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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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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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6-05-25 09:44

본문

행복 추구 (Pursuit of Happiness)

 

켄 마이어스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에서 발췌)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행복 추구권"이란 표현을 통해 신이 인간에게 준 불가분의 인간권리를 나타내고자 했으며, 오랜 역사 동안에 이 아이디어를 전유하고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이전부터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추구해야할 어떤 조건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그리스인들과 특히 성경기자들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이 감정적이거나 느낌의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어떤 객관적 현실이었다. 오늘날 "무엇이든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란 표현은 그리스인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넌센스와 같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행복이 깃들만한 확실한 도덕적 기준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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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스미스가 주연했던 영화 행복추구>

 

행복이란 대략적으로 성경의 "복락"이란 개념과 유사하다. 전통적이며 중세 기독교의 윤리에서 행복이란 진정한 선함의 측면에서 한 인간의 삶의 잘되고 넘치는 풍요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한 개인이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 사고, 소망과 열정이 인간의 합당한 목적에 잘 부합해야만 했다. 행복함이란 이와 같이 윤리적인 것이지 심리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한 존재 전체의 살아야할 이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욕망과 행동이 가르침을 받아야함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말하면 인간존재는 본능적으로 진실한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매력적인 유혹적 즐거움이 우리 본성의 필수적인 윤곽과 일치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행복 추구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여 그에게 순종하는 조건 안에서 번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러함으로써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들로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방탕함이 우리를 자신의 깊고도 진정한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기에 이 행복추구는 이제 오직 은혜로서만 가능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죄의 무질서한 효과를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진정 성화의 기능이며 거룩한 순종 안에서의 성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식은 의심의 여지 없이 현시대의 대다수 사람들과 심지어 기독교인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지만 아마도 대다수 비기독교인 철학자들에게는 긍정의 표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일전에 기독교 국가로 불리던 곳이 행복함에 대한 반 기독교적인 개념을 얻게 되었는지 의아스럽다.

이 해답의 일부는 18세기에 일어난 윤리적인 혁신적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제퍼슨이 몰두해 있던 계몽주의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시대에는 철학자들이 인간의 목적을 정의하고 있던 인간본성의 필수적인 생각을 버리는 시기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죄에 대한 개념을 버리는 시기였는데 왜냐하면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지도받지 못한 인간 본성 그대로'를 얘기하면서 모든 윤리와 정치의 기초적 개념을 이해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본질적으로 죄가 없는 인간 본성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또한 이 시대는 개인의 자유가 모든 사람들과 사회의 최고의 선이었다. 미국이 세워졌을 당시 이 시대의 철학은 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에 철저히 몰두해 있었다.

그러한 바탕에서 행복의 추구란 숭고한 개념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행복이란 무엇이든 개인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을 위한 확고한 목적이 더이상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에 행복 추구는 곧 쾌락의 추구로 바뀌게 되었으며, 재미에 대한 쉼없는 추구를 위해 걱정없는 감정적인 상태를 축복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개인이 내려야할 윤리적인 선택이나 개인의 삶을 질서있게 하기 위한 방법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악한 윤리적 선택을 방편으로 삼고 있으므로 부모를 거스리고 간통죄를 범하며 낙태를 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있다. 행복이 겨우 어떤 분위기를 의미하게 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될 때 모든 규칙은 깨어지게 되어 마치 오무라이스 위의 계란처럼 되는 것이다.

 

20세기에는 매스 미디어와 오락의 무소부재한 형식들로 말미암아 행복 추구는 하나의 재미로서 일종의 윤리적 필수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1950년대 심리학자인 마사 울펜스타인은 그녀가 일컬었던 소위 '재미의 윤리학'의 출현에 대해서 기존의 선한 도덕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도덕이 "순간의 격정을 제지하였으며 재미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 점검으로 보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금지된 격정을 기뻐하는 것은 과거에 죄악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과 다르게 오늘날은 재미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 개인의 자존감을 저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행복이란 것이 인간의 객관적인 목적을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아무런 비평없이 개인의 즐거움과 일치하게 되었다. 이 즐거움이 행복의 근원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가장 일상적이고 편만한 것으로 점점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재미적 윤리의 명령에 휘둘리게 되면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수동적인 소비가 더 그럴듯한 행복의 길로 여겨지게 되어 보다 적극적이며 힘이드는 즐거움 즉 악기를 배우고 문학의 즐거움이나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 등은 보다 불확신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행복이란 것이 기성화된 인스턴트 소비문화로서 자리잡게 되어 많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반론이 제기돠고 있다. 최근 죤 페리 바로우가 쓴 "공허함의 추구"란 에세이에서 "내 주변의 친구들과 친지들은 프로작 국가(PROZAC NATION-시판되는 우울증치료제 상표명, 역자주)의 시민들이 되어버렸다. 그들중 어느 누구도 이 약이 진정한 행복에 보다 근접하게 도와주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지옥에서 그들을 구출해준 이 우울증 치료제에 대해 생기없는 감사를 중얼거릴뿐이다. 그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자살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 바로우는 자신이 자주 가는 샌프란시스코 부유촌의 유기농 매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있는 웃음을 연구해본 결과, 11달동안 수천명의 얼굴을 보았는데 "거의가 건강하고 아름다웠지만 아주 비싼 어두움의 그늘이 보였다." 그는 일곱번의 웃음을 발견했는데 그 중 3개는 진실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대신 매장과 그 외에서는 특징적인 "자아도취적 고통의 일그러진 표정이 일반화된 얼굴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창조주의 관점이 아닌 스스로의 관점에서 행복을 찾다보니 우리의 본성 안에 이제는 지치고 실망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 엘리엇은 그의 책 "잘되는 것보다 나은 것"에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보다 기분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많은 개선기술을 이용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행복에 대한 또 다른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엘리엇은 사람들이 행복 추구가 너무나 절실하기에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폭력적으로 대들며 무의식중에서도 갈구하고 끌어안아 내 심장에 새겨 넣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추구의 범위는 놀랍기만 하다. 그것들 중에는 그들이 상상하는 환상과 그들이 쓰는 돈과 그들이 독소를 뿌리는 관계들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의 행복추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회복방안은 우리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지식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는 오직 그의 말씀 안에서 피조물로 거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죄로 인해 무질서한 세상에서 살 때, 진정한 복락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고통과 환난과 희생이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근심에 익숙하고 슬픔의 사람이셨던 분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가 배운 지식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진정 재미있는가?"라고 물으신 적이 없다. 그대신 신실한 종들에게는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고 가르치셨다. 행복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시킬 때 얻게되는 열매인 것이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주님은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 15장10절-11절). 이러한 일편단심 신실한 마음가짐에 대한 추구는 재미에 대한 단순성이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인간 행복에 대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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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겸님의 댓글

김욱겸 작성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지식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주 안에서 기쁨으로 만족하는 사람들과 일평생 세상에 속아  헛된 것을 추구하다가 끝나버리는 안타까운 인생들이 극명하게 대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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