 이 말씀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의 자격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계속 거절한 데 대해서도 책망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논제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정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전하시려고 주도면밀하게 노력하셨다는 것과, 그들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자기들의 욕망에 몰두하여 함께 모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중의 뜻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항의합니다. 그들이 이 항의의 뜻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품으시고 그의 위엄있는 자리보다 낮은 데까지 내려오신다고 하는 귀절들이 많은데, 그들이 이런 귀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배반하는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손을 뻗치셨으며(사65:2),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온종일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을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여러 가지 무익한 혼란이 생길 것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하나님께 옮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혼란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데서 제출한 해결 방법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로 생각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엡3:10)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따라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키셨다가 마침내 일시는 그의 뜻에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일이 그가 놀라운 방법으로써 뜻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은 경박한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이미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버리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돼지와 개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잊은 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들 중에서도 꽃을 따듯 소수만을 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나 이 훼방하는 자들이 악담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하신 것이(마5:45),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때의 그 소수에게(마25:34) 기업을 맡기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그 어느 하나라도 미워하시지 않는다고 항의합니다. 이 점을 나는 그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롬10:12) 첨부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심에 따라,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시며”(롬9:24), 아무에게도 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한 귀절을 가지고 항의를 제출할 때(롬11:32,갈3:22의 융합),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그의 자비로 돌리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여 항의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제출될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울과 함께 이 심오한 비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이 떠든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울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라고 한 말을 외쳐야 합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올바른 주장과 같이, 사람의 공의를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공의를 측량하려는 사람들은 사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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