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여인들 - 사라 피어폰트 에드워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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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1-23 11:21본문
사라 피어폰트 에드워즈
1723년 19세의 죠나단 에드워드가 살았던 곳은 미국의 영국 식민지였던 신세계였다. 이 당시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해안을 길게 따라 형성되어 있었고 서쪽으로 끝을 알수 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때 이미 그는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1년간 목회경험을 쌓은후 예일대에서 일자리를 얻기위해 뉴 헤이븐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사라 피어폰트를 만난다.
에드워즈가 사라 피어폰트를 만난 것은 그녀가 13세였던 때였다. 그가 그녀를 눈여겨 본 것은 그녀의 발랄함과 남다르게 깊은 신앙심이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잘 생기고 말솜씨가 부드러운 청년들이 사라 피어폰트에게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은 호리호리하고 우울해 보이는 죠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그녀에게 다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실한 그였지만 그 당시 그리스어 문법책 첫 장에는 백일몽을 꾸는 낙서가 아래처럼 적혀있었다.
"사람들은 뉴 헤이븐에 한 젊은 여성이 있다고 하는데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놀라우신 분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분께서 어떤 시기에 이 여성에게 찾아 오셔서 그것이 어떤 방법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달콤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을 묵상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너는 그녀에게 잘못되거나 악한 것은 강요할 수가 없구나. 비록 네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준다해도 그녀는 위대한 분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놀랍도록 감미롭고 조용하며 모든 이에게 호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녀의 마음에 보이신 이후에 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가끔 이곳 저곳을 다니며 기쁘게 노래할 테지 그리고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것 같아... 그녀는 혼자 있기를 즐겨하고 들과 숲길을 산책하는데아마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
모든 자서전 작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 두사람의 극명한 대조이다. 사라는 당시 코넥티컷의 가장 훌륭한 집안 출신으로 그 당시 여인이 받을 수 없었던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사교적인 상냥한 예절과 기술에 능숙했다. 음악을 사랑하여 류트를 잘 연주할 수도 있었다. 그녀를 잘 알았던 사뮤엘 홉킨스는 말하기를 그녀는 특별하게 사랑스러운 인품과 언사로 늘 선량하고 지적이었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죠나단 에드워드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았고 약간 불안해 보이고 말수가 적었다. 13세에 대학에 입학하여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한창 청년 때에도 아주 적게 먹었고 사교적이지 못했으며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어색하게 산만해 보였다. 그는 일기장에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사적인 것인데 이것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훨씬 개선될 수 있었을 것 같다.'라고 썼다.
이 커플이 가지고 있던 공통점은 음악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음악이야 말로 사람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가장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마음 가운데 즐거운 일치를 이룰 수 방법 중 가장 아름답고 최선의 방법은 음악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을 누리는 모임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사랑과 기쁨과 내적 조화와 일치, 영적인아름다움을 서로의 영혼을 향해 노래하면서 표현하는 자들일 것이다.' (마스덴 전기 '죠나단 에드워드' 중)
이러한 상상은 인간적인 지상의 실체로부터 천국의 실체로 도약하는 지성의 첫 단계였으며,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교향곡과 같은 하모니에 비하면 인간의 달콤한 친분은 단지 단순한 가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라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죠나단도 점차 부드럽게 바뀌어 갔다. 그들은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산책하고 함께 얘기하면서 그녀의 얼굴에 있는 아름다움과 일치하는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터 반 마스트릭트가 쓴 책을 권해 주었는데 그 책은 훗날 에드워드가 언약에 대해 묵상할 때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Dodds의 전기,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 중)
죠나단에드워드는 사라가 16세 되던 1727년 7월 28일에 결혼했다. 이 당시에는 16세가 여성의 일반적인 혼령기였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아주 조금 엿볼 수 있는데 한번은 죠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설교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예로 들면서 다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아주 한정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어떤 사람의 무엇에 대한 사랑을 논할 때,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합시다. ... 우린 일반적으로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사랑의 효과로 나타나는 그의 행동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해 아주 희미하고 미미한 개념밖에 알 수 없습니다."
죠나단은 노샘턴의 교회로부터 목회 청빙을 받게 된다. 이 교회는 자신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의 교회였다. 결혼을 5개월 앞 둔 시기였다.
사라와 같은 아리따운 여인이 이 작은 도시에 들어온 것은 대단한 관심꺼리였고 그것도 목회자의 아내로서 받는 눈총은 매우 따가운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사라가 입은 드레스나 목걸이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당시 관습상 새로 결혼한 신부는 자신의 결혼 드레스를 입고 나와야 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를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 첫 주일의 성경구절을 신부가 선택하게 되는 특권을 누렸다. 사라가 어떤 구절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성구인 "누가 우리를 주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 (로마서 8:35)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주해를 그 첫 주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전기작가인 마르스덴에 의하면 죠나단에드워드가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난 1727년 그는 그의 영적인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3년간 잃어버렸던 영적 활력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한다. 이는 예일의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교회의 목회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것뿐 아니라 그의 결혼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둘이 하나가 되어 한 인생이 되었을 때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이 지상에 비로소 집과 안식처가 생긴 것이었다.
사라는 본격적으로 아내로서의 역할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이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며 과학적인 씨름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에드워드는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죠나단 그 자신도 가정 생활을 살아있는 신앙의 교육장이라고 여겼다. 그의 설교인 "교회의 독생자와 천부의 결혼"에서 그는 청중에게 결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가시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연합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신랑과 신부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는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 모두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성령은 이에 대해 특별히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는 결혼이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 간에 있는 친밀하고 직접적이며 복된 연합과 유사성이 깊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 부부는 비난에 함께 직면했는데, 에드워드의 철저한 양심적 힘은 일상에 젖어 사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일단 그가 성경적인 진리와 신학적인 교회의 의미를 숙고한 뒤, 자신이 발견한 죄악이나 과오에 대해서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가 사역하던 노샘턴 교회는 이전 목회자가 느슨하게 만들어 놓은 성찬의례를 에드워드가 반대했을 때 매우 불쾌해 했다. 이전 목회자였던 에드워드의 할아버지는 불신자들도 성찬에 참여케 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죄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교인들이 긴 겨울나날을 선술집-이당시에는 통신이 없어 선술집에서 모든 세상 정보를 들었다-에 드나들며 오가는 소식을 듣고 게임을 하는 것이나 집에 경건서적 하나 없다는 것 등 그는 열심히 교인들의 사생활을 지적했다-역자주)
가정에서의 사라의 역할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라는 남편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방법들을 찾아 나갔다. 남편이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는 분위기와 공간을 만들어 주는것과 그가 항상 자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인가 고뇌하고 있을 때 저녁식사로 인해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아내는 이를 잘 이해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때때로 내 죄악됨과 사악함에 대해 심각한 주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종종 너무나 어려워진 나머지 펑펑 울고 말았는데...나는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의 마음에서 일고 있는 폭풍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이해했고 집안의 죠나단을 잘 돌보아 주었다.
사뮤엘 홉킨스는 기록한다.
'그녀는 변함없이 남편에 대해 존경심을 표했고 그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향을 맞추어 주고자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가정에서 모든 일들이 조화롭고 흥겨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하나님과 그의 세대들에게 가장 큰 봉사를 할 수 있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의 가정은 에드워드의 소명에 의해 다듬어 진 것이었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새벽 일찍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도 일찍 잠에서 깰 것을 분부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죠나단의 습관도 일찍 일어났고 온 가족이 함께 일찍 일어나 촛불 아래에서 성경 한장을 읽었으며 그 날에 필요한 축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13시간씩 공부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주일과 성경의 가르침을 위한 준비로 보냈습니다. 물론 사라가 들어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교구민들의 방문을 받는 시간이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저녁 때에는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숲 속에 들어가 운동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번성하는 가족
1728년부터 2년 간격으로 11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사라, 제루샤, 에스더, 매리, 루시, 티모시, 수쟌나, 유니스, 죠나단, 엘리자벳 그리고 피어폰트.
1900년대의 족보 연구가 윈힙은 죠나단과 사라의 계보를 조사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회에 놀라운 영향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가족이 이룬 것은 무엇이든 능력있고 고상하였습니다... 1400명의 에드워드 자손들이 가진 능력과 재능, 지성과 성품은 다름아닌 그의 부인 사라로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1900년에 윈힙은 에드워드의 족보를 연구하며 이렇게 기록한다.
13명의 대학총장
65명의 교수
100명의 변호사와 한명의 법대 학장
30명의 판사
66명의 외과의사와 한명의 의대 학장
80명의 공직자로 아래와 같다
3명의 상원의원
3개 도시의 시장
3주의 주지사들
한명의 미국 부통령
미국 예산 보좌관
이들 가족이 쓴 책은 135권이며 18개의 저널들을 편집했고 기간지들을 펼쳐 냈으며 전장의 목회를 시작했고 100명의 해외 선교사를 배출해 냈으며, 또한 많은 선교기관을 후원하였다. (Dodds 전기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 중)
윈휩은 에드워드 자손들이 경영한 사업체와 기관들의 이름들을 거론하며, '미국 역사상 위대한 기업들 중에는 이 가족의 자손들이 그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쓰고 있다. Dodds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한 나라의 리더쉽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준 어머니 중 이와 같은 여자가 또 있을까?"라고 말한다.
6명의 에드워드 자녀들은 주일날 태어났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주일날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에드워드의 자녀들은 적어도 청년기까지 생존했는데 이 당시의 유아 사망률을 보면 이것은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다른 가정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Dodds의 전기,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
자녀 교육
이들의 결혼은 30년간을 지속했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이었다. 그 대부분은 사라의 덕분이었는데 그녀는 집안일을 잘 정리했을 뿐 아니라 학구적인 남편을 능숙하게 보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경건한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고된 일을 도맡았다. 죄악된 행동이 보이면 즉각 대처했다. 11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중 10명은 성년까지 살았다. 에드워드도 하루 중 1시간은 자녀들과 대화하고 놀아주는 역할을 잊지 않았다.
죠나단 에드워즈의 가정에서 일어난 내부의 사정을 말해주는 유일한 기록들은 대부분 사무엘 홉킨스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실제 그 가정에서 상당기간 머물렀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아이들을 다스리는데 탁월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즐겁게 순종하고 어른들에게 경외를 표하게 만들었는데, 일체의 크고 성난 말들을 쓰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무섭게 협박하지도 않았다...만일 어떤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때에는 그 일을 격정 가운데 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혼내고 야단쳐야 할 때는 소란과 성냄없이 아주 작은 몇마디의 말이면 충분했다.'
그녀의 교육 시스템은 아주 이른 나이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은 첫번째 저항을 다스리는 것이고 이후 연속되는 불순종과 기질의 표현을 다스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까지 지혜롭게 다스리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도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Dodds 전기중)
죠나단의 아이들은 11명의 개인격이었기에 사라의 훈육은 그들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는 측면에서 시행되었다. 이에 대해 사뮤엘 홉킨스의 말을 빌려 보면, '그녀는 지속적이면서 성실하게 자녀를 위해 기도했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품었습니다...심지어는 그들이 태어 나기도 전에 말입니다.'라고 했다.
죠나단에드워드는 노샘턴 교회의 마지막 고별설교 가운데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모든 가정은 하나의 작은 교회이고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신성한 곳이며 그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고 온전히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교육과 규칙은 은혜의 방편 중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실패한다면 다른 수단은 효과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 사라의 역할 뿐 아니라 우리는 아버지 죠나단 에드워드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각 자녀를 위한 애정과 정기적인 가족 경건 생활은 아이들의 신앙을 받쳐주는 요새가 되어 주었다. 죠나단도 각 개인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으며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는 한명씩 아버지가 여행할 때 동반하도록 했다. 또한 매일 1시간씩을 아이들을 위해 할애했다. 홉킨스의 말을 빌면 '그는 자유롭게 아이들의 감정과 걱정에 동참했고, 흥겹고 생기있는 대화가 종종 뒤따랐으며 유머와 위트가 섞인 내용이 곁들여 졌다.'
사라가 남긴 또 다른 영향력
이 당시 목사관은 여관이 많지 않앗던 그 당시 사회때문에 주변에 여관이 없으면 방문객들의 주요 묵을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사라의 역할은 단지 아내와 어머니로서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도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젊은 목사 지망생들과 사역자들은 수년간 이 집의 문지방을 넘나 들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죠나단으로부터 영향력을 나누어 받기를 소망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뮤엘 홉킨스가 1741년 11월 그의 집에 도착한 이유이다. 그는 자신이 받았던 환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에드워드씨 댁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의 아내분과 가족은 저를 넘치는 친절함으로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겨울을 그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 저는 우울했고 제 방에만 쳐박혀 낙심된 상태였습니다. 며칠후 에드워드의 아내분은 제게 당신도 이 겨울 시즌동안은 저희집 식구입니다라고 말해 주시면서 저의 행복과 상태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울하고 비참해 보인다고 말씀해 주시면서 자신이 저의 사정을 묻는 것을 간섭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솔직히 저의 그리스도 없고 은혜가 없는 상태를 자유롭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해 오고 있었으며 저를 존중한다고 말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위한 놀라운 계획과 뜻을 의심하지 말고 그의 조명과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라는 자녀들뿐 아니라 이 가엾은 청년도 그의 날개 아래 품어 그를 돕고 위로해 주었는데 이 영향력은 그 청년의 평생동안 지속되었다.
사라의 영향력은 단지 개인적인 대화에 그치지 않았다. 홉킨스는 나중에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 지방은 노예매매에 의존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청년이 영향을 받았는데 윌리엄 엘러리 채닝이란 자는 인생의 목표를 찾고 있었는데 홉킨스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보스톤으로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에머슨과 소로우 같은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노예제도 폐지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우리도 잊혀질 만한 개인적 담화를 나누고 있다. 사라와 사무엘이 나누었던 대화도 그의 일기가 없었다면 잊혀졌을 것이지만 이 대화는 꼬리를 물고 전파되어 에머슨과 소로우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아니다.-우리는 그 다음과 다음의 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의 가닥을 이어 놓고 계신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홉킨스는 사라 에드워즈를 존경했다. 그는 일기에 기록하기를 '그녀는 항상 남에 대해 선하게 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는데 자신과 이웃에 대해 진실과 공정성을 가지고 최대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였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홉킨스가 바라본 이 부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힘겨운 노동 가운데에서도 ...에드워드는 모든 면에 훌륭한 반려자를 가정에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의 집에 있는 모든 질서와 청결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게 만들었으며 조화롭고 사랑으로 모든 집안 식구들을 다스렸으며 모든 방문객들과 이방인들과 친구들을 더 없는 친절과 환대로써 맞아 주었습니다."
이 가정을 관심있게 바라본 자들 가운데는 대각성시기에 큰 사역자로 명성이 높았던 죠지 윗필드도 끼어 있었다. 노샘턴에서도 1740년 10월에 방문하여 네 번 설교를 하게 된다. 그가 주일날 설교했을 때 에드워드는 설교시간 내내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드워드 가족은 이 방문객에게 많은 인상을 주었다.
에드워드씨 댁에 머무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는 하나의 성자 예수 자신이었고, 그의 아내는 아브라함의 딸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커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자녀들은 실크나 비단으로 된 옷을 입지 않고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이 자녀들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순전한 정신을 이어받은 모범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양순하고 조용한 정신으로 단장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자유롭고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더 없는 조력자로 보였는데 그녀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배우자를 위한 새로운 기도를 하게끔 하였습니다. 여러 달동안 저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여 저에게도 아브라함의 딸을 아내로 보내주시옵소서. (윈슬로우 죠나단 에드워드 1703-1758 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