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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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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에서 율법을 설교하는 것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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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일 작성일 17-06-1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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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에서 율법을 설교하는 것의 중요성

 

죤 머레이 목사씀  (영국 진리의 깃발 잡지에서 발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를 실망시키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중에는 세상의 영에 복종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낮은 체험의 수준, 마음으로부터의 경건이 없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적음, 주일에 대한 경시, 영원에 대한 진지함이 부족함, 예배에 대한 경솔함 등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작은 것들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위로하려고 하지만 현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대보다 더 못한 시기임을 알아야 한다.  이 시대는 무관심하고 자만하며 해이하고 세속적이다. 하지만 그 윤리적인 면에서 과감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무엇보다 문제이다.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이 설교했던 율법

 

모두가 종교개혁이란 다름아닌 부흥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과연 무엇이 성령 하나님께 도구로 쓰였는가 물어야 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적용으로써, 십계명을 현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전도의 시작은 명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설교 가운데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죄인들의 인식 속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계명에 대한 설교만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E.F. 케반이 그의 책 ‘율법의 은혜’에서 하는 주장은 ‘청교도들이 자신의 시대 가운데 팽배했던 윤리적 무관심을 십계명을 이용하여 제거하였다.’이었으며 이것은 진리였다.

 

종교개혁을 불지핀 것은 마틴 루터의 회심이었다. 그가 가졌던 질문은 ‘어떻게 나 같은 난쟁이가 신성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였으며, 어떻게 율법을 범한 죄인이 신적 거룩함을 맞설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양심이; 깨어난 것이다. 그는 한 죄인이 코람데오(하나님의 존전에 서다)할 수 있겠는가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양심에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야만인처럼 울부짖었고 양심은 혼란스러웠다. 이 때 사도바울이 이러한 때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롬 1장 17절) 갈급하고 불타는 심령으로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자 했다. 그는 이전에 그 구절에서 죄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나타난 그 분의 의로움을 생각하도록 배워 왔었다. 하지만 신적인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춰주었을 때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죄인들을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복음 속의 또다른 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자 그는 ‘나는 이순간 바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천국으로 가는 열린 문으로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율법은 개혁주의자들과 후에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루터와 같은 맥락에서 칼빈도 ‘하나님의 의를 밝힘으로써 율법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결국 자신을 정죄할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기독교강요 2 7장) 하지만 칼빈은 율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다 발전시켰는데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어 사회 가운데서 악을 억제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제시되었다라고 보았다.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만들어진 요리문답서와 신앙고백서들은 십계명에 중심을 두었으며 청교도들의 설교와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복음이 역사하기 전에 반드시 율법이 역사 해야함을 알았다.

 

성경에 나타난 복음 전의 율법

 

율법을 설교해야하는 우리의 합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도덕적인 율법은 단지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의미없는 규칙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토마스만톤이 얘기했듯이 최초의 밑그림은 하나님이 작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는 어두움이 없다.’(요한 1서 1장 5절) 그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최초의 인류의 부모를 창조하셨다. 창조시에 사람에게 심겨진 것은 창조주의 도덕적인 율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을 기록한 것 뿐이었다. 앤소니 버게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도덕적인 율법과 그에 대한 순종은 아담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과 거룩함이었다.’ 사람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볼 때 그는 하나님이 어떻하신 분인지 알았고 그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최초의 부모가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렸을 때, 그들 안에 있었던 신적인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생겼다. 사람은 정죄를 받았고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사랑은 이제 원한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자로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도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해 책임있는 존재로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루터와 같이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서야할 존재로 남아 있다. 마음 속에 기본적으로 남아 있는 율법 때문에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목소리인 옳고 그름에 대하 센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양심은 죽은 것이고 굳어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은 율법을 통해 양심을 깨우는 것이다. 그것만이 죄인들을 깨울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을 들어도 그것이 자신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이 율법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율법을 알기 전에는 죄를 알지 못했다. (롬 7장7절)’라고 말한다. 왜 율법을 설교하는가? 성경의 해답은 복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죄인들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화가 나있으시며 그의 진노가 왜 나를 향하는지 알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나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율법이란 자기의라는 안온함을 깨뜨려줄 뿐이다. 율법에 의한 확신은 일깨워진 죄인들이 자비를 더 이상 소망할 수 없게 만든다. 율법은 복음을 아는 위선주의자들을 일깨워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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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미선님의 댓글

한미선 작성일

<p>"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남아 있는",  그리고 "영원함에 대한 진지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것인 것을요.. 산자나 죽은 자나 가장 큰 책임으로 소유하게 될 것인 "영원함"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 우리가 영원함 앞에 놓여 있습니다...</p>

김욱겸님의 댓글

김욱겸 작성일

"복음이 역사하기 전에 반드시 율법이 역사 해야함을 알았다" 
"만일 죄인들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화가 나있으시며 그의 진노가 왜 나를 향하는지 알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고 죄인들을 정죄하는 율법은 마지막날까지 한 획도 변하지 않고 온전히 설파되어져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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