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비보셋을 통해 보여주신 복음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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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성진 작성일 18-01-30 21:45본문
다윗과 므비보셋의 일화는 복음을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더 핑크 목사님께서 각각의 비유와 예표를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주신 내용이 은혜가 되어 나누고자 합니다.
단 본문을 모두 싣기에는 분량이 너무 길어 부분적으로 요약을 했습니다.
아더핑크의 다윗의 생애(中) 47,48장 내용입니다.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다윗은 불구대천의 원수의 가족에게 친절을 베풀어 줌으로써, 은혜로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그림자로 미리 보여주고 있다.
1. 먼저 다윗이 그 일에 주도권을 행사하였음에 주목하라. 사울의 남은 자손이 누구든지 다윗에게 먼저 제안하지 않았다. 왕 자신이 일을 추진하는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먼저 구원을 추진한 것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긍휼의 제안을 하시고, 구원의 각 단계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드러내신다.
2. 다음에 다윗이 찾는 대상에 주목해야한다. 그는 다윗에게 가장 극악하게 굴고 무자비하던 원수의 직계 자손 중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주께 칭찬들을 만한 일을 한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그 보상으로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복음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요가 무가치하고 곤고하고 영적인 빈털터리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3. 다윗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한 동기에 주목하여보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왕으로 자기의 원수의 집에 긍휼을 베풀게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자기 마음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과 우정의 끈에서 그러한 이유를 발견해 낸다. 또한 우리는 요나단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본다.(삼상20:27-34)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다. 다윗이 요나단의 집에 언제나 자비를 베풀 것을 서약하는 언약이었다. 왕의 손에서 은총을 얻은 사람은 자기가 행한 어떤 일로 인해서나 그가 가진 어떤 개인적인 가치 때문에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가 나기 전에 맺어진 언약적인 약속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값없고 주권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그러한 은총을 요구할 어떤 개인적인 권리 때문에서가 아니라 중재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오래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스도의 집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약속하신 것이다.
4.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총을 베푼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자.
1) 먼저 그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므비보셋이다. 그의 이름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명칭은 본성적인 사람을 얼마나 예리하게 묘사하는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진정 우리는 “부끄러운(수치) 것”이다.
2) 므비보셋은 ‘다윗을 피하여 달아난’ 사람이었다. 사울과 그 아들들이 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이 사울 집의 생존자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들은 다윗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죄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서 하나님을 떨어내 버리려고 애쓴다.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과 전지전능하심을 아는 지식이 그를 불안하기 그지없게 만든다.
3)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다. 이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그려준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전혀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할 수 없음이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4) 므비보셋은 ‘떨어져’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모형적인 그림을 대하고 있다. 사람은 지금의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사람을 만드신 자가 그를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실 때는 절대로 두발 다 절뚝발이가 아니었다. 사람의 영혼의 여러 기능들의 타락의 결과로 영적으로 절게 되었다.
5) 므비보셋이 거한 장소를 살펴보자.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거기에 살지 않았다. 그곳의 이름은 ‘목초지가 전혀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영혼을 위하여 하나도 먹을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영적인 전망에 관한 한 거친 사막에 불과한 세상이다.
5. 다윗이 므비보셋을 위해 예비한 것을 보자. 다윗이 환영 메시지를 보내어 예루살렘으로 오라고 초청하였는가? 다윗은 므비보셋이 자기편에서 마땅하게 처신하면 은총을 베풀겠다고 통보하였는가 ? 그에게 받침목을 주면서 그것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예루살렘으로 오라고 하였는가?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사람을 데려오니(삼하9:5)’ 이 복된 절차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사 자신에게 오게 하신 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효력적인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게하시고 그의 종들을 보내어 복음을 믿으라고 초청하는 일 외에는 어느 것도 하지 아니하였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6. 이제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자비의 결과로 그에게 부여된 놀라운 몫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락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진 부요함을 상싱하고 있다.
1) 그는 이제 생명을 보장받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이다.
2) 그에게 이제 평화가 있게 되었다. 다윗이 무서워 말라고 한 것은 그의 공포를 제거하고 마음을 가라 앉히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를 위하여 기업이 주어졌다. 므비보셋은 몰수된 기업을 되돌려 받았다. 우리도 우리의 첫 조상의 배도로 상실한 기업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돌려받는다.
4) 므비보셋에게 놀라운 지위가 허락된다. 그는 왕과 같은 식탁에서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대접하셔댜 그 모든 은혜의 하나님의 마음이 만족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신과의 교제 가 아니고 무엇이 하나님의 최선이겠는가? 곧 그의 식탁에서 먹는 것으로 상징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5) 그에게 주어진 영예로운 신분을 보라 ‘므비보셋은 왕자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삼하9:11) 그는 호화로운 식사를 할 뿐 아니라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종이 아닌 아들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므비보셋은 전에 잃었던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