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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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정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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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5-11-16 06:44

본문

슬픔은 정상적이다.

 

다림플 티어도어 씀 (영국 진리의 깃발에서 발췌)

 

슬픔의 시간은 그리스도인의 일생에서 일상적이다. 세상이 구세주를 버리고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쫒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몹시 애통해했다. 우리 주님께서도 예루살렘의 죄인들을 보시고 우셨다. 그는 또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는데 마치 스데반집사가 죽었을 때 초대교회가 우셨던 것처럼 하셨다. 교회의 근심거리들을 다루는 것 역시 때때로 우리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때때로 회중들은 자신의 목회자가 울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며, 때때로 목회자는 회중의 눈물에 동참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운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심각한 슬픔이 가득한 것일까, 세상은 용서받지 못한 죄의 무게 때문에 울며, 인생의 목적이 부족해 울고 성경이 없기에 빠지게 되는 시궁창으로 인해 허우적 댄다. 2009년 1월 15일 데일리 익스프레스 잡지에 티어도어 다림플 박사는 이와 같은 글을 기고했다. '오늘날 누구도 슬프지 않지만 모든 이가 우울하다'. 참으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만 죄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는 권면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이 없다면 누구나 우울증에 빠질 것이다. (제프 토마스)

 

오늘날 누구도 슬프지 않지만 모든 이가 우울하다

 

뉴욕 대학교의 교수인 제롬 웨이크필드는 의약품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들려준다.

내가 의사로서 경험했던 지난 몇 년동안, 수백명 아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신은 우울하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중 하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내가 처음 의사로서 개업한 35년 전에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비교적 숫자가 적었다. 그들의 병은 정말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종종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아 반응이 느려지고 관심이 없어지고 자신들을 비관했으며 잘 먹고 마시지도 못했고 아무 이유없이 심한 죄책감에 빠지곤 했다. 이러한 증세를 앓는 부유한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죽기를 바랬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 버렸다. 몇몇은 심지어 자신들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믿고 있었다.

 

요즘처럼 효과적인 처방이 없던 시절에는 그런 사람들은 요양소에 맡겨 지거나 벽 한구석의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인생을 보내며 어느 곳에도 출입을 삼가했다. 보호인이 관찰하는 곳에서 이렇게 삼년 사년을 지나서는 우울증이 회복되어 나가곤 했다. 효과적인 처방의 등장으로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잘된 것임에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 '슬픔'이란 단어가 '우울증'으로 바뀐 것은 다 잘 되었다고만 볼 수 없다.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인 -기분이 언쟎음-을 의학적인 증세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곧 의사가 치료하고 돌봐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만일 최근에 과부가 된 여인이 배우자의 사별이후 너무나 빨리 너무나 발랄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그들의 결혼이 과연 행복했던가 의심할 것이다. 대중 앞에서 통곡하는 것은 절제해야할 일이지만 슬퍼하는 것까지 절제해야하는 것일까?

 

슬픔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말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고통과 같은 것이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으로 그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소수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체질을 타고 난 사람은 많은 심각한 상처를 입고 단명하게 된다.

 

이 세상은, 존슨 박사의 자서전을 집필한 제임스 보스웰에 의하면, 거대한 병원으로 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기분 나쁨'이란 단어가 '우울증'으로 바뀔 때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일 기분나쁜 것이 병이라면 모든 인간의 경험이 다 마찮가지 아닌가? 한 사람이 의사에게 자신이 우울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실상 처방을 원하는 것이며 이는 의사에게 감기약을 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엇이 그 환자를 기분 나쁘게 했을까에 대해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약 하나로 그 기분을 바꾸려 하고 있다.

 

약은 병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환자는 이제 자신이 의사에 의해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기분나쁘게 했던 그 상황을 극복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며, 이로 인해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변화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며 어찌보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알약은 정말로 효과적일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프라시보 효과와 별 다를게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이 알약이 말을 듣지 않아 환자는 의사를 다시 찾는다. 그러면 의사는 이전의 두배나 되는 알약을 준다. 두 배의 알약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 또 다른 약을 찾고, 이것도 아니면 또 다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환자는 한동안  이약을 복용해야하며 또 다시 의사에게 찾아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의사는 또 다른 약을 처방하는 이 말도 안되는 폭스트롯댄스(길고 짧은 보폭이 반복되는 춤)가 수년간 지속되어야 한다. 그 와중에 환자의 불행을 일으킨 원인은 확인도 되지 않았고 바뀌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경우의 슬픔에 대한 항우울증 치료제의 효과는 사실 굉장히 미미하여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이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 이 약들은 50대의 심각한 병세를 가진 환자들에게 임상실험이 되었는데 그들중에서 기적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 일상적인 슬픔에 대해 우울증이란 병명을 붙여 놓고 그것을 항 우울증치료제로 치료한다는 것은 마치 모든 부종을 암으로 진단하여 항암제로 치료하는 것과 마찮가지이다.

 

제약사들은 처음에 항우울제가 수익을 낼 만큼 충분히 지독한 우울증환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었다. 하지만 슬프고 불행함을 우울증으로 바꾸고 보니 이는 그들의 구세주가 된 것이다. 이제 항우울제는 모든 의약품중 가장 수익성이 높은 약이 되었다. 미국의 심리치료사인 토마스 사쯔는 일전에 '란셋'이란 재밌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사쯔 박사는 결론 짓기를 행복함이란 일종의 병이라고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행복감은 너무나 드문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찾기 위해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한다. 그 결과로 행복감은 곧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감에 도취된 자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의사들에게는 수많은 약품들이 있어서 환자들에게 자신들의 행복을 자제할 수 있도록 덜 기분좋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행감을 병으로 치료하는 것보다는 훨씬 이치타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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