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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61)_프린트물_2026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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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1-0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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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61)

[ 제3권 제25장 10항 – 제25장 12항 ]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5:28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5장 최후의 부활


(사람의 내세 생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항)

10항. 영원한 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예언은(사25:8,호13:14,고전15:54-55) 그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13:12 참조) 그런 상태가 계속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요일3:2).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성경이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예컨대, “아브람아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하십니다. 다윗의 말이 이와 부합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5-6). 다른 귀절에서도 “나는...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벧후1: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것입니까? 이는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겠기 때문입니다(살후1:10).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권능과 의를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나눠 주시며, 아니, 자신을 그들에게 주셔서 즐기게 하시며,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모든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과도한 욕망의 유혹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서 무가치하고 유해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종류의 질문들은 더욱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런 질문을 유해하다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꼭 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꼭 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살전2: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살전2:20)한 바울의 말이나, “너희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마19: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들을 장식하시리란 것을 안 바울은, 자기의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딤후4: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직무가 존귀하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 그에 대한 결실은 하늘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19:21 참조).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단12:3). 자세히 연구해보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딤후1: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마19:29) 하신 약속입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11항.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익한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얼마나 다를까, 처녀들은 기혼 여성들과 어느 정도 다를까, 하고 묻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하늘을 샅샅이 뒤져서 알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킬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영원한 복의 상징인 천사들과 같이 되었으므로(마22:30)이 위대하고 비할 데 없는 풍성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이 복은 보기만 해도 큰 즐거움이며, 알기만 하고 이용하지 않아도 큰 기쁨이며, 우리가 지금 향유한 모든 즐거움을 훨씬 초월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가령 우리가 이 지상에서 모든 쾌락이 구비된 가장 풍부한 곳에 있다고 상상할 때, 가끔 자기의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의 무절제로 인해서 평탄한 생활에 자주 파동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썩을 생명에 무익하다 하더라도 아무 악이 없는 맑고 순수한 즐거움은 행복의 극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속의 찌끼와 그 밖의 퇴폐물은 회복과는 먼 것,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묻습니다.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점을 인정하지만, 바울처럼 이런 결함이 고쳐지기를 기다립니다. 그것은 죄에서 시작한 결함이며, 그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22). 그들은 계속해서, 후손들의 복도 그 때에는 끝날 것인데 인류를 위해서 어떤 더 좋은 상태가 남아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곤란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자손의 복을 극구 찬양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손에 의해서 자연의 질서를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전진시키는 데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완성된 상태에서는 경우가 다릅니다. 그러나 유혹이 부주의한 사람들을 곧 붙잡아서 점점 깊은 미로로 끌어들입니다. 그 결과로 각각 자기 의견에만 만족하고 논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해결의 첩경은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까지 “거울”과 그 “희미함”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고전13:12). 어떻게 하면 하늘로 갈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서도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태만해서 가상적인 승리를 미리 상상할 뿐, 실지로 싸우는 것은 싫어합니다.


12항.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됩니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마8:12,22:13), 꺼지지 않는 불(마3:12,막9:43,사66:24), 심장을 갉아먹는 죽지 않는 벌레(사66:24) 등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고 하십니다. 예컨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사30:33). 이런 자세한 묘사는 악인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하지만,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그 압력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맹렬한 불처럼 삼켜버립니다. 둘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시하는 데 이바지하므로, 주의 진노를 공개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생물과 기타 만물이 자기를 향하여 무서운 분노로 타오르며, 자기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불신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살후1:9) 무의미한 말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물질적인 비유로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킬 때, 그들은 우리의 태만에 맞설 만한 과장된 언사를 사용하지 않지만, 해와 달과 우주 전체의 현상을 통해서(마24:29 기타)장차 올 심판의 예감을 그들의 교훈에 섞습니다. 따라서 가련한 양심은 무서운 회오리 바람에 괴로움을 당하며, 원수가 된 하나님께 찢기는 듯, 치명적인 창에 찔리는 듯, 하나님의 번개가 때리는 듯, 그의 무거운 손에 눌려 부서질듯한 느낌으로 일시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공포 가운데 한순간이라도 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끝없는 깊음이나 구렁으로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쉴 새 없이 하나님의 포위를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 시편 90편에 잊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들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십니다(시90:7이하).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고전15:28)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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