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마르지 않는 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교리교육" 1,신조와 성경과의 관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창섭 작성일 18-03-20 16:13

본문

앞으로 일곱 번에 걸쳐 지난2017년 진리교회 말씀수련회에서 강론하신

진리교회 강문진목사님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교리교육" 특강을 올리려고 합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에서 출력물이 필요할 때가 있는것 같아서 올립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교리교육"

신조,신앙고백 그리고 교리문답을 가르치는것은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해 오던방식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사도들은 교리를 가르쳤으며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들은 계속 그일을 하였다.

많은 신앙고백서들과 요리문답서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신조, 신앙고백 그리고 요리문답서는 성경의 지위를 빼앗는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돕는 것이다.

신앙고백서가 없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때에 자기 마은대로 아무렇게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떤사람들은 "신조는 필요 없고 오직 성경만 있으면 된다." 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조와 신앙고백은 오래된 것들이고 또 그것들은 성경에 무엇인가 덧붙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무지와 오해이다.

신조와 신앙고백이 성경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신조나 신앙고백을 만들어서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1,신조와 성경과의 관계

신조와 신앙고백이 성경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성경 하나만으로 충분한데 왜 신조가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대니얼 하이드는 그의 책"개혁교회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에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한다.


어떤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가 초교파 교회에 다니는 친구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자네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무엇인가?

어떤 신앙고백서를 갖고있지?" 복음주의자인 친구는 간단히 이렇게 답했다.

"물론 성경이지," 개혁교회에 다니는 친구는 다소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이렇게 말햇다.

“그런데 성경을 신앙고백서로 쓰기엔 양이 너무 많지 않은가?"


신조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은 신조를 믿지않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은 신조를 믿지않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만이 우리를 인도하는데 충분하며, 여기에 다른 무엇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조와 신앙고백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다는 것일까?

틀림없이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이해할 것이다.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신조 또는 신앙고백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이다.

그들은 신조를 믿지않고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차이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만들어져 왔던 신조를 믿을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를 믿을 것인가?"라는 것이된다.

어떤것이 더 신빙성이 있겠는가?

어떤 것이 더 믿을 만 하겠는가?

당연히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보증된 많은 신조들과 신앙고백서들이 더 신뢰할만한 것이다.

신조를 믿지않고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은 신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 상투적으로 하는 말인 것이다.

신조, 신앙고백 그리고 요리문답은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신조에는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 등이 있고, 신앙고백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등이 있으며,

요리문답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및 소요리문답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다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디모데후서1장 13,14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라고 말하는데,

조셉 파이파는 이 구절이 신조의 사용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위 두 구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메시지에 대한 이중 요약을 주고 있다.

첫째, 그는 "바른 말의 표준(standard of sound words)"에 대하여 언급한다.

"바른 말"이란 성경에 의해서 가르쳐진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말"은 그리스도에게 직접 배운 바울로부터 디모데가 받은 진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바른"이라는 용어는 참되고 정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것들을 디모데에게 요약하여 주었고, 그것을 "표준"또는"본"(form)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선언하고 있는것은,

그는 디모데에게 사도적 교리의 어떤 본 또는 패턴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그의 영감받은 글들(서신서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에게 전해준 요약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14절에 나오는 평행 문장에서 재자 강조되고 있다.

거기서 바울은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에 대해 말한다.

디모데에게 지키고 돌보도록 바울이 맡긴 바른 교리의 본 또는 패턴이 바로 보배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디모데에게 맡겼던 어떤 구체적인 요약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은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디모데가 받은 것을 잘 지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또한 전해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디모데에게 주었던 사도적 교리의 요약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들에게 신조를 사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성경이 명령하는 바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는 성경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요약한 것이며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만약 신조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설교 또한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설교라는 것은 설교자의 신조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조가 없어져야 할 것이라면 설교자들은 오직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설교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항상 힘쓰라"라고 명령한다.

신조가 필요치 않다는 주장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다브니(R. L. Dabney)는 이렇게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도와 교화의 수단으로서 모든 설교자들에 의한 신적 진리를 말로 설명하고 재차 강조하는 것을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율법책을 똑똑하게 읽도록 하였고, 

그 읽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모든 영감 받지 못한(평범한) 목사들과 교사들에게

그들이 신적 진리라고 믿는 바에 대하여 인간적이고 영감되지 못한 해설(이것이 곧 신조인데)을 알려줄 것을 단순히 허용한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다. 

만일 그러한 인간의 신조들이, 만일 한 단독 교사에 의해서 작성되고 구전으로 그리고 정교한 준비가 없이 전해진

그러한 신조들이 교회를 위한 교훈의 합당한 수단들이라면, 학식있고 경건한 목사들의 주의깊고, 성숙하고, 공동의 작품으로서

기록된 문서의 형태로 정확성을 기한 것으로 주어진 것들은(교회를 위한 교훈으로) 매우 적합하고 성경적이라는 보다 더 강한 이유를 가진다.


신조를 끊임없이 폐지하려는 자는 모든 설교를 침묵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가르침들을 성경의 말씀들을 자구 하나하나 그 어떤 해설이나 노트 없이 낭독하는 것으로 축소시켜야만 할 것이다.

신조가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신조와 신앙고백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해설 없이 오직 성경만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윌리엄 헤더링턴은 신조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될 때 듣는 사람은 모두 제각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만일 스스로가 이해한 의미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개념이 모호하고 불명료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매우 그릇된 오류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청중이나 교사가 각자 전달했다고 믿는 의미를 뚜렷한 말로 설명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서로가 똑같이 이해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더욱이 교회는 자신의 울타리안에 속한 사람들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그들에게 건전한 말로 이루어진 신앙고백을 제시해 그들의 지식을 확증하고 독려하는 한편,

그릇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신자들이 믿는 진리의 핵심에 관해 모두가 동의하는 신앙고백을 만들면

장래에 교사가 될 사람들이 동일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칠 것이라고 믿고 안심할 수있다.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서로 일치단결해 동일한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 

그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꾸준하고 일관되게 제시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사역자들이 모두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신조나 신앙고백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교회는 신앙고백 없이는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의 지체들에게 올바른 의무를 다할 수 없다.

이처럼 신조와 신앙고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조와 신앙고백을 사용하여야 하며 또한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을 교육하여야 한다.

  • 목록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라인으로 보내기

댓글목록

김욱겸님의 댓글

김욱겸 작성일

“신조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요약한 것이며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신조는 성경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보배와 같습니다.

Total 1,033건 11 페이지
마르지 않는 샘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883 한미선 2018-11-05
882 이수려 2018-10-18
881 한미선 2018-10-16
880 이성일 2018-10-08
879 임태희 2018-09-25
878 정호준 2018-09-18
877 이수려 2018-09-19
876 이창섭 2018-09-17
875 이성일 2018-09-06
874 이수려 2018-09-04
873 이창섭 2018-09-05
872 이성일 2018-09-03
871 한미선 2018-08-27
870 이수려 2018-08-27
869 이성일 2018-08-21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