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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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윗필드 -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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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은 작성일 18-12-24 06:36

본문

 

 

조지 윗필드 (제 1권)

 

                                              George.png

 

 

감사의 말/추천의 글/가계도

 

1 1714-1741

 

 

들어가는 말 1. 왜 윗필드를 알아야 하는가

 

 

·         18세기 사람들이 알았던 윗필드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윗필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난다.
윗필드가 죽은 뒤 세상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기이할 정도의 무심함이었다.(23)

·         부실한 전기, 편집이 형편없는 『저술집』, 유실된 자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초상화, 동료들의 업적이 부당하게 과장된 현실 같은 모든 요인들에다 사람들의 평가에 무관심했던 윗필드의 태도가 어우러져 그의 참모습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을 가로막았다.(31)

·         나는 18세기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조지 윗필드를 발견해서 제시하려고 노력했다.(32)

·         나는 20세기가 최고로 필요로 하는 것은 200여 년 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그런 강력한 복음주의적 신앙부흥이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이 책을 썼다.
그래서 18세기 신앙부흥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교리가 무엇이지 보여주고, 그 복된 역사 사운데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사람들의 특징이던 특별한 열심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다.(33)

 

 

들어가는 말 2. 신앙부흥운동 이전 영국의 영적·도덕적 상태

 

 

·         1730년에서 1740년까지 10년 동안 영국인들의 삶은 도덕적 타락으로 더럽혀지고 영적 부패로 절름거리는 상태였지만, 바로 그런 상황─오늘날 영어권 세계와 아주 흡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을 강력하게 행사하시며 떨쳐 일어나셨고, 그것이 18세기의 신앙부흥으로 이어졌다.(35)

·         사회 풍조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 계속 실패했다는 것은 영국이라는 나라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문제이며, 어떤 강한 힘이 등장하여 그 '불경건의 흐름'을 근원부터 틀어막지 않는 한 그 흐름은 계속되리라는 것을 입증했다.(48)

 

 

 

 

Ⅰ부. 사역을 준비하던 시절

 

 

01 윗필드의 가계

 

·         (허들스톤이 밝혀낸 사실들)는 윗필드 집안이 오랜 기간 옥스퍼드 대학교와 관계를 유지하며 잉글랜드 국교회 사제를 배출해 왔음을 보여준다.(51)

 

 

02 조지, 벨 여관의 소년: 1714~1732(출생~18)

 

·         옥스퍼드에서 한 학기를 보낸 청년이 우연히 조지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대학 학비를 부담할 수 있었다고 했다.(69)

·         "17세가 되던 해부터 죽는 날까지 윗필드는 신랄한 적들과 시기심 가득한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에 단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살았다."(71)

 

 

03 옥스퍼드, 홀리 클럽과 회심: 1732~1735(18~21)

 

·         스쿠걸의 책 덕분에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뜬 윗필드는 그 책이 말하는 생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         그의 첫 번째 노력은 육체적으로 더욱 엄격한 금용 생활을 하는 것이었고(82)

·         그의 다음 시도는 정적주의Quietism를 실천하는 것이었는데(88)

·         그는 이(홀리 클럽) 친구들을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필연적인 행위를 입증해줄 만한 최고이 희생이라고 생각했다.(90)

·         인간 차원의 모든 수단이 바닥나고 구원을 추구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사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절대 획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바로 그것을 그에게 허락하셨다.(91)

 

 

04 하나님과 사람에게 안수받다: 1736(22)

 

·         그는 새 생명의 축복을 자기 혼자 간직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해야 했다.(98)

·         윗필드의 경우에는 그런 체험이 필요 없이 회심 그 자체 이후 줄곧 전폭적 헌신이 그의 삶의 특징을 이룬다.(100)

·         이제 나는 안수를 받을 것이고 학위도 취득해, 세상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세상 속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내가 끊임없이 투쟁하고 몸부림치리라는 것, 이 생을 사는 동안 십자가 외에 다른 어떤 평안도 바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109)

·         (벤슨) 주교는 "그의 사람됨을 들어 알고" 있었고, 아마 그의 성경 공부·기도와 금식 생활·교도소 심방 사역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지난번 건강 회복차 글로스터에 몇 달 머무는 동안 그가 만든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최근에 옥스퍼드에서 돌아온 뒤 몇몇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조치해 준 것, 그리고 이번에는 "세상이 다 아는 죄인들과 자기 죄를 애통해해는 자들을 위해" 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소식 또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111)

·         안수식은 1736 6 20일 주일(이 날짜는 율리우스력에 의한 기록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과 3일 차이가 난다. 영국은 그레고리력을 1752 9월 도입했다) 아침에 예정되어 있었다.(112)

·         6 27일 주일, 세인트 메리 드 크립트 교회에서 그는 첫 설교를 했다.(114)

 

 

 

 

Ⅱ부. 청년기의 사역

 

 

 

01 온 나라를 놀라게 한 설교: 1737(23)

 

 

·         (런던 타워 채플) 설교단에 오를 때, 내가 너무 어리다는 것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진지해져서 내 설교에 깊이 집중했고,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자 경의를 표했으며,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나를 보며 칭찬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했다.(122)

·         더머에 머무는 동안 윗필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원대한 결단 한 가지를 내렸다. 이 결단은 그의 평생을 지배하게 될 터였는데, 그것은 바로 조지아(미국 동남부의 주)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124)

·         이 결단과 함께 윗필드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더 하려 했던, 혹은 영국에서 더 사역하려고 했던 모든 계획을 다 내려놓았다.(126)

·         당시 런던은 약 5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였는데, 이들 상당수가 윗필드의 사역에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을까? 그의 설교나 그의 인격의 어떤 점이 그런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았을까?
틀림없이 이 사람들은 깊은 영적 굶주림 때문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당시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 곧 도덕적 속박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성경을 부인하며 범죄가 횡행하고 잔혹한 태도가 보편화되어 있던 상황 속에서 그들은 교회로부터 도움을 얻기를 오랫동안 갈구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갈망은 다 허사였다.(133)

·         온 나라가 바로 그러한 형편이었을 때, 조지 윗필드의 목소리가 런던 설교단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확신으로 말했고, 그의 설교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명료했다. 그는 오직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본 교리만을 설교했다.(134)

·         그가 설교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웅변술 때문도 아니고 그의 열성 때문도 아니다.
그의 성공의 첫 번째 비결은 바로 이것, 곧 하나님의 권능이었다.(135)

 

 

02 한 청년의 설교: 1737(23)까지의 설교

 

·         (초기 단계의 사역 때) 그의 설교의 주된 특성은 성경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 교리를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표현이 단순하다는 것이다.(137)

 

 

03 지속성 있는 결과: 조지아로 떠나기 이전(1738 1)까지

 

·         명성에 이끌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실제로 윗필드도 이런 지나친 찬사가 "맹렬히 타는 풀무불"( 3:6)과 같다고 생각했다.(151)

·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설명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끊임없는 자각은 이때부터 그의 삶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152)

·         그의 인기, 그리고 성공적인 기금 모금 활동─불과 넉 달 사이에 그는 자선 학교를 위해 약 1,000파운드를, 조지아의 빈민들을 위해 300파운드가 넘는 돈을 모금했다─은 많은 목회자의 마음에 질투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열정은 평범하게 목회하면서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153)

·         하지만 윗필드의 사역이 일으킨 소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는데, 그것은 사역이 견고하고 영속적인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가 일군 사역은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시점에서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성장하기도 했다.(155)

·         조지아로 떠날 날이 다가오자 윗필드는 이 사람들의 영적 성장이 지속되도록 도울 준비를 했다.
그는 신앙 단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그 열심, 복음을 중심으로한 연대連帶, 그리고 윗필드에 대한 충성 가운데 한 움직임의 시발점을 형성했다.(157)

 

 

04 군목 역할을 하다: 조지아로 가는 휘터커호 안에서(1738 1~4, 24)

 

·         그렇다면 이처럼 재주 많은 (웨슬리) 형제가 왜 조지아에서와 같은 실패를 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은 이들이 아버지인 새뮤얼 웨슬리 목사에게서 물려받은 몇 가지 특징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현실감각이 없고, 상대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입증되었다.(167)

·         이렇게 해서 휘터커호 갑판은 일종의 선상 예배당이 되었으며(173)
윗필드는 지브롤터에 겨우 15일 머물렀지만, 런던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 쾌활한 성격과 뜨거운 열심은 짧은 기간 동안 이 군사 요충지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지브롤터를 떠나 조지아로 항해하는 동안 윗필드는 선상의 양 무리들을 대상으로 신앙 훈련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175)
여정이 계속되면서 복음의 효과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났다.(177)

 

 

05 영국에서의 상황들: 1738

 

·         윗필드가 아메리카에 가 있던 동안 영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의 사역은 지속되고 있었고, 신앙 공동체가 번성했으며, 목회자들은 그를 적대했다. 모라비아 교도들이 영적 온기를 몰아왔지만, 성경에 취약했던 이들은 미신적 관습을 영국에 소개했다. 프랑스 예언자들이 안데없이 광신주의의 요소를 들이밀며, 유사 초자연주의가 늘 그렇듯 열심만 있고 생각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했다. 브리스틀, 글로스터, 런던에서는 대체적으로 신앙 운동이 유지되고 성장했지만, 미신과 광신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지도자와 성경 교육이 확실히 필요했다.(196)

 

 

06 웨슬리 형제의 회심: 1738

 

·         찰스가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음에 따라 무엇보다도 그의 안에 있던 시적 재능, 그 보고寶庫의 빗장이 풀렸다. 그의 영혼은 시인의 감성이 고조되는 것을 줄곧 경험했고, 그의 지성은 본능적으로 그 시적 언어에 조화로움을 부여했다. 그의 펜 끝에서는 찬송시가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왔고, 그 시들은 힘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된 시들로서, 덕분에 그의 시들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찬송시 영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212)

·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초창기 사역 때부터 그()가 당시 신앙 단체들의 현안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신앙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통합된 단체를 지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조직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이는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220)

 

 

07 식민지 사역: 1738 5~8(24)

 

·         이 식민지 전체 인구는 아마 1,000명이 못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윗필드는 브리스틀과 런던의 수많은 회중을 떠나온 것이다.(223)

·         윗필드는 식민지 내 모든 정착지를 찾아다니며 사역했고, 그곳 사람들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영적인 일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에까지 미쳤다.(226)

·         윗필드는 분별력을 가지고 조지아의 경제적인 문제에 개입했다.
그가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227)
식민지에는 집 없는 아이들이 꽤 많았고, 그중에는 정말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돕는 길은 고아원을 세우는 것뿐이었다.(228)

·         영국으로 돌아가 고아원 설립 인가를 받고 기금을 모으려는 계획을 세움에 따라 윗필드는 식민지 사역을 종결짓게 되었다.(230)

 

 

 

 

Ⅲ부. 변화의 시기

 

 

01 십자가의 걸림돌: 1738 12~1739 1(25)

 

·         윗필드는 자신의 사역에 적대감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영국에 없는 동안 그 적대감이 어느 정도나 확산되어 있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238)
그는 어디에서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저 설교에 힘썼고, 말 그대로 밤낮없이 분주한 사역으로 돌입했다.

·         윗필드가 가장 큰 활동 공간을 발견한 곳은 바로 신앙 단체였다.(239)

·         1739 1월 초, 윗필드는 잉글랜드 국교회 사역의 두 번째 단계, 곧 사제 안수를 받기 위해 옥스퍼드로 갔다.

·         이 시절은 윗필드에게 영적 성장의 시기였다.(242)
이때에 이르러서는 아마 설교를 읽어 내려가는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이제 원고를 사용하되 자유롭고 즉흥적인 설교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며 설교를 했을 것이다.
전과 달리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뒤섞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구원은 인간 영혼 안에서 이뤄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강한 확신으로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243)

·         왕세자 지도 목사Chaplain to the Prince of Wales (윗필드가 주장하는) 구원의 확신을 "영적 교만", "엄청난 광신 상태"로 말하면서······(245)

·         자신과 대다수 성직자들 사이에 심각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윗필드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246)
성직자들이 그에게서 모든 교회의 출입권을 박탈하는 데 성공하는 날이 온다면, 그는 그 어떤 교회의 수용 인원보다 많은 사람들을 야외로 불러 모을 수 있을 터였다.(250)

 

 

02 하월 해리스

 

·         야외에서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원래 윗필드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두려움 없고 지칠 줄 모르며 활동적인 웨일스 사람 하월 해리스Howell Harris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251)

·         서신 교환이 시초가 되어 해리스는 윗필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매우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254)

·         웨일스 산지 출신의 이 '보아너게'( 3:17)는 그동안 너무 오래 그 존재가 간과되어 왔다. 그의 이름은 이 시대에 웨슬리나 윗필드만큼 잘 알려져야 마땅하다. 그는 감리교의 야외 설교를 개척한 자요, 순회 전도의 창시자요, 다수의 신앙 단체를 창시하여 그것을 하나의 영속성 있는 조직으로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다.(266)

 

 

03 야외로 나가다: 1739 2~3(25)

 

·         이것(야외 설교)은 아직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 엄청난 무리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수단이었고, 이것은 교회당이나 신앙단체 집회실의 사용가능 여부에 매달려야 하는 상태로부터의 해방이었다.(267)

·         모건이 이미 야외 설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윗필드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가능하다면 킹스우드로 가려 했고, 광부들을 대상으로 야외에서 설교하려 했다.(269)

·         이 무렵 윗필드의 인생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는 안락했을 수도 있는 삶을 집도 없이 떠도는 자의 삶과 맞바꾼 뒤 아메리카에서의 두 가지 귀중한 사역에서 윗필드를 뒷받침해 주었고 불타오르는 헌신으로 주님을 섬겼다.(270)

·         (브리스틀의 조셉) 버틀러 주교가 자신의 일련의 활동을 최소한 지지는 한다는 확신으로 무장한 윗필드는 더욱 힘을 새롭게 하여 사역에 박차를 가했다.(281)

·         이들은 이 만남을 계기로 어떤 공식적 조직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때로부터 윗필드의 사역과 해리스의 사역은 폭넓은 교제 가운데 서로 연합하게 되었고, 이는 앞으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들이 웨일스 칼빈주의적 메소디즘Welsh Calvinistic Methodist을 형성하는 토대를 제공했다.(284)

·         그가 야외 사역을 그만두려 한 것은 다시 조지아로 가야 할 책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287)

 

 

04 존 웨슬리가 야외 설교자가 되다: 1739 3~4

 

·         윗필드는 브리스틀 사역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는 도합 4만에서 5만 명(그의 계산에 따르면)이나 되는 청중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거의 30번의 집회를 열고 있었다. 물론 아주 단기간에 진행된 일인 만큼 즉흥적이고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았지만, 누구든 이 일을 물려받을 사람은 이것을 영속적 형태로 조직화할 수 있는 풍성한 기회를 갖게 될 터였다.(289)

·         윗필드는 의도적으로 웨슬리에게 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291)

·         윗필드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도 그런 사역이 열어 보인 밝은 전망에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293)

·         이 지역을 떠나기 전 윗필드는 킹스우드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흘 전 킹스우드에서 그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일을 처음으로 거론하고 거기 소용될 돈으로 상당한 금액을 모금했다.(294)

·         브리스틀 사역에서 그는 지적인 면에서나 의지적인 면에서 그가 지닌 모든 엄청난 능력을 마음껏 활용하여 일할 수 있는 광대한 영역을 난생처음 발견했다. 사역자로서의 성공, 자신의 아버지가 그토록 오래 추구했으나 결국 얻지 모샜던 그 환영, 조지아에서 그 자신은 물론 찰스까지 그렇게 피해 다니기만 하던 성공이 지금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299)

 

 

05 런던의 야외로: 1739 4~5(25)

 

·         킹스우드에서 사역하면서 그는 야외 설교를 정착시켰는데, 이는 어느 한 장소에 제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웨일스나 글로스터에서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그는 일정한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사역의 전범典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 국교회 법에 심각히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다.(304)
그래서 이제 그의 앞에는 많은 갈등들이 닥치게 되었다.(305)

·         윗필드는 이렇게 (이즐링턴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거부당하는 것을 정당한 근거로 삼아 런던에서의 야외 사역에 가능한 한 전적으로 돌입하고자 했다.(307)

·         (런던의 무어필즈와 케닝턴과 더불어 변두리인) 블랙히스·햄스테드히스·셰드웰 등에서 설교했고······
또한 그는 런던 북부의 몇몇 자치주들을 순회하며 설교를 했다.(313)

·         윗필드는 이 엄청난 활동 가운데서도 짬을 내어 설교집을 더 발간했다. 이런 힘든 일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는 출판용 설교 원고를 일주일에 한 편씩 만들어 냈다.(317)

 

 

06 존 세닉

 

·         아메리카로 떠날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윗필드는 영국에서의 사역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우선 존 웨슬리의 마음을 움직여 브리스틀 사역을 이수하도록 했고, 다음으로 런던과 글로스터 사역을 넘겨줄 사람을 물색했다. 킹스우드 광부들을 위해 학교 세우는 일을 시작한 만큼 그 학교 교장으로 봉사할 사람도 찾아다녔다.(320)

·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던 세닉의 계획은 하나님의 섭리로 복음 설교라는 더 고귀한 일로 바뀌었다.(325)

·         세닉은 윗필드의 가장 친한 친구요 한때 그의 우두머리 참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대한 설교자들의 시대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능력을 지닌 설교자가 되었다. 세닉은 후에 모라비아교로 들어가 아일랜드에서 대단히 영웅적으로 교단을 섬기며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328)

 

 

07 웨슬리 운동의 시작

 

·         이즈음 이 두 사람 사이에 신학적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광범위한 결별이 이뤄졌다.(329)

·         불화는 브리스틀에서의 초기 몇 주 동안 웨슬리가 했던 한 설교에서 처음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설교는 다름 아닌 예정론을 반박하는 설교였다.(330)

·         분열을 초래할 게 뻔한 이 문제를 부흥운동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을 그의 의무로 삼도록 공식적으로 허가해 준 것은 청중의 감정적 체험과 제비뽑기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게 좋다.(332)

·         윗필드는 계속해서 웨슬리를 런던 사역에 밀어 넣는 한편 무어필즈와 케닝턴에서도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게 했다(338)

·         브리스틀에서 사역하면서 웨슬리는 반反예정론 말고도 또 하나의 특유의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이는 그의 움직임에 더욱 확실한 정체성을 더해 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교리였다. 그는 도달 가능한 완전함이라는 개념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는 회중에서 목격하는 압도적인 감정 체험을 완전 성화 체험과 연관시키기 시작했다.(339)

·         웨슬리가 부흥운동에 억지로 끼워 넣은 이 완전 교리는 더욱 심한 불일치의 원인이 되었다.(342)

 

 

08 표적과 기사

 

·         하지만 이 현상, 1739년 영국에서 나타난 이 현상은 거의 전적으로 존 웨슬리의 사역에만 한정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349)

·         웨슬리의 설교 때 청중 일부가 스스로 발작을 유도해 내는 게 습관이 되면서 사람들은 진짜 체험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감정적 체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승인을 의미한다고 믿었던 그가 자신의 설교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를 바랐고, 청중에게 이를 조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350)

·         그러나 윗필드는 청중이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이런 현상에 대한 혐오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353)

·         (존 웨슬리)가 떠나가면서 히스테리 현상은 진정되기 시작했고, 몇 달이 자나자 브리스틀과 킹스우드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다 그쳤다.(355)

·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은 '메소디즘'하면 감정적 열광을 연상하게 되었고, 윗필드는 발작 행위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런 행위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         이 극단적 체험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다 훨씬 온건한 또 다른 체험─흔히 회심에 이어지는 체험으로서, 은혜의 두 번째 체험─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이는 흔히 일컫는 말로 완전 혹은 거룩함을 받았다는 고백과 관련된 체험으로서, 이 두 번째 체험이 웨스리 운동의 주된 특징이 되었으니······(356)

 

 

09 윗필드-옳은 점과 틀린 점

 

·         ! 슬프도다! 얼마나 많은 일들에서 나는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동했는가. 나는 장소와 사람을 판단할 때 너무 경솔하고 성급했다. 성경의 언어를 좋아한 나머지 나는 너무 사도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나는 열심 면에서 너무 격렬했다. 그 열심에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이 뒤섞였고, 성령의 도움으로 글 쓰고 말한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기분대로 쓰고 말할 때가 많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의 막연한 느낌을 내 행동 법칙으로 삼았던 경우도 너무 많고, 좀더 오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더라면, 혹은 내가 죽은 뒤에 알려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들을 너무 빨리, 너무 노골적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런 것들로 인해, 내가 지키려고 했던 복된 대의大義를 손상시켰다.(357~358)

·         사역자는 회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부흥운동이 펼쳐졌던 모든 교파 사이에서 중요한 기본 원칙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런 개념이 도입되면서 일어난 변화는 한 세기 이상 효과가 지속되었다.

·         윗필드가 성직자들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그를 둘러싼 논쟁도 점점 더 고조되었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한 작가는 이 인쇄물들을 샅샅이 검토한 뒤 말하기를, "1739년에서 1740년 사이에······발행된 200개의 반反메소디스트 인쇄물 중에서 154개는 윗필드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한다.(365)

·         반대자들이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그가 하는 말들을 면밀히 검토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친구들 또한 그를 방어하기 위해 역시 그렇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중생과 관련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깊이 생각해야 했고, 구원의 근원이라든가 구원의 역사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지, 구원의 역사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이고 지속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등의 질문에 스스로 고민하여 답변해야 했다.(375)

 

 

10 블렌던 홀에서의 로맨스: 1737년 가을~1741 11(23~27)

 

·         윗필드는 맨 처음 조지아에 가기 전인 1737년 가을부터 엘리자베스 (델라모트)와 알고 지냈다.(386)

·         그가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서로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만 속해 있는 자리를 그 누구도 빼앗게 할 수 없다는 결단 가운데 윗필드는 이런 욕망들을 뭉개 버렸다.(396)

 

 

11 찰스 웨슬리가 야외 설교자가 되다: 1739

 

·         자신이 영국에 없는 동안 사역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기 위한 준비로 윗필드는 찰스 웨슬리까지 야외 사역으로 밀어 넣었고 이어서 런던 야외 사역의 리더 역할까지 맡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398)

·         그가 윗필드를 홀리 클럽에 소개했지만 이제는 윗필드가 그를 자유로운 사역으로 이끌었고, 찰스는 영웅적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열심으로 들판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전하는 일에 평생 헌신했다. 그의 사역은 영적 능력과 큰 성공이 특징이었으며, 그 사역은 감리교 웨슬리 분파의 전全 행로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406)

 

 

12 1739년의 메소디스트 운동: 1739 8월까지(25)

 

·         이 일(윗필드의 사역)은 영속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통일성이 있었는데, 이는 이 사람들이 복음의 교리에 보편적으로 충성하고 윗필드를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데서 비롯되는 그런 통일성이었다. 이 일은 남부 잉글랜드의 넓은 삼각형 지대에서 하나의 신앙 운동을 형성할 만큼 뚜렷하고도 지속성이 있었다.
그 결과 윗필드 추종자들은 '메소디스트'라 불리게 되었고, 이들이 형성한 운동은 '메소디즘'Methodism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서 윗필드가 이 운동의 리더요 창설자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 감리교의 리더요 창설자로 말이다.(409)

·         브리스틀과 런던과 글로스터에 웨슬리를 천거함으로써 윗필드는 그를 영국에서 벌어지는 전체 부흥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게 만들었고 또 대규모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할 수 있는, 일찍이 어떤 사역자도 누려보지 못한 이점을 누리게 해주었다.(418)

·         이는 윗필드가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지 겨우 여덟 달 만이었는데, 그중 여섯 달을 야외 사역에 바쳤고, (그 자신의 계산에 따르면) 거의 200만 명에게 설교를 했다. 야외로 담대히 내디딘 발걸음으로 그는 당대의 연약하고 겁 많은 기독교를 흔들어 깨웠고 죄와 불신앙을 대적해 공격적 투지로 향하는 길을 인도했다.(420)

 

 

13 은혜의 교리: 1739 8~10(25)

 

·         이 편지들은 그가 부흥운동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복음주의 원리를 장려壯麗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가 생각하는 이 운동의 특징은 교파적 차이를 파기하는 하나 됨이었고 파당을 조장하거나 어떤 조직을 형성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 강하게 바대하는 것이었다.(428~429)

·         이러한 독서 활동, 죄의 의미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통찰, 은혜의 본질에 대한 더욱 풍성한 지식 등이 다 어우러져 이 항해 기간 동안의 윗필드의 체험에 녹아들었다.(434)

·         그는 이따금 칼빈주의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 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에서 발견한 것이라는 점을 훨씬 더 중시했으며, 그 입장을 은혜의 교리라는 표현으로 자주 언급했다.(439)

 

 

14 윗필드가 도착할 당시 아메리카의 신앙적 형편: 1720~1735

 

·         (윗필드)는 때마침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에드워즈의 지도 아래 시작되어 진척을 못 보이고 있던 각성 운동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마치 타오르는 횃불처럼 식민지 전역으로 이를 밀어붙였다.(441)

·         1720년에서 1735년 사이, 이 땅은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부흥을 경험했다. 이 부흥은 이 땅 몇몇 지역에서 일어났고, 다음과 같은 큰 제목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펜실베이니아 독일인들 사이의 신앙부흥
② 뉴저지에서 테오도루스 프렐링하이젠의 사역으로 전개된 신앙부흥(442)
③ 식민지 중부 지역 장로교인들 사이의 신앙부흥(443)
④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의 신앙부흥(449)

 

 

15 아메리카를 알아 가다: 1739 10 30~1740 1 10(26)

 

·         행로: 델라웨어 주 루이스타운 → 필라델피아 → 뉴욕 → 필라델피아 → 메릴랜드 주 노스 이스트 → 윌리엄스버그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 조지아 주 서배너

·         필라델피아는 지리적으로 식민지 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기지 삼아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을 알아 나갈 생각이었다.(462)

·         그는 아메리카 시절 초기부터 영국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인기를 누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총애를 받았고 목회자들과는 우정을 누렸다.(463)

·         그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논쟁이 아메리카에 있는 잉글랜드 국교회로도 들어왔고, 바로 이 점 때문에 국교회 성직자들 거의 대부분이 그에게 격렬히 반대하게 되었다.(464)
이에 따라 그는 원래 교제권 사람들과는 대부분 다 멀어지고, 장로교도·네덜란드 개혁파·침례교도들과 가까이 교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특정 교파의 교리에 충실한가가 아니라 복음적 건전성을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사역은 교파에 얽매이지 않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469)

·         그는 이 식민지 땅, 자신이 곧 대규모 자선 기관을 세우려고 하는 이 땅이 헐벗고 가난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자들을 공급받는 데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외딴곳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476)

 

 

16 베데스다 고아원을 짓다: 1740 1~7(26)

 

·         영어권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18세기 영적 대각성의 가장 복된 결과 중 하나는, 아동 복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커졌다는 것이다.(477)

·         윗필드는 고아원 운영과 관련하여 어떤 이상理想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상이었다. 베데스다는 다른 무엇보다도 복음의 영향력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482)

·         이렇게 유감스러운 바탕(신탁 위원회, 조지아 총독, 치안판사 등의 방해) 위에서 윗필드는 베데스다 건물을 완공시켜 나갔다. 이런 와중에서 그의 최고의 즐거움이 되었어야 할 이 고아원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게 되었으니······(497)

 

 

17 청혼: 1740 4(26)

 

·         그의 계획은 애정을 바탕으로 청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는 베데스다에 살림을 관장할 여자가 절실히 필요하므로 엘리자베스에게 그 자리를 제안하면서, 그녀에게 제시할 전체적 조건의 부수적 요소로서 결혼 의사를 넌지시 비치기로 했다.(503)

·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그 부모의 편지를 받은 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끝이 났다.(511)

 

 

18 봄철 순회 사역-필라델피아와 뉴욕: 1740 4 2~6 5(26)

 

·         행로: 조지아 주 서배너 → 델라웨어 주 뉴캐슬 → 필라델피아(→ 네샤미니 → 스키팩 → 암웰 → 뉴브런즈윅) → 뉴욕 → 필라델피아(→ 화이트클레이 크릭 → 팩스 매너 → 노팅엄 → 팩스 매너) → 조지아 주 서배너

·         이 『편지』('대주교 틸럿슨에 관하여 런던에 있는 한 친구에게', '흑인 노예들에 관하여 메릴랜드, 버지니아,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는 저항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틸럿슨을 공격한 데서 비롯된 이런 적의와 더불어, 노예 소유주들을 비난한 것 때문에 그보다 더 격렬한 적대감이 초래되었다. 그 결과, 그 뒤로 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줄곧,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이 『편지』의 여파로 강력하고도 신랄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518)

·         그는 더위와 피로로 거의 죽을 뻔할 때도 있었다. 그른 하루에 세 번씩 말 위로 끌어 올려졌다. 다른 방법으로는 말에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을 타고 가서 설교를 하고는 숙소에 들어와 의자 두세 개를 붙여 놓고 길게 몸을 뉘었다.(520)

·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 가르침을 얼마나 몰두해서 들었는지 하루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예배가 드려졌고, 그것이 1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보통 예배가 세 번씩 드려졌고, 네 번씩 드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적 모임을 갖는 단체가 필라델피아에 26개가 있었다.(528)

·         그는 순회를 나섰던 목적을 잘 완수했다. 중부 식민 주州들을 부흥시키는 일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지아에 베데스다 고아원을 유지할 수 있도록 500파운드가량의 돈을 모금해 왔으니 말이다.(530)

 

 

19 윗필드와 아메리카 흑인

 

·         남부 식민 주州를 지나며 풍요로운 농장과 그것을 유지하는 노예들의 노동을 보면서, 그는 흑인들이 수치스럽게 대접받고 있고 드러내 놓고 잔인한 처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31)

·         그는 『흑인 노예들에 관하여 메릴랜드, 버지니아,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썼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해서 이것을 프랭클린에게 넘기며 출판을 부탁했다.(532)

·         이에 노에 소유주들은 격노하여 보복을 하려 했고, 이후 윗필드가 평생 동안 겪은 중상모략적 선동은 대부분 이 편지가 촉발시킨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533)

·         윗필드가 흑인들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 짓기 시작한 나사렛 하우스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완공되기도 전에 모라비아교에 양도되었다.(535)

·         흑인들을 위한 노력 외에도 윗필드는 앨러게니 인디언들Alleghany Indians 가운데 시작된 일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539)

 

 

20 여름철 순회 사역-찰스턴과 그 주변 지역: 1740 7 2~7 25(26)

 

·         윗필드가 봄철 순회 전도 사역으로 중부 식민 주州를 돌며 설교하고 있는 동안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그를 공격하는 일련의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찰스턴에 있는 세인트 필립 교회 교구 사제이자 잉글랜드 국교회 주교 대리인 알렉산더 가든이 주도한 일이었다.(549)
잉글랜드 국교회 역사상 식민지에서 교회 법정이 열린 전례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든)는 교회 재판을 열기로 했다.(554)
교회 당국자 중 그 누구도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평결이 아무런 효력이 없지는 않았다. 윗필드의 대적들은 이 평결문을 손에 넣고는 그가 죽는 날까지 이를 근거로 그가 성직을 박탈 당했으며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추방당한 자가 되었다고 비난했다.(559)

·         처음에 왔을 때 이곳 찰스턴 사람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쾌락에만 몰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보석상과 춤 선생이 장사가 안 돼 망할 지경이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         가든의 적의敵意로 어려움을 겪은 결과 교회의 교리에 관한 윗필드의 사상에도 큰 발전이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회심 이후 줄곧 그는 홀리 클럽의 배타적인 국교도 입장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고, 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장로교인·침례교인·독립교회 교인 들 중의 복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이 과정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 아침마다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에 계속 참석했지만, 세 차례에 걸쳐 가든의 장황하고 신랄한 공격을 당한 뒤 그는 이 관행을 수정해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561)

·         남부 식민 주州에서 윗필드의 사역을 통해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침례교였다.(562)

 

 

21 가을철 순회 사역-뉴잉글랜드: 1740 914~10월말(26)

 

·         봄철 순회 시작 때처럼 이번에도 그는 아무 공지 없이 왔고, 그의 도착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곧 흥분해서 그의 설교를 들어러 떼 지어 몰려들었다.(567)

·         이날 대화(주교 대리의 집에 모인 5명의 국교회 성직자들과의 대화)와 함께 아메리카에서 윗필드와 잉글랜드 국교회와의 관계는 끝이 났다. 식민 주州들을 순회하는 이 여정에서 그가 국교회 성직자를 찾아가거나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다.(570)

·         이런 경이로운 움직임은 윗필드가 보스턴을 떠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30개의 신앙 단체가 세워졌다. 목회자들은 일상 직무 외에 거의 매일 밤 개인 가정에 가서 설교했다. 예배당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576)

 

 

22 회심하지 않은 사역자들과 맞서다

 

·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사역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관행에 그가 저항을 했다.(587)

·         윗필드는 회심치 못한 성직자에 대한 자신의 경고가 대학뿐만 아니라 식민지 전역에서 뚜렷한 결과를 낳는 것을 목격했다.(596)

·         그는 회심치 않은 목회자를 반대하는 입장만 취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거듭났음을 입증하는 모든 목회자들을 더 견고히 세워 주려 애쓰기도 했다.(598)

·         그러나 회심치 않은 목회자에 관한 윗필드의 발언은 그에게 새로운 적대의 파도가 몰아치게 만들었다.(600)

·         10여 년이 지나자 식민지 전역 대다수 주민들이 목회자는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604)

 

 

23 영적 수확 한가운데서의 기쁨과 슬픔

 

·         그는 풍성한 씨앗을 뿌렸고, 이제 여러 달 동안 성령께서 물 주고 가꾸시니 어디를 가나 싹이 터서 열매를 맺고 있었다.(608)

·         이때 윗필드는 선택 교리와 그 교리의 참됨을 증거하는 이 두 가지 두드러진 (회심) 사례에 특별히 더 마음이 이끌렸는데 이는 최근 이 교리에 반대하는 존 웨슬리의 편지들을 또 받았기 때문이었다.(612)

·         윗필드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이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연달아 그에게 밀려들었다.(625)

·         수어드의 죽음으로 윗필드는 극심한 곤경에 빠졌다.(629). .

 

 

☞ 조지 윗필드 제1권.pdf

 

>> 출력하실 분들은 pdf 파일을 다운로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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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구희찬님의 댓글

구희찬 작성일

<p>방대한 양을 요약해서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지 윗필드와 그와 함께 부흥을 경험하였던 많은 분들이 지금은 이땅에 없지만,

아놀드 델리모어 덕분에 그분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어제 필독서 나눔 시간에 들었던 내용을 떠올려 봅니다.

조지 윗필드의 회심, 회심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수많은 사람들이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각성함/

윗필드가 매튜헨리 주석과 청교도 저작들을 읽고 개혁주의 교리에 기반한 설교를 하였다는 점/

은혜의 교리/

영국의 영적 상황 그리고 신앙부흥운동의 필요성/

.... 1700년대에도 그랬듯이, 2018년인 지금도 주께서 부르시는 영혼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회심이 필요한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신앙 부흥, 참된 부흥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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