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여인들 - 카타리나 본 보라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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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1-11 04:19본문
개혁교회의 여인들 카타리나 본 보라 루터
홀리 더머 씀 (Heavenly Springs에서 발췌함)
카타리나 본 보라가 누구인가? 도망친 수녀? 가장 유명한 개혁주의자의 아내? 목회자의 아내로서의 롤모델? 그래 그렇다. 그녀는 용감하고 강한 여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엇보다 사랑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종교개혁시기에 하나님께서 길러내신 여인들로부터 배워야할 점들이 너무 많다. 케이티 루터-카타리나의 준말 역자주-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다섯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수녀원에 보내졌다. 십세되는 때에 그녀의 고모인 막달레나 본 보라가 살고 있는 님스첸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십육세가 되는 때 수도원에서 수녀가 되기를 서원한다. 수녀원에서 지내면서 다른 곳에서라면 배울 수 없는 기술들을 익히게 된다. 그녀는 읽고 쓰는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며 그 당시 여인들이라면 경험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시간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24세가 되던 해 개혁주의 교리들을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의 진정한 복음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로마 교회의 행위 구원교리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교리들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그녀는 수도원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잘못된 종교에 헌신하는 삶을 유지할 수 없었다. 4월 6일쯤 그녀는 열 한명의 다른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을 탈출한다. 이 당시에 자신의 서원을 어기고 수녀원을 탈출하고 그것도 다른 수녀들까지 동조하여 도망가게 한 것은 거의 목숨을 잃을 만한 극단적으로 위험한 죄악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욱 강렬한 것이었기에 용감하게 탈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 당시 탈출한 수녀들은 곧바로 가족에게 돌아가거나 결혼을 해야만 했는데 이 당시 사회에는 여인들이 홀로 살 수가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살 곳을 찾아야하는 마지막 수녀가 되었는데, 마틴루터가 이들 개종한 수녀들의 집을 알선해주는 역할을 하게되었다. 끝으로 케이티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다가 루터가 두번 씩이나 케이티에게 결혼을 알선하지만 두번 다 실패하고 만다. 첫번째 남성은 과거 수녀였던 여인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부하였고, 두번째 남성은 카타리나가 원치 않았다.
결국 케이티 자신이 루터 박사에게 미래의 신랑감이 되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루터는 많은 고심 후에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내 결혼이 아버지를 기쁘게 할 것이며, 교황을 화내게 만들것 이며, 천사들은 웃음을 짓게 할 것이고 악령들은 울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결심을 굳혔다. 결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루터는 이점을 크게 강조했는데 자신이 카타리나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자신과 다른 개혁주의자들이 독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케이티는 루터와 자신이 결국 결혼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알았을 때 이를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카타리나 - 도망친 수녀가 아니다. 나는 위대한 루터 박사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남편의 뜻을 좇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박사를 움직여 내게 청혼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명령과 같다. 그는 나를 겸허하게 만드신다. 주님 내가 주의 종 루터 박사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 가능하다면 주께서 내게 아주 작은 사랑과 행복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케이티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셨다. 주께서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소중히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셨다. 루터는 점차 카타리나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서로를 이끌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루터의 아내에 대한 애정은 그의 글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가정과 결혼에 대한 부분을 다룰 때 잘 나타나 있다.
케이티는 그의 기도문과 묵상에 보여지듯이 자신의 결혼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의무들을 잘 인식했다. 루터가 주님에 대한 사역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였다. 케이티는 가정을 홀로 이끌어 나갔으며 믿기 어려운 스케쥴을 소화해 나갔다. 루터는 그녀를 "비텐부르크의 새벽별"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농장을 돌보고 심지어 도축까지 스스로 하였다. 그녀는 항상 남편을 자신 앞에 두었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복음 앞에 항상 서 있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하고 있는 일들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녀는 남편을 지지했고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최대한 그의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리는 오늘날 케이티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와 루터는 우리에게 목회자 가정이 어떠한 모습인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며 이 때문에 그 가정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다. 루터의 가정은 "식탁 교제"라고 잘 알려졌는데, 대학교의 학생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와서 신학적인 토론을 벌이는 일들이 잦았다.
케이티는 또한 루터가 용기를 잃었을 때 그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루터는 수 많은 반발과 저항을 감내해야만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낙망과 실의는 일상적이었다. 케이티는 남편의 의기소침을 돕는데 있어서 항상 전통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케이티는 아침 일찍 상복을 입고 낙심한 루터 앞에 나타났다. 루터가 누가 죽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도 모르세요? 하나님께서 돌아가셨다구요." 물론 이로 인해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상태에 있었는지 바로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고무시켜 책을 쓰게한 것도 케이티 자신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루터는 죽기 전 20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향유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부에게 여섯명의 자녀들도 선물로 주셨으며 그들 중 네 명은 성년까지 살 수 있었다. 루터가 죽은지 6년 후 케이티도 영광의 집으로 부름을 받는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에는 성경적인 여성상에 대해 많은 저술과 발견이 이루어져왔지만 그 모범적인 예는 매우 찾기 어렵다. 물론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자신의 교회 안에서 위대한 개혁주의자들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들을 도와준 여인들에 대해서 무지해 버리는 위험을 자초했다. 교회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본받을 만한 수많은 성도들의 예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의 강점뿐 아니라 약점을 가지고 싸웠으며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전통을 제시하고 있다.
"가정과 도시들, 경제적인 삶과 정부는 아마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만일 남자들이 자녀를 낳고 생산할 수 있을지라도 여자들의 도움 없이는 여전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 - 마틴 루터
저자에 대하여
홀리 더머는 홈스쿨링과 자녀교육과 청소로 소일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기쁘게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에서 남편과 함께 두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녀의 블로그는 The Dermer Family 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