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예배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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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4-20 09:04본문
가정 예배에 대한 추억
죤 G 페이튼 선교사 씀 (배너 오브 소버린 그레이스 트루스에서 발췌)
내 어린 시절의 집은 두 방 사이에 옷장 같이 작은 방이 끼어 있었다. 방에는 침대와 작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 그리고 아주 작은 창문이 작은 빛으로 이 비좁은 곳을 밝혀주고 있었다. 이 곳은 허름한 성전 같은 집이었다. 여기에서 매일마다 하루에 여러 번, 매 끼니마다 우리는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와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으며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기도 가운데 쏟아져 나오는 영적인 본능을 이해해야만 했다.(기도의 내용은 너무나 거룩하여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마치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베일 안에서 드리는 기도와 같았다.
우리는 가끔 생명을 다해 애원하는 떨리는 목소리의 안타까운 울림을 듣곤 했는데, 이 때마다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터득했으며, 이 거룩한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자 했다. 기도 뒤에 아버지의 얼굴에는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행복한 웃음이 피어 올랐는데 바깥 세상은 알지 못했을 것이지만 우리는 알았다. 어디에서 이 빛이 왔는지를 그것은 그가 살고 있는 인식 속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반사된 것이었다. 웅장한 성당이나 성전 혹은 산 위에나 깊은 골짜기 그 어디에서도 나는 결코 주 하나님께서 이 보다 더 현시적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걸어 다니시는 곳을 우리의 낡은 초가집보다 더 알지 못한다.
경건의 모든 것들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변화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 머릿속에서 없어져 버리기도 하지만 내 영혼은 항상 어린 시절의 그러한 광경들 사이에서 맴돌며 그 옷장 같은 성소 속에 나를 닫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울림을 듣고자 한다. 그 울림 속에서 나는 모든 의심을 집어 던지며 이와 같은 승리의 간청을 올려본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면 나는 왜 안되겠는가?”…
그는 자신을 위한 독립적인 교회를 선택한 것 외에도 또 다른 젊은 시절의 결정의 열매와 표시가 있었으니 이 모든 시간 동안에 가장 훌륭한 것처럼 보였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가정 예배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안식일에만 열렸는데 이 젊은 그리스도인은 동감하는 어머니와 함께 가족회의를 열어 자신의 식솔들에게 가정예배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의 기도가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는 것과 거룩한 찬양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것을 더욱 기꺼이 하여 그는 정기적으로 가정예배를 이끌어 늙은 용사의 어깨에서 그의 평생에 너무도 힘들었던 영적인 노고를 덜어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17세가 되던 때 가정 기도회의 축복된 습관이 아침 저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내 아버지께서 77세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 왔을 때조차 성경의 일부분을 들으셨고 그의 음성은 부드럽게 시편찬송에 함께 했으며 아침과 저녁의 기도회에서 그의 입술은 간신히 숨을 내쉬며 온 지구상에 있는 자녀들의 머리 위에 축복을 떨어뜨려 주었다. 그래서 모든 자녀들은 은혜의 보좌 위에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어느 하루를 이와 같은 거룩으로 인침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날을 기억할 수 없다. 아무리 급해도 시장에 가느라, 사업이 바빠서 혹은 친구의 방문으로 혹은 그 어떤 곤경이나 슬픔 혹은 즐거움이 찾아와도 이 가정의 제단 앞에 무릎꿂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다. 대제사장이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했으며 자신과 자녀들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했듯이 이웃을 축복했으며 이러한 예들의 빛이 되었다. 수년 뒤에 우리가 사는 토쏘발트 마을의 가장 사악한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받아 물멸의 영생을 선물받기도 했는데, 그 여인은 자신을 자살의 지옥과 절망에서 구원해 준 것은 긴 겨울의 어둠 속에서 우리 아버지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을 그 창가 아래에서 엿들었을 때라고 아래와 같이 고백했다.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무수한 오류와 악한 길에서 구하사 주님의 왕관에 박힐 보석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들었으며 느끼기로 내 자신이 저 선한 사람의 마음에 큰 짐이 되었음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리란 것을 깨달았다. 이 생각이 나를 지옥에서 건져내었고 결국 나를 유일한 구세주로 인도했다.’
내 아버지는 복음적인 목사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었음을 알았을 때 자신을 설득하여 영혼을 이 엄숙한 소명에 바쳤는데 만일 제게 아들들을 주신다면 그들을 거룩히 그리스도의 사역에 남김없이 바치리라는 것이었다. 만일 주께서 이것을 귀히 여겨 주신다면 그리고 그들의 길을 열어주신다면, 이 세 자녀들이 이 거룩한 나의 소명을 통해 축복받으리란 것으로 내 인생은 만족을 누리리라 생각했다. 내 맏형인 월터와 내 동생 제임스그리고 열한명중 막내인 벤야민…우리들은 아주 어릴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을 벌이 아닌 큰 기쁨으로 생각했고 7킬로미터 되는 거리는 덤으로 주는 즐거움이었다. 함께 그 길을 걸을 때 우리의 동행은 즐거웠고 도시 삶을 구경하는 것은 우리 호기심 많은 눈을 놀라게 했다. 복음 가운데 만난 경건한 성도들은 같은 교구에서 덤프리드의 훌륭한 목사의 목회 가운데 거하며 다소 돌봄을 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농부들은 하나님의 집에 미리 모여서 예배 전후로 교제했는데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성도의 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교회로 향할 때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로 가득하여 집을 떠났고 집으로 올 때는 자신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데 열심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경건은 영민한 이성의 활동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우리가 들은 대화는 종교적 대화의 참된 진수였으며 지어낸 얘기가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진지한 결과들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멀리 해야할 대화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화 사이의 진정한 구별을 알게 해 주었다. 주일날 저녁에는 특별한 성경읽기를 가졌는데 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방문객들은 돌아가며 성경을 읽는데 구절마다의 질문과 대답과 해설을 달아주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통해 얼마나 놀랍게 전해졌는지 알게 해 주었다. 소요리문답은 정기적으로 읽혀지고 각자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했는데 그 모든 내용이 소상하게 알려지고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이 모두 읽혀진 뒤에야 끝이 났다. 나는 혹자가 요리문답이 경건에 어려움이 된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운데 있던 성도들은 모두 그 반대로 생각했다. 오히려 우리의 경건에 굳은 반석과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수년 동안 질문과 대답은 더 깊고 수정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방식으로 훈련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물론 부모님들이 진지하거나 경건과 열정이 부족한 경우 이 모든 일은 위선적이고 나쁜 노동이 되었을 것이다! 오 하지만 나의 주일 저녁은 얼마나 행복하였는가 내 안에 태양이 떠올라 장님이 눈을 뜨게된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조롱할 테지만 경건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이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진정 거룩하고 행복하고 온전히 인간적인 하루였다. 아버지는 돌로 된 마루를 왔다갔다 하시며 어머니에게 오늘 들은 설교의 주제를 상세히 말해주셨는데 어머니는 먼 거리와 많은 현실적 어려움들로 교회에 거의 나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떤 친구들이 마차에 태워준다는 약속이나 기대만으로도 매우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설교를 받아 적고 그것을 오는 길에 읽어줄 것을 요청하시며 설교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으며 보상으로 성경의 이야기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셨으며 번연의 천로역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적은 것을 읽는 시간은 일종의 콘테스트 시간이었다. 내가 발표할 때 나머지 형제들은 듣고 아버지께서는 여기저기 즐거운 생각과 주석과 일화들을 덧붙여 주셨다. 다른 형제들은 자신이 말할 부분을 반드시 적어야 했다. 우리 열한명의 형제들은 소년소녀와 청년남녀로 이루어졌는데 그 어느 누구도 안식일이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 우리는 늘 주일이 자녀들과 부모들에게 즐겁고 축복된 날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날을 강제적으로 사랑없이 지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짚으로 만든 담장은 쉽게 무너지고 외발 달린 마차는 주져앉을 것이다.
죤 G. 페이튼 (1824 - 1907) 은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선교사로 뉴헤브리지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타나섬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곳은 악독한 식인종들이 사는 곳이었다. 후에 아니와섬을 복음화시켰다.
John G. Paton: Missionary to the New Hebrides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07),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