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마르지 않는 샘

[요약] 윗필드의 생애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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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성진 작성일 19-03-19 00:59

본문

2

 

들어가는 말 3.

윗필드와 웨슬리의 교리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1. 이 논쟁은 부흥운동 전체에 지속적 영향을 끼침

2. 논쟁의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음.

1) 윗필드는 이 논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 따라서 알려진 얘기들은 주로 웨슬리의 입장임.

2) 웨슬리 초기 전기 작가들은 주로 웨슬리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한 사람으로 그림. 따라서 웨슬리의 참모습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음.

3) 웨슬리를 전설적 인물로 보는 시각은 이 논쟁의 실체를 알려는 시도에 영향을 미침. 지금까지의 전기 작가들이 이 논쟁을 정확히 다루지 못함.

 

 

4부 논쟁.

 

1. 메소디스트 운동의 리더가 된 웨슬리.

웨슬리는 예정론 반대와 완전성화교리로 윗필드를 떠나 고유의 사역을 시작하게 됨. 윗필드는 이 일에 대해 침묵하고 그를 브리스틀, 런던, 글로스터에 천거하고 아메리카로 떠남.

군중의 수가 증가되어 신앙단체로 성장함. 웨슬리의 뛰어난 자질과 이신칭의 이해에서 오는 복음 전도의 열망은 그를 새로운 신앙단체의 리더로 성장시킴.

웨슬리가 자신의 독립적인 사역을 개시한 단계

1) 자신이 설교할 때 나타나는 강력한 감정적 효과를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과 교리를 승인하신 것으로 확신.

2) 윗필드가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면 자신이 2인자로 돌아갈 것임을 인식.

3) 부흥운동은 전반적으로 칼빈주의적 경향이 강하였으나 웨슬리는 예정론 반대설교 유포로 자신의 사역을 예정론과 단절시킴.

4) 웨슬리는 자신의 사역의 중심지를 런던으로 옮기고 파운더리를 개인본부이자 주 집회장소로 세우고 연합회를 구성함.

5) 파운더리 내에서 윗필드를 옹호하는 존 아코트를 쫓아내고 킹스우드의 학교에서 존 세닉을 쫓아냄. 킹스우드 학교 브리스틀 세 곳의 회관을 모두 장악.

6) 웨슬리는 윗필드와 결별하고 부흥운동에서 칼빈주의를 몰아내고 자신의 교리로 채우고 윗필드가 돌아와도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지 않는 곳까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함.

 

 

2.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만나다.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윗필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 윗필드는 결별을 피하기 위해 찰스 웨슬리를 만났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함.

윗필드의 곤경

1) 윗필드가 설교를 하여도 군중이 모이지 않음. 고아원 유지의 수단이 사라지고 막대한 빚을 해결할 방법이 사라짐.

2) 공동책임자 수어드가 고아원에 대한 아무 유언 없이 빚만 남기고 사망함으로 부담이 가중됨.

3) 출판업자 제임스 허턴이 모라비아 교도가 되어 윗필드의 설교 출판을 거절.

4) 틸럿슨 주교에 대한 강경 발언 이후 많은 친구들의 반감을 삼.

5) 가든 주교가 씌운 혐의.

6) 건강상의 문제.

7) 웨슬리 형제의 적대로 대중들이 윗필드에게 등을 돌림.

윗필드는 모든 상황을 하나하나 풀어감.

1) 크리스찬 어뮤즈먼트 주간 신문(후 위클리 히스토리) 발행- 영국과 아메리카의 부흥운동 알림.

2) 윗필드 지지자 몇몇이 그를 위해 지은 건물(장막)을 집회 장소로 사용

3) 런던 야외 설교 재개, 회중의 수 회복해감.

윗필드가 자신의 사역을 회복해가는 중 웨슬리가 찾아옴.

1) 웨슬리는 윗필드가 그(웨슬리)를 몰인정하게 대했고, 더 이상 그와 우의를 나눌 수 없으며, 웨슬리 형제를 반대하는 설교를 계속하겠다고 말하였다고 일지에 남김.

2) 그러나 윗필드는 아메리카에서 웨슬리의 혐의를 벗겨 그를 도왔으며, 그의 편지에서 웨슬리 형제를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라 부름. 또한 윗필드의 반박설교는 웨슬리형제의 인격이 아닌 그들의 교리를 향한 것이었음.

3) 그러나 웨슬리는 결별의 모든 원인을 윗필드에게 전가함.

 

 

3. 웨슬리의 설교에 대한 윗필드의 반박.

웨슬리의 값없는 은혜설교에 대한 답변서 출판함.

웨슬리와 윗필드의 주장 비교

웨슬리

윗필드

선택의 교리에 대해 믿는 자의 형세와 영원에 대한 확신보다, 이를 믿지 않는 자의 현재에 대한 확신이 더 탁월하다.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은 자가 다시 마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현재에 대한 확신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신의 부패와 사탄의 교활함을 아는 자에게 현재에 대한 확신이 어떤 위로를 주겠는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8:33)만이 온전한 믿음의 확신이다.

선택의 교리는 기독교와 계시를 필요없게 한다.

오직 기독교의 계시로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 수 있다. 그분을 알고’, ‘믿는것을 통해 택자를 구원하는 것이 영원한 언약에 정해져있다.

솔직담백하고 애정과 아름다운 정신의 이 답변서는 상당한 효과를 불러왔다. 다만 웨슬리의 제비뽑기의 오류를 언급함으로 웨슬리는 자신이 인신공격 당하고 배신당했다고 여김.

 

4. 사역을 재건하다.

하루에 2번씩 런던 야외에서 설교. 청중을 회복, 한달 뒤 고아원을 위한 모금 재개함. 사역 재개 5주 후 브리스틀과 글로스터에 가서 설교함. 완전주의의 지독한 가라지를 제거하기 위해 자칭 완전하다하는 자의 불완전함을 지적함. 3주만에 이 오류가 상당히 사라졌으나 웨슬리 형제는 이를 불쾌하게 여김. 사역재개 9주 후 잉글랜드 전역, 스코틀랜드에서 설교 초청이 옴.

웨슬리의 대응.

1) 20쪽 남짓의 소책자 12권 발행 윗필드의 영향력 상쇄하고자 노력, 일상에서도 윗필드 대적

2) 윗필드에게 편지를 써서 킹스우드 학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공격함.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악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도 (웨슬리의) 아버지와 비슷했다. P.708 L.1)

윗필드의 대응.

1) 킹스우드와 새 회관에 대한 권리 포기.

2) 일지 출판 중단 - 웨슬리와의 갈등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려는 노력이나 그 결과 우리는 한 편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듣게 됨.

3) 완전히 성화되었다 주장하는 자의 불완전을 지적하는 일을 그만둠.

4)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나 웨슬리에게 트집잡힐 일은 피함. 되도록 논쟁을 피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에 더 큰 은혜를 주셔서 회중의 규모가 커지고 말씀에 능력이 음하며,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 설교 초청이 옴.

 

 

    

 

5. 양 대륙의 칼빈주의적 복음전도자.

 

1. 스코틀랜드로 가다.

스코틀랜드의 영적 상태

1) 16세기 종교 개혁의 영향 아래 스코틀랜드 교회 탄생, 칼빈주의 장로교 국교회 체제.

2) 17세기 잉글랜드인에 의해 잉글랜드 국교회 강요당함, 스코틀랜드인은 이를 거부하고 엄숙동맹을 맺음. 이 서약자들은 순교를 당함. 잉글랜드 국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적대감 형성.

3) 18세기 적대적 시각이 완화되나 영적으로는 퇴보, 칼빈주의를 숙명론으로 이해함

4) 1718근대 신학의 정수재발간됨. 청교도의 신학으로 채워진 이 책은 숙명론에 빠진 사람에게 영적 기쁨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줌.

5) 이 책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 책이 선택 교리에서 이탈하였고, 보편 구원론을 옹호한다고 말하는 다수의 온건주의자와 이 책이 말하는 것이 진정한 칼빈주의이다 라고 말하는 소수의 복음주의파로 분열됨. 온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복음주의자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정치적으로 막음. 어스킨 형제를 위시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에 항거하며,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교회를 정죄함. 어스킨 형제, 스코틀랜드 국교회에서 정직당하고 연합 장로회 설립.

윗필드의 스코틀랜드 방문.

1) 스코틀랜드 복음주의자의 청빙으로 스코틀랜드에 옴. 온건주의자들은 윗필드를 반대.

2) 윗필드는 자신을 초빙한 어스킨형제의 교회에서 먼저 설교함. 연합장로회측에서 자신들의 편에서만 설교할 것을 요구하여 연합장로회와 공적으로는 결별하고 스코틀랜드 국교회내 복음주의자들과 협력함.

3) 연합장로교회와의 결별이 윗필드가 자신의 신념을 타협한 것이 아님.

. 윗필드는 어스킨형제의 싸움이 교리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정치의 문제로 이해.

. 스코틀랜드 국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복음주의자들과 잉글랜드 국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자신과 동질감을 느낌.

. 스코틀랜드에서 윗필드는 자신의 메시지를 수정하지 않음.

. 그는 되도록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자 하였으나 교리에 오류가 없는 사람들과만 협력함.

4) 윗필드는 에든버러를 기지삼아 순회전도를 다님. 윗필드가 떠난 후에도 사역의 효과가 지속되어 부흥을 경험하게됨.

 

 

2. 결혼

제임스 부인과 결혼함.

윗필드보다 10세 연상, 10대 딸(낸시)을둔 과부, ‘젊지도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으나심지가 곧고 친절하고 온유하며 용감한 여인.

하월 해리스와 애정이 있었으나 주께만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해리스는 그녀를 윗필드에게 소개함. 윗필드는 영적으로 진지하고 고상하며, 윗필드의 복음전도의 의지를 공감하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감으로 확신함. 제임스 부인의 결혼 수락으로 17411114일 케이플 마틴에서 존 스미스의 집례로 혼인예배 올림.

윗필드는 서로에게 영적 도움을 제공하고 사역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결혼의 방침으로 삼음. 윗필드는 결혼생활이 사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것을 아쉬워하였으나 대체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감.

 

 

3.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하다.

무어필즈, 메리르본에서 폭도들의 방해와 공격을 받으나 굴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감.

 

 

4. 캠버슬랭 대부흥

캠버슬랭과 킬사이드는 각각 윌리엄 메컬록 목사와 제임스 르보 목사의 성실한 사역에도 뚜렷한 열매가 없었음.

윗필드가 처음 스코틀랜드에 방문하였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전한 복음이 퍼져나가 각 지역에 기도공동체가 살아나고 청중의 관심이 증가.

윗필드가 두 번째 스코틀랜드 방문시 캠버슬랭에서 설교하자 회중사이에 영적 비통이 확산됨. 사람들이 밤새 기도하고 찬양. 스코틀랜드 전역의 사람들이 캠버슬랭에 모여듦.

캠버슬랭 부흥의 특징

1) 청중 사이에 강렬한 감정적 표현(회심하지 않은 자의 울부짖음과 떨림, 신자의 황홀경에 가까운 기쁨)이 드러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전체 회중의 1/5수준, 대부분은 고상하고 질서정연하였음.

2) 부흥운동에서 사용된 성경 본문은 특히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 아님.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말씀이 더 많음.

3) 부흥의 결과 많은 이가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됨. 죄의 슬픔보다 기쁨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함.

4) 캠버슬랭에서 시작된 부흥은 킬사이드와 인근 도시로 확장됨.

캠버슬랭 부흥이 주는 교훈.

1) 부흥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

2) 부흥은 뛰어난 은사는 없으나 진중한 열심히 수고한 맥컬록 목사의 사역으로 시작됨.

3) 부흥은 기도로 시작되었고, 많은 기도를 하게함.

4) 부흥은 선정주의 쇼맨십이 아닌 기독교의 교리의 영향 아래 시작됨.

5) 위대한 교리를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실재와 성품을 깨닫고 죄를 자각하는 효과가 나타남.

6) 가장 능력있는 집회는 성찬식이 거행된 집회임.

7) 감정적 표현은 권장되지 않고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경우에만 가치가 인정됨.

8) 회심을 고백한 사람은 진정성을 검증 받아야 했음.

9) 검증을 거쳐 진정성이 증명된 사례만 수백건, 이 일은 인간적 근거로는 설명이 안 됨.

이 시기 윗필드가 처한 곤경

1) 연합장로회의 반대-윗필드가 잉글랜드 국교회 출신이라는 점에서 적그리스도의 수족, 우상숭배자라 공격하고, 자신을 위해 모금하였다 비난하며, 캠버슬랭 부흥을 부정함.

2) 고아원 사제와 의사가 수감됨.(국교회 성직자가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죄명으로)

3) 스페인의 조지아 침공

4) 윗필드의 친구들과 모라비아 교도사이의 불화.

 

 

5. 웨슬리와의 화해를 모색하다.

윗필드는 웨슬리와 화해를 위한 조취를 취함.

1) 웨슬리 형제에 대해 관대하다는 주장에 윗필드는 신앙은 타협하지 않으나 연합하겠다고 답함. 부흥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연합하는 것이 그의 생각임.

2) 결별 후 두 달 뒤 편지를 보냄

3) 웨슬리의 사역을 돕고 핍박받는 웨슬리 사람들을 위해 모금 진행

웨슬리의 태도가 누그러짐

1)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알미나안 메소디스트, 모라비아교 연합총회 구성하고자 노력함.(회의가 열리는데는 실패)

2) 웨슬리는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견인 교리를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수용

3) 윗필드와 웨슬리의 관계가 상당히 회복되었으나 완전한 화합에는 이르지 못함.

 

 

6. 부흥운동을 조직화하다.

윗필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자신을 절제하며 엄격한 자기 훈련의 삶을 살았듯, 광활한 지역을 사역할 때에도 체계적이며 계획적으로 사역함.

런던의 장막 신앙 공동체

1) 신앙 상태를 검증한 후 입회가 가능, 감독의 지도 받음

2) 학교, 빈민 구제소, 작업장과 직업소개소 운영함.

런던 이외에 공동체 결성

1) 런던 이외에 설교 장소, 집회소를 두고 활용. 킹스우드에 새로운 학교 설립

2) 1741년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뒤 3-4년동안 신앙 공동체 36, 설교 장소 25곳 만들고 조직하며, 각각의 공동체에 권면자(권사)를 두고 양육을 맡김.

3) 초기 감리교의 관행-대중 권면자와 개인 권면자의 구별, 웰례회, 편지회람의 날-이 윗필드에게서 먼저 나옴.

웨일스의 부흥운동 조직화를 도움

웨일스와 잉글랜드 메소디스트 사이의 유대 강화, 칼빈주의적 메소디스트 협회 결성됨, 윗필드가 종신 의장으로 지목됨,

 

 

7. 시련과 승리

초기 메소디즘은 극심한 물리적 폭력을 겪음. 지역 성직자, 치안판사는 이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모든 소요의 원인을 메소디스트에게 돌리거나 국교회를 지키기 위해폭도들을 활용하기까지 함. 폭력사태가 심각해지자 부흥 운동 자체에 방해가 될 것이라 판단한 윗필드는 폭도들을 법정에 세워 유죄 판결을 받음. 이후에 폭력사태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빈도나 규모가 줄어듦.

윗필드의 아들의 사망. 위대한 설교자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아 존이라 이름한 4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사망함. 윗필드는 이때 느낌에 의지하는 태도를 버림.

메소디스트의 행위와 처신에 대한 악의적 소책자 발간됨. 메소디스트를 광신주의, 국왕에게 불충하는 자로 공격함. 윗필드는 답변서를 통해 효과적으로 방어함.

1744년 초 아메리카에서 고아원에 문제 발생하고, 광신주의가 확산됨.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존 세닉을 공동체 리더로 세우고 아메리카로 떠남.

 

 

8. 대각성운동

윗필드가 아메리카를 다녀간 후 부흥운동은 계속되나 해로운 요소가 침입함.

교회의 분열

 

친 부흥

반 부흥

회중교회

뉴 라이트 (new light)

올드 라이트 (old light)

장로교회

신 학파 (new school)

구 학파 (old school)

침례교회

분리파 (separatists)

정규파 (regulars)

광신주의

1) 친 부흥파 안에서도 광신주의와의 싸움이 있음.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책을 출판함. 조나단 에드워즈-성령 사역의 특징과 표지, 조나단 디킨슨-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나타남, 조나단 파슨스-중대한 시기에 반드시 주의해야할 일,

2) 이들은 영적 감정을 흉내 낸 감정적 현상을 경계하고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제어하는 한편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되의 자각으로 인한 두려움과 황홀경에 가까운 기쁨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줌.

3) 제임스 대븐포트

. 대각성에 뛰어들어 많은 이들을 회심케 했으나 허약한 기질과 쇠약한 심신으로 광신으로 빠져듦.

. 꿈과 환상 직통계시 주장,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기 거절하는 모든 자를 정죄함.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우상 숭배를 치유한다며 가발, 외투, 개머리판, 두건, 가운, 반지, 보석류를 모아놓고 불사름.

. 건강을 되찾은 뒤 자신의 광적 행동을 고백하고 철회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 후에도 그의 사역을 모방함.

4) 이러한 폐단들은 일부에 해당한 것이나 반대파들은 윗필드에게 모든 책임을 물음. 그러나 1740년 대각성 운동은 순전하고 영적인 운동이었으며 광신주의가 발생한 1743년에 윗필드는 영국에 있었음.

 

 

9. 아메리카에서 부흥운동중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다.

17441026일 뉴햄프셔 요크에 도착. 그의 나이29, 오랜 항해로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사역을 이어감.

부흥운동중 광신주의의 폐해의 책임을 윗필드에게 떠넘기면서 윗필드가 분열을 조장하고 광신주의를 확신시킬 것이라 주장. 특히 하버드대학 일부 교수는 윗필드를 공격하는 증언출판. “증언의 내용

1) 윗필드는 자기 느낌을 의존하는 광신주의자임.

2) 하버드와 예일이 무지몽매에 빠졌다 말하는 트집잡기 좋아하고 몰인정한 사람임.

3) 그는 대중을 기만하는 자이다. 고아원 재정 보고서는 허술하고 일부 내용이 뭉뚱그려져있음

4) 즉흥설교, 순회설교는 비성경적임.

윗필드의 답변

1) 자신의 미숙하고 극단적인 부분에 대한 시인

2) 하버드가 첫사랑과 믿음의 능력을 잃었다는 하버드 총장 홀리요크의 설교 인용

3) 자신의 고아원 재정보고는 다른 시설의 보고에 비해 훨씬 자세함.

4) 자신의 설교 방식과 순회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에게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음.

윗필드의 답변에는 몰인정하고 트집잡기 좋아하는사람의 태도가 보이지 않고 주님의 일에 방해를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두드러지며, 젊은 시절 미숙함에서 벗어나 훨씬 성숙하고 분별력을 갖춘 사람의 모습을 보임.

 

 

10. 빚의 무게에 눌리면서도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

윗필드는 174581일 뉴잉글랜드를 떠나 조지아로 향함. 기회가 닿는 대로 설교함.

뉴잉글랜드는 영적 역사가 크게 드러난 곳이면서 동시에, 부흥으로 인한 분열 양상이 심하게 드러난 곳임. 많은 이가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새뮤얼 모리스라는 벽돌공이 윗필드의 설교집을 낭독하는 것만으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남.

고아원 후원을 가로막는 요소를 제거함.

1) 하버드 교수의 출판물 증언에서 윗필드의 재정보고서가 불완전하다는 공격에 윗필드는 상세한 회계 보고서를 작성한 후 감사를 받고 출판함.

2) 윗필드가 모라비아교도가 되었다는 소문으로 테넌트와 같은 부흥운동가와 그 친구들이 윗필드를 후원하기를 꺼려함. 윗필드는 자신의 설교 출판물을 테넌트에게 보내어 자신의 교리적 입장이 변치 않았음을 납득시킴.

윗필드는 고아원 설립으로 인한 막대한 빚과 운영자금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 베데스다 고아원은 윗필드가 회중으로부터 받은 헌금에 크게 의존함. 윗필드는 사업가, 유력한 목회자에게 후원을 요청하고 후원을 받음. 뉴욕의 토마스 노블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토마스 노블이 윗필드가 진 빚을 탕감하지도 그를 위해 유산을 남기지도 않고 갑작스레 죽음으로 고아원 운영이 더욱 악화됨.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농장과 노예를 매입하여 농장 운영-농장의 수익으로 베데스다를 운영하고자함.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은 노예 소유주가 되었다.)

막대한 빚에 시달리면서도 윗필드는 식민지 중부, 남부, 다시 뉴잉글랜드로 다니며 복음을 전함. 식민지 중남부의 더위는 그의 건강을 쇠약하게함. 윗필드에게 휴식을 권하는 친구들의 권면을 드디어 받아들여 버뮤다에서 휴양을 취하기로 함.

윗필드의 3년 반 동안의 사역으로 광신주의가 약화되고,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사이의 적대감이 완화되었고 복음의 역사는 진전됨. 새로운 정착지에 복음이 전파되고 뉴저지 대학이 세워지며, 흑인과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는 노력이 이어짐.

 

 

11. 버뮤다에서의 요양

휴양을 하기 위해서 간 버뮤다에서 설교 사역을 이어감. 교회, 가정, 야외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2-3회까지 설교함.

버뮤다에서 11주간의 체류기간동안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사역을 하였고, 그를 위한 자발적인 모금이 이루어져 재정적으로도 도움을 얻었고, 건강도 상당히 회복함.

윗필드의 부재로 장막사역이 퇴보하고 있다는 소식에 잉글랜드로 돌아감.

 

 

12. 영국에서의 의견 충돌과 라이벌 관계

윗필드가 아메리카로 떠나자 많은 갈등과 문제가 발생. 윗필드가 자신을 대신하여 세운 존 세닉은 그를 대신할 정도의 리더쉽을 보이지 못함. 심한 압박감을 느낀 세닉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친분을 갖던 모라비아교에 합류함.

해리스가 사역을 이어받았으나 웨일스의 기존 사역도 맡고 있어서 한계가 있음. 장막 사역이 퇴보함.

이때 모라비아교와 웨슬리의 사역은 급속히 성장. 웨슬리파, 윗필드파, 모라비아교 사이에 묘한 경쟁과 라이벌 의식 존재. 서로 자기 분파로 사람을 모으기 위해 경쟁함. 윗필드파와 웨슬리파 사이는 해리스의 중재로 갈등이 심하지 않았으나, 웨슬리파와 모라비아교 사이는 분쟁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존 세닉과 윗필드의 비서 존 심스가 모라비아교로 넘어가면서 윗필드파와 모라비아교 사이의 갈등이 심해짐. 회중들은 윗필드의 귀국을 종용함.

 

 

6. 전체 부흥 운동의 조력자

 

1. 윗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윗필드가 귀국하자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그를 통해 장막 사역이 크게 확장되고, 군중의 규모나 사역의 성공을 두고 웨슬리와 경합할 것을 기대함.

윗필드의 생각은 다름.

1) 뉴잉글랜드에서의 분열과 경쟁의 결과를 목도함.

2) 아메리카에서의 사역을 병행하였기에 장막 사역을 지휘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판단.

3) 메소디스트 수장을 맡는다는 것은 웨슬리와 경쟁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

따라서 윗필드는 경쟁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연합을 위한 해리스, 찰스 웨슬리와 논의.

그러나 윗필드는 자신 외에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연합을 지휘할 능력있는 사람이 없으며, 웨슬리 형제의 견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음. 따라서 라이벌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한편이 다른 지도자에게 굴복하고, 지도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함.

윗필드는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연합의 수장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공동체를 지휘하는 일을 하지 않고 복음전도자의 역할을 하겠다 선언함. 장막의 목회자 직분도 내려놓고 후임을 찾았으나 모두가 거절함.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수장 자리를 내려놓으면 모든 명성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

내 이름은 잊혀지게 하시오. 나로 모든 이들의 발에 짓밟히게 하시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다면.

내 이름은 도처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라, 친구들마저 나를 잊게 하라, 그래서 복되신 주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나는 영혼들을 인도하되 어떤 파당으로 인도하는게 아니라......날 때부터 파멸 상태인 그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으로 인도하고 싶다.

글나 도대체 칼빈은 무엇이고 루터는 또 무엇인가? 이름과 분파 그 이상을 보자.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삼자. 그리하여 그분이 전파되도록 하자. .......나는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지는 관심없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 .......그것이 설령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리일지라도.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다니게 만들고 싶지 않다.(P.896 L. 10-21)

윗필드는 메소디스트 수장직을 내려놓고 독립교회, 장로교, 침례교,퀘이커교 집회까지 찾아다니며 전체 부흥운동의 조력자, “모든 이들의 종이 됨.

 

 

2. 영국 귀족사회에 복음을 전하다.

18세기 영국귀족은 겉으로는 지성을 중시하였으나, 실제로는 방탕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이었음. 그 중 헌팅던 부인은 고상한 모범적인 삶을 추구. 173722세에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자기 확신이 사라졌고, 이후 자신의 최고의 의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께 헌신함.

회심 후 헌팅던 부인은 개인 신앙에 힘쓰면서 그녀는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활용하여 복음을 진작시키기로 함. 귀족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해리스와 윗필드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게 함. 윗필드는 지도목회자가 되어 매주 2회 설교함. 윗필드는 귀족에 대해 정중하면서도 교리와 관행에 있어 잘못된 점은 정확히 질책함.

 

 

3. 윗필드 인생의 한 해를 면밀히 들여다보다.

이번 장은 특정한 한 해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기로 함. 왜냐하면 그의 이력의 중요 요소는 그의 평생의 엄청난 노고를 바탕으로 해석되어야하기 때문임.

윗필드는 1750년을 런던에서 장막에서의 사역으로 시작. 그는 장막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 설교하였고, 주일에는 3-4회 설교함. 그 외 주 중 몇차례 설교하고, 헌팅던 부인의 집에서 주2회 설교, 틈틈이 장례식, 결혼식을 집례하고 상담, 장막안에서의 사업을 감독하고, 고아원과 순회사역과 신앙 상담 등 방대한 편지를 읽고 답을 함.

2월에는 글로스터, 브리스틀 엑서터, 플리머스로 순회 사역

3월부터는 데번과 콘월, 잉글랜드 최남단 랜즈엔드(Lands End)까지 돌며 순회 사역, 런던에 2주 머문 후 포츠머스를 비롯한 영국해안가 지역 순회, 런던에서 일주일을 지낸 후 스코틀랜드로 향함. 가는 도중 올니, 노샘프턴, 헌팅던 부인의 사유지인 애쉬비, 래드클리프, 노팅엄, 서튼맨스필드, 리즈, 랭커셔, 요크셔에서 설교

7월초 에든버러에 도착함(5차 스코틀랜드 방문) 약 한 달간 머물며 애든버러 글래스고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사역

9월초에 포츠머스 채텀을 순회하고 9월 중순부터 글로스터, 배밍엄, 코번트리, 윈즈베리, 이브셤, 노팅엄을 다니고, 중부지방에 머무는 동안 헌팅던 부인의 집에서 열린 목회자 협의회 참석. 런던에 잠깐 머문 후 남동쪽 지역의 캔터베리와 근처 소읍으로 감. 웨슬리의 신앙 공동체 사역을 도움

12월에 병을 심하게 앓았으나 회복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활동을 재개함.

순회 사역중에도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연구시간을 갖고 편지를 읽고 답을 했으며 마차를 타고 순회할 때에도 개혁자, 청교도와 당대 복음주의자의 책을 읽음. 주중 40-60시간을 설교하고, 이동하고, 편지를 쓰고 독서를 하고 그 외에도 영적 도움을 얻기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담하고, 장막과 고아원을 돌보았으며, 홀로 남겨진 아내를 위한 마음의 짐도 항상 그와 함께 있었음. 그의 삶의 위대한 사건들은 이러한 일상의 업무를 배경으로 하는 것임.

 

 

4. 하월 해리스를 잃다.

윗필드는 신앙공동체와 장막 사역을 해리스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해리스에게 잃어난 일 때문이 그럴 수 없었음.

1735년 회심한 주부터 그는 주님을 위한 수고를 해왔음. 설교하고 신앙공동체를 찾아다니고 런던으로 와서 윗필드의 사역을 감독하기도 함. 일정한 수입이 없어 굶주렸으나, 돈이 생기면 가난한 자를 생각함. 정신적으로는 늘 긴장 상태로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고 빈번한 폭력사태를 겪음.

이러한 수고가 그의 건강에 타격을 입힘.

1) 극단적 발언과 오락가락하는 태도.

2) 윗필드를 돕겠다며 복권을 사고 복권을 사는 행위를 옹호함.

3) 모라비아교의 피와 상처의 교리받아들임

4) 웨일스에서 자신이 다니엘 롤랜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여 웨일스 부흥운동에 혼란을 줌.

5) 자신이 하나님께 인도를 받는다며 의견 충돌을 견디지 못함.

6) 친구들이 등을 돌린다고 불평.

1748년 윗필드가 귀국하자 해리스는 웨일스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윗필드는 리더 직분을 해리스에게 넘겨줌. 그러나 해리스는 이 직분을 감당하지 못함. 연이은 강행군으로 기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북웨일스 발라에서 집회도중 습격을 받고 이상행동이 점차 두드러짐.

1) 그리피스 부인이 예언과 영분별의 은사가 있다며 그녀를 신뢰하며, 전도여행에 대동.

2)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교리 퍼뜨림.

3) 성격이 호전적으로 바뀌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와 결별하겠다 선언.

4) 심한 감정기복

이로 인해 웨일스 부흥운동이 다수의 다니엘 롤랜드 지지자와 소수의 해리스 지지자로 분열됨.

해리스는 복음전도 사역을 중단하고 트레베카의 집에서 침거함. 2년간의 휴식 후 심신을 회복하고 10년 후 과거를 사과하고 부흥운동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순회사역 재개하여 사망시까지 성실히 수고하였으나 초기의 열정과 총기는 회복하지 못함.

윗필드는 사랑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잃음. 또한 장막과 신앙공동체를 해리스에게 맡기는 일을 포기함. 장막 사역은 본인이 유지하되 신앙공동체 연합은 자연스레 소멸되도록 둠.

 

 

5. 잉글랜드 국교회 내의 복음주의 그룹

윗필드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일원으로 국교회의 영적 개선을 위해 수고함. 그는 국교회 내에 복음주의자의 수를 늘리는 것을 중요한 사역으로 삼고 동료 목회자에게 서신을 보내어 권면함.

1)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참 사역자는 중생한자 이어야함.

2) 거듭난 목회자는 바빠야 하고, 7일 내내 설교할 것

3) 자기교구 뿐 아니라 다른 교구에도 사역할 것

4) 반대자에게 방해받지 말고 세상 형편을 염두에 두지 말고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될 것.

그의 수고의 결과 웨일스의 그리피스 존스, 다니엘 롤랜드, 윌리엄 윌리엄스, 하월 데이비스, 콘월과 데번의 조지 톰슨, 새뮤얼 워커 런던의 윌리엄 로메인, 마틴 매던, 리처드 토머스, 베이트먼, 요크셔의 윌리엄 그림쇼, 헨리 벤, 중부지방의 존 베리지, 토마스 하웨이스, 존 플레처가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잉글랜드 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 사역을 펼침. 이들은 윗필드와 긴밀한 교제를 가졌으며 칼빈주의 성격을 띰. 이들은 국교회 메소티스트(후에 복음파)로 알려짐.

국교회 복음주의자들은 반대와 비난을 받음

1) 이신칭의는 국교회에 없는 새로운 교리라 주장.(국교회신조와 공동기도서에 나타나는 교리임을 증명)

2) 다른 교구에 들어가 설교하는 것은 불법이라 주장.

3) 국교회에서 메소디스트에게 안수 주는 것을 반대함.

1750년대 복음주의의 부흥 이후 이 신앙을 지닌 이들이 등장 존 뉴턴, 윌리엄 탈봇, 빈센트와 에드워드 페로넷, 오거스터스 토플라디, 월터 셜리, 조셉 밀너, 토머스 밀너, 리처드 세실, 토마스 스콧, 롤런드 힐, 찰스 시미언 그리고 일반 성도였던 윌리엄 윌버포스. 이들은 설교와 저술로 국교회 안팎으로 족적을 남겼으며 삶에서도 일반 성직자와 뚜렷한 대조를 보임.

윗필드 생애 마지막 20년중 15년을 영국에 머물며 설교했고, 회심한 자는 대부분 국교회에 남음.

 

 

6. 윗필드가 모라비아교에 보낸 편지-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인가?

1753년 윗필드는 친첸도르프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라비아교의 몇가지 관행을 폭로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함. 이 행동이 정당했는가?

모라비아교 초기에는 경건, 열심, 선교가 그들의 특징이었으나 1745년 모라비아교 초기 인물이 사라지고 모라비아교에 변화가 찾아옴(선별의 시대)

1) 성경에 오류가 있다 주장하며 인간의 경험에도 권위 부여함. 제비뽑기 무작위로 성경 펼쳐서 하나님의 인도 구하기, 집회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대해 상상하기등 이상한 관례들이 자리잡음 (성경에서 우리는 어린양과 그 분의 상처 외에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으며, 상처와 피 그리고 피를 찾고 또 찾는다.-친첸드로프) 육체의 고통에 전념하느라 영적인 고난(53:12)을 간과

2) 지성의 일반적 쓰임반대- 두뇌를 사용하지 않고 아이처럼 행동함으로 의심과 염려를 떨쳐낼 수 있다는 주장.

3) 성경공부, 강해 대신 복잡한 의례를 만듦. 향을 피우고 무덤을 행진하고 웅장한 음악을 사용하며 피와 성처에 경의를 표함.

4) 신앙적인 일들에 성적 개념과 용어 사용, 그리스도의 할례에 경의를 표함.

5) 세속적 겉치례로 인한 사치와 빚.

1745-50년 모라비아교의 잘못된 관행으로 부흥운동 전체가 비난을 받음. 윗필드는 침묵으로 이들의 행동을 묵과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일이 비난 받지 않고 자신의 복음 전도에 흠이 가지 않도록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할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음.

이에 따라 윗필드는 친첸도르프 백작에게 공개 서한을 보냄. 윗필드의 편지는 모라비아교의 오류와 부흥운동이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모라비아교가 개선되도록 하는 영향을 미침.

 

 

7. 웨슬리를 돕다.

그는 고유의 부흥운동 리더 자리를 내어놓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교회, 독립교단, 침례교, 웨슬리의 사역을 도움

윗필드는 순회 전도할 때 웨슬리의 공동체에 들러서 도왔고, 일부 지역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윗필드의 공동체를 설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류. 그가 웨슬리의 공동체에서 설교할 때에는 웨슬리와 자신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복음의 대원리만을 설교함. 또한 아일랜드의 메소디스트들이 핍박을 당하자 귀족들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이들을 도움.

존과 찰스 형제에게 불화가 있을 때(존의 결혼 문제와 평신도 설교자 문제) 중재하였으며, 찰스의 교리적 입장이 바뀌기 시작하여 찰스는 형을 버리고 윗필드와 함께할 생각을 하였으나 윗필드는 이를 만류함.

 

 

8. 두 개의 새 장막

런던 무어필즈의 장막 건물은 원래 커다란 목조 창고로 증축과 확장에도 조잡하고 볼품없었으며 12년의 세월동안 낡아서 붕괴의 조짐까지 있었음. 1752년 윗필드의 사역에 특별히 축복이 임하여 새 건물의 필요성이 대두됨. 1753년 새로운 건물을 건설. 이 새 장막은 이후 17년간의 여생에서 그의 활동의 중심지가 됨.

1753년에 브리스틀에서 새로운 장막이 건설됨. 윗필드와 웨슬리가 결별하였을 때 브리스틀에 윗필드를 따르는 이들은 스미스홀에서 자체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예배를 드림. 웨일스에서 가까운 관계로 해리스, 롤랜드와 같은 웨일스 설교자의 도움으로 이곳의 사역은 크게 융성함. 유력 인사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장막이 지어짐. 윗필드는 이 공동체의 책임을 맡지 않고 유능한 직분자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순회 전도시에만 방문함.

이 시기동안 윗필드는 노리치, 잉글랜드 남부, 웨일스, 헤이머 포드웨스트까지 1,100km를 다니며 사역하였고 7, 8월에는 북잉글랜드에서 3주간 사역후 스코틀랜드를 일곱 번째로 방문 약 2,000km를 순회하며 설교.

1754년 초 고아원을 돌보고 아직 가보지 못한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섯 번째로 아메리카로 향함.

 

 

9. 다섯 번째 아메리카 방문

윗필드는 항해 시작 일주일 뒤 리스본에 도착 언어장벽으로 설교가 불가하여 휴식을 취함. 리스본에 한달을 머문 후 6주간의 항해 끝에 1754526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도착. 리스본과 바다 위에서의 11주간의 휴식으로 건강을 상당히 회복.

조지아와 베데스다는 번창하고 있었으나 그 번영은 노예 제도의 열매이며 그는 조지아에 노예 제도를 허용해 달라고 신탁위원회에 요청함. 그 결과 그는 노예 제도가 식민지에 자리잡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샘이됨.

베데스다에서의 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북부 식민지로 떠남 뉴욕,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하고 필라델피아의 아카데미와 프린스타운의 뉴저지대학에서 설교.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로드 아일랜드와 보스턴에서도 사역함. 북으로는 캐나다 접경까지 이동하여 설교하고 다시 남으로 육로를 통해 조지아를 순회하며 하루 2-3차례 설교. 3,000km를 이동했고 들르는 거의 모든 곳에서 설교함.

 

 

10. 존 세닉의 죽음.

1744년 윗필드의 장막에서 사역하던 그는 1745년 모라비아교도가 되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청을 받아 17466월 더블린의 스키너스 앨리의 침례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 카톨릭교도와의 갈등, 일부 개신교도들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고, 집회소를 웨슬리측 설교자에게 빼앗기는 시련을 겪음.

북아일랜드로 사역을 옮긴 후 7개 주를 돌아다니며 헛간, 들판, 가정집에서 설교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설교할 때도 많음. 불량배의 폭행, 폭도의 습격, 개떼들의 공격, 체포등의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함. 죄를 정죄하였으며 타협없이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모라비아 공동체를 만듦.

복음을 위해 굴하지 않는 태도에서 아름답고 실제적인 신앙의 자태를 보였으며, 인내심이 강하고 온유하고 친절함.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7년 동안 40개의 공동체와 10곳 이상의 교회를 세움. 이러한 강행군이 그의 건강을 해침. 그럼에도 열심히 식을세라 일주일에 20회씩 설교.

웨일스에서 순회사역을 해달라는 요청에 웨일스로 향하던 중 건강 악화로 런던에 있는 모라비아교 집회소에 머물다 숨을 거둠.

그는 18세기 부흥운동의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위대한 성도였음. 주님을 사랑했고 기쁘게 그분을 섬김. 주님을 위해 고난을 견디고 비난을 감내함. 그는 온통 예수에 대한 생각 뿐이었고 그분께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삶.

 

 

11. 토트넘 코트 로드 예배당.

1753년 윗필드가 스코틀랜드 방문시 글래스고 극장주가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극장을 철거함. 그런데 윗필드가 극장 영업을 방해하고 폭도를 동원하여 극장을 부순다는 소문이 펴져 극장주와 배우 등을 중심으로 윗필드를 향한 반감이 퍼짐.

윗필드는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후 비국교도 집회소인 롱 에이커 예배당을 사용함. 윗필드를 향해 반감을 가진 폭도들이 예배를 조직적으로 방해함. 교구의 주교는 폭동을 묵인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동참하였고, 오히려 윗필드가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는 것이 불법이라 주장.

주교의 반대와 폭도의 방해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설교. 윗필드를 암살하겠다는 협박의 편지를 받고 사법당국에 호소하는 한편 롱 에이커 인근 토트넘 코트 로드에 예배당을 건축함. 사택과 예배당 지하 납골당도 갖춤.

그 결과 그는 장막과 토트넘 코트 로드 예배당의 두 대형 교회를 돌보게 됨. 두 개의 교회를 돌보며 남부 해안지역, 웨일스,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순회함.

이 시기 윗필드는 고아원 운영의 짐을 여전히 지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뉴저지 대학에도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잉글랜드 국교회 내 복음파의 젊은 사역자들을 격려하였음.

 

 

12. 아일랜드 폭도들에게 시달리다.

윗필드는 1757년 스코틀랜드에 방문. 스코틀랜드 온건주의자들이 씌운 광신주의자, 돈을 갈취하는 자라는 오명은 상당히 설득력을 잃고 그는 점점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음. 에든버러의 오펀 하우스파크에서 아침저녁으로 설교하고 스코틀랜드 국교회 총회에도 참석하고 글래스고에서 사역.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후 아일랜드를 세 번째로 방문. 사역에 많은 은혜가 임하였으나, 핍박도 받음. 한번은 설교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돌팔매질을 당해 죽음의 위기를 넘김. 이곳에서도 윗필드는 웨슬리의 사역을 도와 웨슬리 운동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함.

 

 

13. 양지와 음지

핍박과 고난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그의 육체와 정신에 큰 타격을 줌. 계속되는 구토와 휴식 부족에도 순회사역을 멈추지 않고 1758년 겨울이 지나자마자 글로스터, 브리스틀, 웨일스로 이동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하루에 2-3차례 설교함.

런던에서 한 달간 사역 후 북부 잉글랜드에서 향함. 네 사람의 성직자가 교회 문을 열어주어 설교함. 스코틀랜드를 열 번째 방문하여 애든버러, 글래스고에 머물며 설교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부 잉글랜드에 들러 웨슬리의 공동체를 도움. 겨울철을 런던에서 보내고 날이 따뜻해지자 잉글랜드 서부를 거쳐 스코틀랜드에 열한 번째 방문.

가난한 자를 도움

1)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하이랜드 주민의 자녀 교육을 위해 60파운드 모금

2) 런던 새 예배당에 빈민구호소를 부속으로 운영하여 과부에게 무료 주택과 연금 지급.

3) 핍박받는 독일 프로테스탄트를 위해 소책자를 발간하고 기금을 모음.

극장업계 사람들이 2류인생이라는 윗필드를 조롱하는 연극을 만들고, 여러 극장에서 유사한 극을 연달아 상영함. 그를 조롱하는 지저분한 내용의 소책자, 가요, 초상화 등으로 윗필드를 괴롭힘.

일련의 시련들과 과중한 업무와 염려의 짐으로 그의 육신은 무너져 내.

 

 

7. 기력이 쇠해지는 나날들

 

1. 병약해진 윗필드

1761년 윗필드는 연약한 육신에도 런던의 사역을 소화하려 노력하고 브리스틀로 가서 몇주간 사역 이러한 강행군의 여파로 기력이 소진되어 의학이 발달한 스코틀랜드로 가서 치료를 받음. 설교를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으나 이 지시를 오래 따르지 않음.

전쟁의 여파로 아메리카로 가는 길이 막혀 네덜란드로 가서 설교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링컨셔, 요크셔 스코틀랜드를 순회함. 브레인트리 야머스에서 설교하고 노리치로 가서 웨슬리의 공동체를 도왔으며 리즈로 가서 웨슬리 진영의 연례 총회 참석 다시 스코틀랜드에 열 세 번째 방문하며 순회함 이때 자신의 체력으로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설교하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음.

프랑스-영국 전쟁의 종료로 아메리카로 가기로 작정.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기위해 스코틀랜드로 감(열네번째 방문). 출항 날짜를 기다리며 설교 사역을 이어감.

 

 

2. 다시 아메리카로 떠나다

대서양 향해는 순조롭지 않았음 긴 항해 끝에 1763824일 버지니아주 해안에 도착.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펜실베니아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함.

예전보다 비대해지고 병약해진 그의 모습에 식민지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더 간절함으로 그의 설교를 들음.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일주일에 두 번씩 설교함.

뉴욕으로 가서 7주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설교하였고, 보스턴에 도착해서는 기력을 약간 회복하여 매일 설교함. 화재로 소실된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구매하는 일을 돕고, 윌락이 운영하던 인디언 학교를 돕기 위해 기금을 모음. 캐나다에도 순회하고자 하였으나 체력 문제로 포츠머스에서 다시 남쪽 조지아로 향함. 다시 보스턴에서 한 두주 사역한 후 떠나려 했으나 더 머물러달라는 강한 요청에 두 달을 더 머묾. 뉴욕으로 오는 길에 예일 대학에서 설교하였으며 9월초에는 필라델피아 대학 졸업식에서 설교하고, 노스케롤라이나의 뉴브런즈윅 마을에서 설교하고 사우스케롤라이나를 거쳐 조지아에 도착.

고아원을 돌보며 그의 오랜 숙원이었던 베데스다 부속대학 설립을 추진. 베데스다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시 식민주를 순회한 후 영국으로 떠남.

 

 

3. 윗필드와 프랭클린의 우정

1739년 윗필드가 처음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프랭클린은 윗필드에게서 진실성을 확신하고 그를 돕기 시작함. 윗필드의 고아원을 돕기 위해 개인적으로도 기부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고아원을 도와달라는 호소문을 보냄.

프랭클린은 윗필드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조언을 하였으며, 윗필드는 프랭클린의 거듭남을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신앙을 권면함.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의심하였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함.

 

 

4. 영국에서의 마지막 수고

176577일 영국으로 돌아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장막과 토트넘 예배당 사역을 재개함.

영국에 머물면서 조지아의 베데스다 대학 설립을 위해 힘씀. 고아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영국정부에 대학 설립 허가를 청원하였으나, 대학이 영국 국교회를 바탕으로 설립되어야한다는 대 주교의 생각과 비교파적 바탕위에 설립되어야한다는 윗필드의 뜻이 충돌함. 이에 윗필드는 영국 정부에 낸 설립 허가서를 철회하고 조지아 의회에 청원서를 내고, 대학 건물 건축을 시작함.

윌락의 인디언 학교를 돕기 위해 샘슨 오컴이라는 젊은 인디언 설교자를 초청하였고, 오컴은 휘터커 목사와 영국에 도착하여 5개월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니며 300여차례 이상 설교하여 인디언 학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기금을 모금하여 대학을 설립하는데 사용함.

1766년 파운더리의 웨슬리 교인 다수가 조시아 벨의 지도 아래, 자신들이 천사만큼 거룩해졌다고 주장하고 꿈과 이상을 활용하여 지구 멸망일을 예언함. 웨슬리 공동체 안에 혼란이 발생하여 웨슬리는 조시아 벨을 쫓아내었고, 600명의 교인과 설교자가 웨슬리 진영을 떠남. 이에 윗필드는 벨을 진정시켰으며, 벨과 웨슬리 사이가 개선되도록 중재함.

윗필드, 헌팅던부인, 웨슬리 형제는 이른바 4자 동맹을 맺고 라이벌 관계를 청산하고 가능한 한 협력하기로 합의함. 이 시기에 하월 해리스도 회복되어 부흥운동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사역함.

윗필드는 이 시기 건강을 회복하여 매일 설교하고 주일에 두 차례씩 설교하였으며 두 달간 노리치, 로드버러, 글로스터, 웨일스의 하버포드웨스트, 우드스톡, 펨부룩을 순회하고 글로스터로 돌아옴. 여름에는 장막과 새 예배당 사역 후 잉글랜드 북부의 뉴캐슬, 캐슬가드, 선더랜드등을 순회함.

전직 선장 토리얼 조스, 군 장교 출신 스콧, 롤런드 힐이 윗필드의 부재시 런던의 교회를 돌봄으로 윗필드의 사역의 짐을 덜어줌.

1768년 스코틀랜드 15번째 방문함. 그를 향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고 그는 널리 존경 받았으며 많은 회중앞에서 설교함. 이때 거액의 유산을 받아 고아원의 빚을 모두 청산함.

그가 런던으로 돌아온 후 그의 아내는 열병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17688965세의 나이로 사망함.

헌팅던 부인은 웨일스 트레베카에 신학대학을 설립 거듭난 증거를 보이는 학생에게 무료 교육을 실시하였고 의복과 생필품을 제공하며 엄격한 경건의 훈련을 실시함.

윗필드는 대학 설립을 위해 조지아 총독과 의회에 청원을 넣기 위해 아메리카로 향함.

 

 

5. 젊은 조력자의 시선으로 본 윗필드

윗필드의 생애의 마지막에 몇 년동안 그를 도와 사환 겸 목회 견습생으로 일한 코닐리어스 윈터가 개인적으로 윗필드를 관찰한 메모 형식의 기록.

 

 

6. 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수고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몰려오는 군중에게 설교하고 베데스다로 떠남 조지아는 크게 융성하였고 베데스다는 번창 중이었으며 대학의 첫 건물 공사도 진행 중이었음. 윗필드는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과 부지를 확보하고 대학 운영의 수칙도 만듦. 조지아 총독과 의회에 청원을 제출하고 베데스다에 방문해주기를 요청함.

1770424일 식민주 전역을 순회함. 필라델피아, 뉴욕, 올버니와 주변 소읍, 보스턴, 뉴베리, 뉴햄프셔의 포츠머스까지 순회.

 

 

 

8부 죽음과 기념

 

1. 육신을 떠나 주님 곁으로

캐나다로 가고자하는 계획을 건강의 한계로 취소하고 남으로 향하는 도중 엑서터 마을에 도착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설교해주기를 요청하여 두 시간 설교를 하고 오후 늦게 매사추세츠주 뉴베리포트의 올드사우스 장로교회 조너선 파슨스 목사의 집에 도착. 저녁 식사후 휴식이 필요하였으나 집 앞 거리에 모여든 사람에게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이 초가 타서 꺼질 때까지 복음을 전함. 그리고 다음날 새벽 세상을 떠남.

 

 

2. 의인을 기억하며

생전 윗필드의 부탁을 따라 그의 시신을 뉴베리포트 장로교회 지하 납골당에 안치됨. 양 대륙에서 몇 주간 그를 기념하는 예배가 드려지고 추도하는 설교와 기념 시의 출판이 이어짐.

장례 설교는 존 웨슬리가 맡음. 윗필드 교인이 웨슬리를 향한 마음을 풀고 자신과 웨슬리가 하나를 이루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임.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23:10)의 말씀으로 윗필드의 사랑과 겸손, 솔직함과 진실함, 견실함과 청렴함, 믿음과 수고에 대해 찬사를 보냄.

 

 

3. 윗필드라는 인물을 평가하다.

그의 인격.

1) 오직 하나님께 영광-그는 소명을 받았을 때에도 두려워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삶의 유일한 행동 원칙으로 삼음. 사역 초창기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을 때에도 이 인기를 타는 풀무불로규정,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함.

2) 그의 겸손- 칼빈주의 메소디즘 수장을 포기하고 만인의 종이 됨.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는 자에게 감사함. 자기의 모든 수고를 무가치하게 여김.

허물들

1) 사역 초기에 드러난 자만심

2) 사역 초기 회심치 않은 목회자를 향한 날 서고 성급한 비난의 발언들

3) 사역 초기 자신이 받은 느낌을 계시처럼 여기는 태도

4)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도움이 필요하다는 모든 사람에게 사실 확인 없이 후하게 도움.

5) 주교와 귀족을 과도하게 높이고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함.

6) 노예 제도의 해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

그의 노고

1) 엄청난 설교 량 - 일주일에 40-60시간 설교함. 이동시간과 짧은 휴식, 다음 일정준비의 시간을 빼면 그의 전 생애는 중단없는 설교와 권면의 연속이었음.

2) 설교 횟수 - 그의 공식 기록으로만 약 18,000, 비공식 설교까지 합치면 약 3-4만회

3) 회중의 수 - 한번에 2-4만의 회중에게까지 설교

4) 폭넓은 호소력 - 귀족부터 빈민가 주민, 아메리카 노예까지 설교하였으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효과적인 설교.

그를 향한 억측들.

1) 출판된 설교물의 수준을 보니 그의 설교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의 저술집에 실린 57편의 설교는 대부분 미숙한 20대 시절의 설교였으며, 출판된 또 다른 설교문은 그의 설교를 속기로 받아 적어 그의 동의 없이 출판한 것으로 문법이나 맥락이 맞지 않게 옮겨진 어차구니 없는 수준이었음. 또한 그는 그의 설교와 활자화된 설교문의 간극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큼. 그의 설교문에는 그의 몸짓, 움직임, 표정, 억양과 같은 모든 요소가 전달되지 못함. 그러나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실천적임.

2) 그의 지적 능력은 형편 없다.- 그는 학식있고 교양있는 성직자 집안 출신으로 뛰어난 웅변술과 기억력을 가졌으며, 헬라어 성경과 매튜 헨리 주석의 도움으로 강도높게 성경을 연구했고, 헬라 철학자, 로마 작가, 교부, 개혁자, 청교도, 당대의 저술가의 책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라틴어를 잘 활용하였으며, 헬라어에도 폭넓은 지식을 가졌다. 그는 깊은 사상을 갖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풍성한 지적 재능을 가진 훌륭한 신학자이자 웅변가임.

3) 그의 설교는 지속력있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 그의 사역은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도덕적 열정을 불어넣었고, 학문과 풍습을 정화시키고, 교도소를 개혁하였으며, 형법에 관용과 지혜를 불어넣었으며, 노예 무역을 폐지시키고 대중 교육의 추진력을 제공함.

부흥 운동에서의 역할

1) 부흥 운동은 그의 사역 아래 시작됨.

2) 부흥운동의 기획들은 대부분 윗필드에 의해 시작됨.

a) 야외 설교

b) 공격적 전도방식

c) 신앙 공동체 결성 및 조직

d) 총회 개최 및 주간 홍보물 발행

e) 대규모의 청중 집회

그의 사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넘어 아메리카에도 부흥을 확산시켰으며 기존 교회를 소생 시키고, 새로운 교회를 세움.

기타 효과

1) 고아원 홍보를 통한 소외 계층에 향한 관심 증가

2) 뉴저지 대학, 필라델피아 대학, 다트머스 대학 창립에 기여

3) 식민지 주 사이에 일체 의식 고취

교리적 믿음에 끼친 영향

1) 거듭남의 절대 필요성

2) 칼빈주의 교리의 확산

3)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문자 그대로의 부활 승천 재림의 신앙의 기본원칙

4) 복음의 메시지가 사람의 양심에 스며들게 하는 설교 방식

윗필드는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1) 역사상 누구와도 비길 데 없는 출중한 웅변가

2) 교회나 정치의 도움 없이 부흥 운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킴.

3) 바울 이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

그의 삶의 교훈

1) 복음의 능력- 이교도나 다름없던 킹스우드 광부부터 불경했던 귀족까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됨. 오늘날에도 이 복음의 능력이 필요함.

2) 설교의 탁월한 역할- 설교란 무오한 책 성경을 바탕으로 한 권위 있는 메시지의 선포임.

3)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성령의 부으심임.

 

 

 

 

[보충자료2] ‘값없는 은혜라는 제목의 설교에 답하여 존경하는 존 웨슬리에게 드리는 편지

 

 

웨슬리의 주장

윗필드의 답변

선택의 교리는 설교를 무의미하게 한다. 왜냐하면 설교가 있든 없든 택자는 틀림없이 구원을 얻고 유기된자는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말씀전파라는 방법을 주셨다. 우리는 누가 택자인지 알지 못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설교해야한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법의 목적인 거룩성을 직접적으로 파괴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제시된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동기, 상급에 대한 소망, 형벌에 대한 두려움, 천국에 대한 소망,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이라는 상급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감사로 거룩해지기를 힘쓰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기를 힘쓸 것이다.

선택의 교리는 신앙이 주는 위로, 기독교의 행복을 파괴한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셨으므로 그의 능하신 손에서 나를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은 눈앞에 닥친 시련에 대한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준다.

자신이 유기되었다 믿거나 유기되었을까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들의 수중에 어떤 약속도 위로도 허락되지 않는다.

구원을 갈망하는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회의에 빠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감은 진리를 찾고 진리를 위해 애쓰게 만드는 도구가 되며, 이러한 분투와 노력은 자신이 부름 받았다는 사실과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이다.

선택의 교리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처음 하나님을 믿은 그 순간부터 여러 달 여러 해를 거쳐 바로 이날까지 세상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누리고 있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불변성을 믿지 않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양심이 각성되어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얻기 위해 깨어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생각하자 그 사람이 과거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확신한다 할지라도 이후 마귀의 자녀가 되어 결국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가 확신을 누릴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자기 마음, 그 마음의 부패성, 사탄의 악의와 교활함과 권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확신이 어떤 지속성있는 견고한 위로를 줄 수 있는가?

인간이든 마귀이든 현재일이든 장래일이든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만이 신자를 담대하게 하는 그런 확신을 줄 수 있다.

보편 속죄 교리는 피조물의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가르치므로 이 교리는 사람을 영원히 어둠속에 가둬버리는 경향이 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어떤 선행하는 범죄나 잘못 없이 영원히 불에 타는 형벌을 받기로 정해졌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불쾌하지 않은가?

수천 수만의 사람이 아무 잘못 없이 형벌을 받는다는 말은 원죄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돌려졌다는 교리를 포기하던지 아니면 원죄의 교리를 인정하고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을 전복시킨다. 왜냐하면 변치 않는 영원한 작정을 가정할 경우, 인류의 일부는 설령 기독교의 계시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으로써 교회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오로지 기독교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심음과 거둠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8:22)을 보고 밭 갈고 씨뿌리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을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목적은 복음 계시와 하나님의 정하신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선택의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성경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에서와 모든 유기자들을 영원전부터 다 미워하셨다고 해석한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과 모순된다.

인간이 아담 안에서 다 타락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미움이 대상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기쁨을 따라 야곱과 택자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보이신 것이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긍휼을 베푸셔야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9:15)는 말씀을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 즉 택자에게만 긍휼을 여기신다고 해석한다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145:9)는 말씀에 나타난 성경의 전체의 기조와 배치된다.

하나님은 분명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비를 내리신다. 그러나 구원의 긍휼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10:34)

그렇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를 믿으며 의를 행하는 자를 받으신다. 하나님은 외적 조건이나 환경을 보지 않으신다. 그러나 만유의 주님이신 주권자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무슨 빚도 지지 않으셨기에 무슨 일이든 하시고자 하는 대로 할 권리,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은총을 베풀 권리가 있으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선택교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있지 않는다고 추론한다.

하나님의 예지가 하나님의 승인이나 재가를 뜻하는 것이라면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예정과 선택이 피조물이 선행을 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선택의 토대 혹은 이유로 삼아 선택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예정은 예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기를 원하시며(벧후3:9)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신다.(18:32)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저주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죽음을 즐거워하지 않으시나.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므로 자신의 공의가 크게 나타나기를 기뻐하신다.

유기 교리는 신성 모독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멸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보편 속죄의 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보혈의 공로를 깎아내리는 신성 모독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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