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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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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여인들 - 사라 에드워즈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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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3-14 09:55

본문

* Desiring God 의 2013 죠나단 에드워드 컨퍼런스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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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가 시무했던 노샘턴 교회>

 

 

영적인 전환기


1742년 1월 사라의 일생에서 일대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어서 많은 전기작가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전기작가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대상인물의 중요한 관점을 놓치고 말았다. 이안 머레이는 이 문제를 간파하였는데 올라 윈슬로우(1940)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거부했고 이후 페리 밀러 (1949)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적대심이 극에 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머레이 죠나단 에드워즈 XXiX)


에드워즈의 전기 가운데는 그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나 초자연적인 것은 버리고  그의 철학에만 관점을 둔 명성이 자자한 작품들이 많다. 우리 독자들로서는 보다 균형이 잡힌 관점을 찾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742년 사라는 모든 작가들이 다르게 해석하는 위기를 겪게 된다. 독자들에게 이 부분을 신중하게 이해해야하는 몫을 남기고 있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배제했던 윈슬로우는 사라의 경험을 죠나단 에드워드의 외적인 명성을 위해서 성령의 강력한 표현으로 보았다. 윈슬로우는 쓰기를 "그의 아내가 이러한 극한 체험에 도달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이러한 반응에 보다 포용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윈슬로우 죠나단 에드워즈 1703-1758,205) 이러한 말 속에서 암시적으로 에드워즈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열광"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사라의 체험에 대해 분석해야 하는 것으로 인해 그의 인식은 다소 나뉘었을 것이란 점이다.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했던 밀러는 "열광"이란 것이 사탄에게서만 나온다고 생각했던 자들에 대한 반대적인 증거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밀러의 암시는 현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반응이 꼭 초자연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죠나단 에드워즈는 구식이며 초자연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고 말한다. 밀러는 에드워즈가 이러한 체험을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서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기작가 다즈(Dodds)는 사라에 대해서 "기괴하고 병적이며 - 흥분하여 환각에 빠진, 어이없게도 정신을 잃은"것으로 보고 있다.(Dodds,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중 81) 그녀는 이 사건을 어떤 전환점으로보고 원인을 사라의 과거 금욕주의가 빚어낸 결과로 보고 있다. 그녀는 많은 아이들과 까다로운 남편, 재정적 스트레스로 인한, 특히 남편이 출타한 동안 내방한 목사의 성공에 대한 질투심에 기인했다고 본다. 다즈는 말하기를 이것이 종교적인 반응인지 심리적인 분열상태인지 알수없다고 말하고 있다.(동일책 90) (역자주-Dodds는 원래 잡지 기자출신으로서 온전한 신학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사라 자신의 말 속에는 자신의 체험이 분명 영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말인가? 에드워드가 기록한 사라 자신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말을 그의 책 "부흥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이란 책 속에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녀의 이름과 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영혼은 지극히 높은 상태에 있었으며 하나님 안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육체를 거의 떠난 듯이 보였다. 마음은 순수한 기쁨 가운데 거했으며 충만한 만족가운데 있었다. 일면의 고통도 없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어떠한 방해도 느끼지 못했다....

천상의 것들과 경건에 대한 비상식적인 관점들이 존재하며 자주 육체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본성은 신성한 영적 발견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고 육체는 그 힘을 빼앗겨 버린다. 그 사람은 말할 수도 설 수도 없었다. 때때로 그의 손은 떨렸고 그의 몸은 차갑게 변했으나 감각은 남아 있었다. 동물적인 본성은 놀라운 흥분상태와 떨림 속에 있었고 영혼은 경외감으로 압도당했으며 일종의 전능한 기쁨이 이 사람을 온 힘을 다해 뛰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기쁨과 경외감에 의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의 부흥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1834년 재판, Banner of Truth 1974)

 

"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완전한 겸손에 대한 생각들이 육체를 압도하여 육체로 하여금 떨도록 만들었다." (동일책 377)

 

우리는 이 기간 모두 사라가 혼자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첫 두날을 제외하고는 출타 중이었기에 그녀는 가정을 돌봐야 했다. 일곱명의 아이들과 손님을 접대해야 했고 교회의 특별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아마도 어느 누구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녀를 인도하고 이끌어 가셨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은 사무엘 홉킨스가 에드워즈의 가정으로 거처를 옮긴 한 달 뒤의 일이었기에 그의 기록은 사라의 가장 영적 변환기 중심에 이루어졌다.

 

사라의 체험은 영적이 것일까 심리학적인 것일까? 삶의 무게와 좌절로 인한 것이었을까? 우리 어느 누구도 우리의 영적 활동에 대해 완전히 순전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죠나단 에드워즈와 사라는 그녀의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그녀의 영적인 유익과 기쁨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 그녀의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심리학적 분열이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님을 증거하는 논거가 있다.
먼저는 이러한 심리학적 분열상태에 있다가 곧바로 정상생활로 복귀하는 경우를 볼 수 없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태 7:16)라고 하셨습니다. 사라의 인생은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특별히 임재하신 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더욱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죠나단은 이렇게 그녀를 표현합니다.

매우 놀라운 온유함과 양순함과 영혼과 행동의 너그러움이 생겼고, 그 사람의 사건 이후에 이전에 보이던 것들에 대해서 매우 큰 변혁이 있었습니다. 늦은 은혜의 넘침으로 인해 완전히 사로잡힌 듯 합니다. 이는 그를 이전에 알던 친근한 지인들의 관찰을 통해 알려진 바입니다. (동일책 가운데)

 

그는 또한 독자들에게 그녀가 너무 신앙에 몰두한 나머지 세속의 일에 등한시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변화된 삶은 하나님의 흔적을 남겨 놓고 있었다. 심리학적인 불안정이 아니라 그녀가 진정 하나님을 만낫다는 것을 죠나단 에드워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일들이 광신적인 것이고 두뇌의 불안정적인 결과였다면, 내 머리도 더욱 이러한 행복한 불안정속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진정 일탈이었다면 저는 온 인류가 이와 같은 상냥하고 온유하고 유익하며 지극한 영광스러운 일탈에 빠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에드워즈 부흥에 관한 생각들, 378)

 

사 막

 

20여년 뒤에 에드워드 가족은 그의 노샘턴 교회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이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일이기에 많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로인한 사라의 심정적이고도 재정적인 어려움을 동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버림을 받았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부임을 받기까지 그들은 노샘턴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일년동안 사라는 이러한 적대적 분위기에서 한푼의 월급도 없이 이 큰 식솔을 이끌어가야 했다.

스톡브리지에는 인디언들과 소수 백인들이 이룬 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긴급히 목회자를 찾고 있었기에 죠나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다. 1750년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로 이사하게 된다. 메사츄세츠의 서쪽, 영국 식민지의 첨단에 위치한 곳이었다.

 

1871년 하퍼스 월간지에는 스톡브리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사후 백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때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받고 있었는데 아마도 죠지 와싱턴 대통령 정도만이 이 명성을 뛰어 넘었을 것이다.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에드워드가 이 스톡브리지의 역사에 남긴 위대한 역할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죠나단 에드워드가 어떻게 스톡브리지에 청빙될 수 있었는지 노샘턴에서 일어난 논쟁을 잊지 않았다.

 

"이 빈자리를 승계해준 이는 이 나라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해외에서 더욱 잘 알려진 아마도 이 나라에서 이보다 더 알려진 이는 와싱턴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철학자로서,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를 능가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20년의 가장 성공한 사역이 지난 후, 그와 그의 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밀어냈고 그것도 무례하고 불손하게 행동했습니다. 뒤 이은 에드워드에 대한 시각은 이 한탄스러운 논쟁에 대한 그의 위치를 잘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작은 스톡브리지의 변두리 자리에 청빙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기계와 같았습니다....."(Harpers magazine 1871)


마지막 장

 

이 가정은 죽음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했었지만 그것이 가까이 있음을 늘 주지하였다. 이 당시 여인들은 출산으로 쉽게 죽었으며 아이들은 열병에 쉽게 목숨을 잃었다. 또한 사람들은 한 발의 총알과 화살에 의해 얼마나 쉽게 죽었는가. 또한 잠든 사이 집이 불에 타 죽은 자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죠나단 에드워드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쓸 때 종종 이 점을 상기시켰다. 우울함에서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했다.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사실은 자동적으로 영생에 대한 필요로 인도되었다. 그는 그의 열살된 아들 죠나단 주니어에게 편지했다. 그의 소꼽친구가 죽었을 때 그는 "이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우렁찬 부르심이란다...네가 거듭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썼다.(마스덴 죠나단 에드워즈 412)

 

이 가족의 비극은 그들 인생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다.

그들의 딸인 에스더는 아론 버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뉴저지의 대학 총장이었고 이 대학은 훗날 프린스턴대학으로 불리게 된다. 1757년 9월 24일 이 사위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 한다. 에스더와 두 어린 자녀를 남겨둔 채 말이다. 이는 한해에 일어난 다섯명의 에드워드 가족사망의 첫 출발이었다.

아론 버의 죽음은 뉴저지 대학의 총장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게 하고 에드워드는 이 대학의 총장으로 청빙을 받는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스톡브리지 6년간 여러 저작을 마무리 하며 매우 풍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758년 그는 프린스턴으로 떠나며 가족들과 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죠지 마스덴은 이 때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스톡브리지에서 사라와 자녀들을 떠납니다. 당시 17세이던 수잔나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너무나 다정 다감하셨습니다." 그가 집을 나섰을 때 뒤돌아 보며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너희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동일책 491)

 

그는 실상 프린스턴 총장실로 이사조차 가지 못해 그가 쓰러졌다는 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마스덴은 말하기를 "그의 인생을 움직인 큰 힘이 떠났습니다."

 

이 에드워드와 사라의 마지막 장은 그들의 인생을 함축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증거를 말해주고 있다.

 

아론 버가 죽었을 때 사라는 얼마나 자신의 딸이 이 예측지 못한 비극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어머니로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엿볼 수 있다. 에스더는 어머니에게 남편의 사후 몇 주후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계신듯 합니다. 나를 격려하고 평안하게 인도하셔서 이러한 것을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한 어머니와 존경하는 아버지의 매일의 기도를 의심치 않습니다만 저로 이 극심한 고난에 의해 실족치 않도록 다시 한번 간곡히 기도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오 저는 제가 고백하는 이 경건에 대해 누가 될 행동을 할까봐 두렵습니다." (다즈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 160)

이 가장 어두운 삶의 순간에 그녀는 하나님께 불손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간곡한 간구를 올렸다.

 

죠나단 에드워드가 프린스턴에 도달하자 마자 그는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게 된다. 아직 이 예방법은 실험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는 곧 전염병에 걸리고 1758년 3월 22일 죽음을 맞게 된다. 사라는 아직 스톡브리지에 머물고 가족들이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의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한지 3달이 채 안된 시기였다. 이 마지막 순간에 그는 신학적인 내용이 아닌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는 자신의 딸들에게 속삭였다.

 

"이제 곧 당신을 떠나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소. 그러므로 내 가장 친애하는 아내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해 주시오. 우리 인생동안 그토록 오래 유지되었던 특별한 연합(Uncommon Union)은 내가 믿기로 영적인 성격의 것이었소 그렇기에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오 그리고 이 큰 고난 아래에서 힘주시기를 바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의탁하시오." (E 드와이트 "죠나단 에드워즈의 회고" 작품들 1:clxxviii)

 

                               jonathan_edwards_5.jpg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 사라의 묘>

 

사라는 일주일 반이 지난 후 에스더에게 편지를 쓴다. (에스더의 남편이 죽은지 6개월이 지난 시간이었다.)

"내 사랑하는 자녀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검은 구름으로 덮으셨구나. 오 그 막대기에 키스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우리 입을 가리고 싶구나! 주께서 하셨단다. 그분께서 나로 그의 선하심을 더욱 사모하게 하시는구나. 네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가 내 마음을 가지셨구나. 오 내 남편과 네 아버지가 남기신 발자취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자 거기에 내가 있고 내 사랑이 있단다. 너의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에드워즈" (동일책 1:clxxix)

 

에스더는 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지도 못했다. 4월 7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2주 뒤 에스더는 열병으로 죽게 된다. 슬하에 샐리와 아론 쥬니어 두 자녀를 남기게 된다. 사라는 이 손주들을 데려오기 위해 프린스턴으로 떠난다.

10월 사라는 스톡브리지에 에스더의 자녀들과 함께 여행한다. 친구집에 잠깐 머물렀을 때 그녀는 이질에 걸려 이 생의 삶을 마감한다. 이 때가 1758년 10월 2일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증거는 이러했다.
"그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였으며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소원했다. 죽음 끝까지 그를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했으며 이 기조를 끝까지 유지했다. 죽기까지 차분하고 평안하였다."(다즈, 어려운 사람과의 결혼 169)

 

그녀는 그 해 죽은 다섯번째 에드워드 가족의 죽음이었으며 그해 프린스턴 묘지에는 4명의 가족묘가 남게 되었다.

 

사라 에드워즈는 누구인가

 

그녀는 죠나단 에드워즈를 위한 가정 주부이자 그의 지지자요 보호자였으며 에드워드의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열정은 그의 사후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사라는 경건한 어머니이자 열한명의 자녀들의 모범으로서 이 땅의 위대한 시민이자 저 천국의 시민이다.

 

그 모든 중심에 그녀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일찍이 하나님과의 달콤한 영적 교제를 알아 체험했으며 은혜 가운데 자라났으며 한번은 극적인 하나님의 방문을 맞이하여 인생이 변화되는 경험을 했다.

 

사무엘 홉킨스의 보호자요 위로자였으며 죠지 윗필드의 아내상에 대한 모델이 되었고 수 많은 경건한 여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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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희승님의 댓글

이희승 작성일

6년전 미국 뉴욕에 3주정도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프린스톤 대학내에 조나단에드워드 목사님의 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무척왔던 날, 혼자서 프린스톤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뉴욕에서 2시간정도 떨어진 프린스톤 대학역에 내려서 학교까지 들어가는 작은 열차를 타고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 묘지를 찾아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방학기간이라 썰렁한 교정을 혼자서 3시간동안 걸어 다녔지만 못찾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다음날 다시 가보았는데...알고 보니 프리스톤대학 밖에 있는 프린스톤 학장 및 교수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동묘지 사무실에 들어가서 조나단에드워드 묘지를 찾는다고 하니깐. 저더러 그분을 어떻게 아냐고 너무 의아해 했던 사무관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이나네요.  그 넓은 공동묘지를 작은 지도를 가지고  1시간 돌다가 포기하고 나오려고 하던 중 정문 근처에 가까운 곳에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의 묘지와 바로 옆에 사라 에드워드 그리고 찰스 핫지 묘지를 발견하고 뛸듯이 묘지앞에서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잠시 묘지앞에서 짧은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글썽거렸던 것.  한가지 씁슬한 기억은 프린스톤신학교 앞에서  학교 셔틀 버스를 기다리던 신학생으로 보이던 두 청년에게 조나단에드워드를 아느냐고 묻자? 누군지 모르겠다며, 이 학교 다니는 학생이냐고 물음에 제가 오히려 당황했던 것도.  글을 읽으며 제게 잊쳐지지 않는 추억이 떠올라 이렇게 긴 댓글을 올려봅니다. ㅎㅎ

유정란님의 댓글

유정란 작성일

에드워드에 대한 글은 늘 저에게 특별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나 귀하군요, 장로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영혼은 지극히 높은 상태에 있었으며 하나님 안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완전한 겸손에 대한 생각들이 육체를 압도하여 육체로 하여금 떨도록 만들었다" 크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 내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진 것 같은 경험...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만이 가득한 경험... 드물기는 하지만 저에게도 허락하셨던 황홀한 체험이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열살된 아들 죠나단 주니어에게 편지했다. 그의 소꼽친구가 죽었을 때 그는 "이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우렁찬 부르심이란다...네가 거듭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 저도 이렇게 자녀에게 교육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거듭났다는 충분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 절대 안주하지 말거라."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계신듯 합니다. 나를 격려하고 평안하게 인도하셔서 이러한 것을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한 어머니와 존경하는 아버지의 매일의 기도를 의심치 않습니다만 저로 이 극심한 고난에 의해 실족치 않도록 다시 한번 간곡히 기도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오 저는 제가 고백하는 이 경건에 대해 누가 될 행동을 할까봐 두렵습니다." ---- 남편을 잃은, 마치 지붕이 떨어져 날라가 버린 듯한 상황에 이토록 경건한 기도의 부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경건이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극심한 고난에 의해 실족치 않도록 간구하는 것...연약한 죄인이 참으로 간구해야 할 것 아닐까요!

그는 이 작은 스톡브리지의 변두리 자리에 청빙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기계와 같았습니다....."(Harpers magazine 1871)---- 내 영혼에게, 스스로에게 설교하는 것. 알고있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 중의 하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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