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종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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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7-23 18:17본문
어떻게 내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무헬렌버그 빌 씀 (영국 진리의 깃발 잡지에서 발췌)
이 제목은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어떤 커피를 마셔야할지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부모의 종교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에 의문을 가지고 어떤 종교와 세계관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말했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홍역을 앓듯이 갑작스럽게 그들의 세계관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종교는 다 똑같으니까 아무것이나 선택한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세계의 주요 종교를 공부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힌두교에만 3억3천개의 신이 있다. 하지만 불교도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 믿지 않을 수 있다.
한가지 더 근거를 제시하겠다. 이슬람과 기독교를 보자. 가장 중요한 법칙은 모순법칙이다. 이 논리는 서로 상반된 명제가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누구든 어떤 것이 이렇다거나 혹 이렇지 않다고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기본적인 교리인 사하다를 보자. '알라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모하메드는 하나님의 메신져이다.'
이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보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것을 온전히 지지하고 있다. 누가 맞는 것일까? 모두가 옳을 수는 없다. 이슬람이 이 점에서 옳다면 기독교는 물론 틀린 것이다. 만일 이 점에서 기독교가 옳다면 이슬람은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당신은 두 종교를 모두 선택할 수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이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슬람에 의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도 다시 살지도 않으셨다. 또다시 이 둘은 양립하지 않는다. 반드시 한쪽이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선택할 때 각기 취하고 있는 진리적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다음 그것을 분석하고 비교하고 대조해 보아야 한다.
이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보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것을 온전히 지지하고 있다. 누가 맞는 것일까? 모두가 옳을 수는 없다. 이슬람이 이 점에서 옳다면 기독교는 물론 틀린 것이다. 만일 이 점에서 기독교가 옳다면 이슬람은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당신은 두 종교를 모두 선택할 수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이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슬람에 의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도 다시 살지도 않으셨다. 또다시 이 둘은 양립하지 않는다. 반드시 한쪽이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선택할 때 각기 취하고 있는 진리적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다음 그것을 분석하고 비교하고 대조해 보아야 한다.
당신이 종교를 선택할 때 그것은 당신의 필요를 채우기 보다는 어떤 것이 옳은 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자동차를 잘못 선택하는 것은 큰 실수가 아니지만 잘못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와 세계관을 취할 때 어떤 면을 보아야 하는가?
노만 가이슬러라는 분은 좋은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이슈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1. 하나님의 성격 (형이상학적)
2. 현실과 존재의 성격 (존재론)
3.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질문 (인류학)
4. 고통과 악에 대한 문제 (윤리학)
5. 앎에 대한 질문 (인식론)
2. 현실과 존재의 성격 (존재론)
3.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질문 (인류학)
4. 고통과 악에 대한 문제 (윤리학)
5. 앎에 대한 질문 (인식론)
찰스 콜슨에 의하면 모든 세계관은 아래 세가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인가? (창조)
2. 세상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타락)
3.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 (구원)
2. 세상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타락)
3.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 (구원)
아래 세속적인 종교인 막시즘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막시즘은 죄와 구원에 대한 아래와 같은 개념이 있다.
1. 타락과 죄 : 노동의 구분, 계급의 구분, 관리자와 노동자 등
2. 구원 : 계급의 갈등과 혁신, 계급의 체제 붕괴와 부르조아의 파멸
3. 선지자 : 막스, 레닌, 스탈린 등
4. 경전 : 자본과 공산주의
5. 선택받은자 : 프롤레타리아
6. 왕국 : 노동의 분리가 없는, 노동자가 이끄는 계급이 없는 사회
2. 구원 : 계급의 갈등과 혁신, 계급의 체제 붕괴와 부르조아의 파멸
3. 선지자 : 막스, 레닌, 스탈린 등
4. 경전 : 자본과 공산주의
5. 선택받은자 : 프롤레타리아
6. 왕국 : 노동의 분리가 없는, 노동자가 이끄는 계급이 없는 사회
막스는 부분적으로 옳았을 수 있다. 하지만 분리를 다룬 것은 실제적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인 구분만을 다루었다. 노동자들을 생산의 도구로 구분짓는 것의 문제등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분리는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로부터 모든 다른 분리가 시작되었다. 이웃과 분리, 자신과 분리, 피조세계와 분리. 막스가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세계관 혹은 종교는 두가지의 좋은 성격을 보여준다.
먼저 그것은 앞 뒤가 맞고 내적으로도 일관되다. 말하자면 그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모순으로 점철되어서는 안된다. 앞에서 말한 모순의 법칙에 위배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 교리체계가 논리적으로 일관되어야 한다. 이슬람은 이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은 극단주의적 숙명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일어나는 일이 알라의 직접적인 의지이다. 이슬람은 순종이란 뜻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알라와 그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신도들이 수행해야할 많은 종교적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 뒤에도 신도들은 알라가 이것을 받아들였는지 거부했는지 알 수 없다. (지하드 성전에서 죽는 것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보증이다.) 신도들은 교리를 외우고, 기도하고. 기부하며 순례여행을 나설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해도 이것을 알라가 받을 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분리가 있는 것이다.
무신론이란 종교도 같은 축에 속한다. 리챠드 도킨스같은 사람들은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 말하기를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에는 실제로 그 어디에도 선과 악이나 목적이나 계획이나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어둡고 무정한 무관심만이 있을 뿐이다. 불행했던 시인 A E 휴스만이 말했듯이 '자연은 무정하며 재치없는 자연이다.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DNA는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DNA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춤을 출 뿐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이다. 도킨스 같은 사람이 매일 마다 생각하는 악함이 하나있다. 그것은 종교 종교교육, 종교적 원리주의 등이다. 한편으로는 선과 악이 없다하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는 악한 것이고 무신론은 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옳다고 할 순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함께 할 수 없다. 당신의 생각을 정립하라. 하지만 이러한 전투적인 무신론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논리적 일관성만으로 싸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번째로, 좋은 세계관 혹은 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일맥상통해야 한다. 마치 좋은 지도책은 실제 길과 일치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종교도 마찮가지이다. 현실의 팩트들과 일치해야 한다. 많은 종교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동방종교들과 그들의 악에 대한 관점을 보자. 일반적으로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본다. 음과 양이다. 악은 환영과 같은 것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과 악의 세상을 초월하여 이러한 잘못된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만일 내가 누군가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고 하자. 다리를 맞은 그 사람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며 어떤 선과 악도 여기에 없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음 운이 좋네요. 그는 아마도 아픈 다리를 움켜쥐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악은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아니라고 우겨도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일맥상통해야 한다. 마치 좋은 지도책은 실제 길과 일치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종교도 마찮가지이다. 현실의 팩트들과 일치해야 한다. 많은 종교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동방종교들과 그들의 악에 대한 관점을 보자. 일반적으로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본다. 음과 양이다. 악은 환영과 같은 것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과 악의 세상을 초월하여 이러한 잘못된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만일 내가 누군가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고 하자. 다리를 맞은 그 사람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며 어떤 선과 악도 여기에 없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음 운이 좋네요. 그는 아마도 아픈 다리를 움켜쥐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악은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아니라고 우겨도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동방종교들은 서방의 논리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싫어한다. 그들은 서방의 이러한 논리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역시 이론적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실제적인 면에서 틀린 말이다. 예를 들면 어떤 힌두교도가 철로 위에 서 있는데 기차가 다가 오는 것을 보지만 철로에서 뛰어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겠는가? 이 사람은 논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논리는 차갑고 정확하다. 내가 철로 위에 있어서 기차에 치여 죽던지 아니면 철로에서 탈출하여 살던지 하나뿐이다. 이것이 논리학 101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신중하고 지혜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은 분명히 다른 것보다 좋은 것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훨씬 좋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에 대한 것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모든 종교들이 가진 진리체계를 잘 살펴보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나는 정말 열심히 연구했다. 나는 대체할 수 있는 모든 종교들을 다 연구해 보았다. 그 어느 것도 견줄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결론은 기독교만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는 내적으로 일관되고 진실하며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나의 문제들과 그에 대한 모든 처방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종교를 찾는 구도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찾아 보라고 권면하고자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테스트해 보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가? (Is it true?)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럴 듯 해보이는 가가 아니며 당신이 가진 편견을 만족시켜주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로 사실인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당신에게 예수님의 삶과 그의 주장에 대해 연구해 보라고 초청하고 싶다.
먼저 요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아마도 당신은 영원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할 것이다.
먼저 요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아마도 당신은 영원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