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여인들 : 레이디 제인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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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1-10 19:16본문
레이디 제인 그레이
베키 프리에고 씀 (Heavenly springs 블로그에서 발췌)
<Paul Delaroche. 1833 메리 제인 그레이의 처형>
영국의 9일 여왕이었던 제인 그레이는 왕족의 혈통이었다. (영국의 최초 여왕은 피의 메리라고 보통 생각하기 쉽지만 메리1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인 그레이가 잠시 왕 자리에 올랐다. 9일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기에 그녀를 실질적 왕이었다라거나 영국 최초의 여왕이라 말하진 않는것 같다. 대체로 영국 최초 여왕은 메리 1세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 역자주)
제인 그레이는 헨리 7세의 증손녀이자 헨리 8세 누이 메리 튜터의 손녀딸이었다. 그녀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고지식한 부모님의 권위 아래에서 제인은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된다. 틀림없이 이 교육은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불완전한 시기에 왕좌에 오르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우리가 제인의 인생을 읽을 때, 어떻게 이 여인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했는가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이해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녀에게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어떻게 이 극단의 엄격한 교육을 부모로부터 이수했는지 그녀의 말을 인용해 보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는 내게 가장 엄격하고 냉혹한 부모님을 주셨으며 또한 아주 자상한 선생님을 주셨다는 점이다.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목전에 있을 때는 내가 말하거나, 조용히 있거나, 앉아 있거나, 서있거나 걷거나, 마시거나 슬프거나 즐거울 때, 바느질을 하거나 놀거나 춤을 추거나 그 어떤 것을 할 때에도 나는 항상 가장 큰 위엄과 형식과 규칙을 지켜 나가야 했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그러한 완전함을 추구해야만 했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교사였던 아일머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아일머 선생님은 제인의 개인교사였는데 그녀에게 살며 배우는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는 이 개인교습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십대 초반에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와 이탈리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강력한 개혁주의 신앙은 바로 이 개인교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이 교사는 놀랍고 능숙한 신학자였다. 또한 그녀는 쯔빙글리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았고, 마틴 부쳐에 대해서도 훗날 고백하기를 "그에게 가장 많은 빚을 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인은 한 때 부쳐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그는 나에게 경건과 분별력과 건전한 배움에 있어서 진보하게 해준 은인이다"
아일머 씨에 대해서는 "그는 언제나 자상하고 유쾌하였는데 배움에 대해 항상 신선한 감각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배움 외에 내게 있는 것은 슬픔과 괴로움, 두려움 그리고 나에 대한 모든 증오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철저한 교육과 그녀의 배움에 대한 열심 그리고 개혁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다가올 시련에 대한 준비를 시키는 데 충분했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가 합당한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로마 카톨릭교오였고 그녀가 즉위하는 것을 개혁주의자들은 원치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즉위 하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을 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중 몇명은 이에 대한 가장 합당한 대처방법은 제인 그레이를 왕좌에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는 이를 원치 않았는데 "울면서 반대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일 실링을 훔쳤다면 그로인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텐데 만일 왕관을 빼앗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들은 그녀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녀가 왕관을 쓰기를 원했기에 강제로 이 일을 하게 만들었따. 이 때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16세였다.
메리의 군대는 손쉽게 제인 그레이와 그의 후원자들을 붙잡아 런던 타워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이 메리의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제인 그레이는 메리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왕국의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로부터 그들이 수여할 수 없는 왕관을 받게된 죄를 고백하였다." 이 편지에 의해 메리는 감동을 받았고, 제인 그레이가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 참석하여 개종한다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호의를 보인다. 메리는 심지어 그녀의 주교를 보내어 제인 그레이를 설득하여 카톨릭의 신앙을 받을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대해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오직 성경으로'와 '이신칭의' 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와 같은 말로 답변하였다.
" 나는 이를(선행이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 거부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에 찬동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선행을 하는 것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증표이므로 합당한 처사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어떤 이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했을 지라도 우리는 무익한 종일 따름이며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제인 그레이는 어렸지만 믿음과 확신에 있어서 장성해 있었다. 비록 그녀가 메리로부터 생명에 대한 보전을 약속받기는 했지만, 차라리 죽는편을 택하여 끝까지 견디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취하였다.
제인 그레이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아버지, 당신 때문에 제 죽음이 재촉된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비록 아버지로 인해 제 생명이 조금 연장될 수 있었지만, 저는 인내하며 이를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두를 제게 주는 것 보다도 저는 하나님께서 제 우울한 나날들을 단축시켜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고통의 베일 아래에서 저 천상의 왕국을 소망하여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와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환영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이틀뒤 메리의 주교를 접견하고 1554년 2월 12일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정치적이유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순교하게 되었다, 단두대에 오르기 전 그녀는 집행관에게 시편 51편을 암송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여기서 한 진실한 그리스도인 여인으로서 죽습니다. 그리고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음을 의지합니다."
“I here die a true Christian woman and I trust to be saved by the blood of Christ, and by no other means."
이 어린 여인은 죽음 앞에서 굳건하게 섰으며 자신의 육신의 아버지나 메리 여왕에 대해 원망이나 비통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영원에 그녀의 눈을 고정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지상의 보화에 있지 않았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공로를 의지하였습니다.
저자 베키 플리에고는 멕시코 가정 주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멕시코 시티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네 자녀를 키우고 있고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위한 홈스쿨링을 즐기고 있고 토요일 아침 머핀을 굽는 것을 즐겨합니다. 커피, 초콜렛과 좋은 책들은 그녀의 항상 좋은 동반자들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 매일 천국을 향하여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 http://www.beckyplie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