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RING THAT NEVER DRIES UP

마르지 않는 샘

마르지 않는 샘

깨어진 친교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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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성진 작성일 19-08-23 10:46

본문

   

이번 말씀 수련회를 앞두고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에게 하신 말씀을 목사님께서 어떻게 설교하실까를 기대와 두려움으로 기다렸습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내가 너를 내치겠다'는 말씀이 또 나를 얼마나 두렵게하고 경외케 할까.. 그리고 혹시 그 말씀을 들어도 내 마음이 두렵지도 않으면 어떠하나..

 

그런데 수련회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말씀은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서 쫓겨나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신다는 말씀에서 느껴진 첫번째는 주의 겸손하심과 자비하심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부를 억압하지도 압제하지도 않으시고 그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에서 그리스도는 얼마나 겸손하시고 자비하신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슬픔이었습니다. 내가 그 겸손하시고 자비하신 그리스도를 문 밖에 세워두고 있다는것에서 슬픈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가서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구나 하는구나 (아가서5:2)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이의 음성이 이와 같겠구나 싶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완전한자야 문을 열어다오."

 

허드슨 테일러의 "연합과 친교"를 열어 신부와 왕의 친교가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첫째는 문을 열고 나가 그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어디에 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찾고 싶어도 찾지 못했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중에서 순찰하는 자들은 그녀를 쳐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찾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은혜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왕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왕의 아름다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왕은 나타났습니다. 왕은 나타나 단 한마디의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왕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아가서에서 항상 왕과의 친교를 깨트린 것은 이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왕은 이 여인을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전하여 흠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문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열고 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 길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를 찾고 찾으며, 내 안에 있는 미약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묵상하는것.. 그때 이 여인을 향해 말씀하시는 사랑의 음성은 너무나 감동스럽고 황홀할 지경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 사랑하심과 자비하심은 다시금 용기를 낼수있게 해줍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이 있을까 하여 내용을 발췌하여 올려봅니다.

 


 

 

 

4부 다시 깨어진 친교-회복(아가서 5:2-6:10)

 

4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 대한 신부의 발언으로 시작되는데, 그녀는 최근의 안타까운 경험을 늘어놓으며 고통 중에 있는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신랑의 임재와 위로를 그녀가 다시 잃어버린 것은 이제는 세속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게으른 자기 탐닉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실패에 빠지게 된 경위와, 어떻게 해서 자아가 그녀 마음속에 다시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아마도 은혜로 말미암아 그녀가 성취할 수 있었던 업적에 대한 영적 교만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는 축복을 주신 분 대신에 그녀가 받은 축복을 너무 애지중지하여 이별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자신이 나락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도취와 자기만족에 빠져, 그분의 부재를 거의 깨닫지 못한다.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홀로 안일에 빠져있었다. 이보다 더한 것은, 그녀의 침상의 문이 닫혔을 뿐만 아니라 빗장이 걸린 사실인데, 이것은 그분이 돌아오시는 것을 간절히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다른 음성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반향을 그녀의 영혼 안에 일깨우는 음악이 그분의 목소리 속에 있었다. 그녀는 아직 세상에 관한 한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었다.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의 올무는 훨씬 위험하고 교활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구나 하는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것처럼, 흔히 신랑의 위치는 문 밖에서 두드리는 구혼자의 위치가 되고 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 분이 닫힌 문 밖에 계셔야 한다는 것, 득 문을 두드리셔야 한다는 것도 애석하지만, 자기 사람이 된 자의 마음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니 더욱 안타깝다.

 

이 경우에 신부의 위치가 잘못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전과 같이 그분의 말씀이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이번에는 그분의 말씀이 ‘나의 누이 나의 사랑아 문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문을 닫은 거은 그녀의 자기만족의 상태와 안일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매우 부드럽다. ‘나의 누이야 문을 열어다고’(그분은 많은 형제 중 첫 열매이시다), ‘나의 사랑’ (성령의 많은 은사와 은혜로 덧 입은자), ‘나의 완전한자야’(그분을 위해 썻어 새롭게 하여 정결케 된, 더렵혀지지 않은), 당신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심으로써 그녀에게 문을 열도록 권고하신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구나 하는구나

왜 그분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다는 것인가? 그분의 마음은 목자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자들 가운데는 죄의 어두운 골짜기를 방황하는 자들이 있다. 오, 얼마나 많은 자들이 목자의 음성조차 들어보지 못하고 있는가. 한때 우리 안에 있던 자들까지도 안전한 울타리를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음,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은 잃어버린 자를 발견하기까지 방황하는 어린 양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주 최근까지 그분 곁에 있었고, 기쁨으로 사자 굴이나 표범굴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가 혼자서 방황하며, 그분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간청이 없으리라고 보는데, 참으로 신부의 응답은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안타깝게도 모임이나 집회를 열어 즐거워하고, 앞에 놓인 좋은 일들을 경축하면서도 이것들을 떠나 멸망당하는 자들을 구출하기 위한 자기부인의 노고에는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기가 십상인 것이다. 믿음의 안식을 즐거워하는 반면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망각하고, 믿음으로 이어지는 정결과 순결에는 착념하지만 죄의 구렁텅이에서 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영혼들에 대해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분이 계속 입고 있기를 원하는 옷을 벗어버릴 수 있고, 그분은 홀로 산곡을 헤매고 계시는데 우리는 발을 씻을 수 있다면 우리 주님과의 교제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우물쭈물하는 신부로부터 별 반응이 없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에는 고리가 걸렸을 뿐 아니라 빗장까지 질러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들어가 보려고 하는 그분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신부는 다 늦게 일어났으면서도, 속히 기다리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보다는 자기 몸에 몰약 즙을 붓는데 더 신경을 쓰고, 그분의 소원보다는 자기가 누리는 은혜에 더 마음이 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속마음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환형의 말을 한마디로 하지 못하고. 근심에 찬 그분은, 그녀에게 당신을 영접할 준비가 이루어지기 전에, 스스로 물러 가셨다.

또 다시(3부(아가서3:6-5:1)에서와 같이) 그녀는 홀로 그분을 찾아 나서야 했고, 이번에 겪는 그녀의 경험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처음에 돌아섰던 것은 미숙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돌아선 것이 부주의로 인해 생겼다면, 순종하도록 권유를 받을 때 적어도 기꺼이 즉석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의 경우에도 순종하는데 더딘 습관에 빠진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불신자의 경우에 불순종의 마지막 결말은 말로 할 수 없도록 무섭다.

책망을 받았은즉 돌아서라

보라, 내가 내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은즉

내 손을 펴서 아무도 상관치 아니하고............

너희의 환난날에 웃을 것이라

그때 그들이 나를 부르나 내가 응답치 아니할 것이요

부지런히 나를 구하나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신부의 넘어짐은 고통스럽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참된 회개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나가 그분을 찾았다. 그녀가 불렀으나 그분은 응답치 아니하였고, 행순하는 자들이 그녀를 쳐서 상하게 하였다. 그녀보다도 그들이 타락의 중대성을 더 정확하게 판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은 자신의 모순을 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고, 우리 주님에 대한 위치가 더 높을수록 어떠한 실패도 필경은 더 심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상하고, 수치당하고, 찾았으나 성공치 못하고, 거의 절망에 빠진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나아가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사랑하는 자에게 그녀가 부정하지도 않고 그분을 잊은 적도 없음을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예루살렘의 여자들의 응답은, 슬픔에 지쳐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신부의 개인적인 아름다움에는 결코 눈을 땔 수 없으나, 왕의 신부로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이 질문은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찔렀고, 그녀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와,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해 넋을 잃은 찬사를 쏟아 놓는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신랑에 대한 신부의 찬사를 다니엘서 7:9-10에 나오는 옛적에 계신 분에 대한 묘사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주 독특한 차이가 있다.

다니엘서 7장에는 옛적부터 계신 이가 심판의 보좌에 좌정해 있다.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다.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온다. 인자 같은 이가 그분 앞에 나아와 그분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폐하지 않은 영원한 나라를 받는다.

 

요한계시록 1장에는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아. 그러나 신부는 신랑을 ‘꼬불꼬불하고 까마귀와 같은 검은’ 머리털을 지닌 왕성한 젊은이로 본다. 요한계시록에서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 신부에게 그분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며 입은 심히 달다.

 

부활하신 구주의 얼굴은 ‘해가 힘있기 비취는 것 같으며“, 요한이 환상을 본 결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것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본 결과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신부에게 ” 그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그 신부에게 사랑의 왕이시며, 마음을 기울여 환한 얼굴로 그분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조목조목 이야기하는지, 예루살렘 여자들 역시 그 아름다움을 뵙기 위해 그녀와 함께 그분을 찾아보겠다는 강한 소원에 사로잡힌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신부가 응답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셨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설령 쓸쓸하고 처량하게 보일지라도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그분의 애정의 대상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이 자기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는 이 표현은 2장에서 발견되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는’는 것과 유사하지만 주목할만한 차이가 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우선되는 생각이 그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었고, 그녀에 대한 그분의 주장은 이차적이었다. 이제는 먼저 그분의 주장을 생각하며, 그런 연휴에야 자신의 주장을 언급한다. 7:10에서 우리는 은혜가 훨씬 더 발전되어나가는 것을 보는데, 여기서 신부는 자신의 주장을 모두 뒤로 돌린 채 말하기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그녀가 이 말을 털어놓고 자신을 그분의 정당한 소유로 인정하자마자, 이것은 그녀가 그분을 밖에 세워두고 들어오시지 못하게 할 때 사실상 거부한 요구인데, 바로 신랑이 나타난다. 한마디도 꾸짖지 않고 아주 부드러운 사랑을 가지고 자기 눈에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녀를 칭찬한다.

 

그녀에게 말하기를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사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위대하신 왕의 영광스러운 성)같고,

엄위함이(찬란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해서 부르짖기를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이와 같이 4부는 친교가 완전히 외복되어, 신부가 복권되고, 신랑에 의해 그분 자신의 비길데 없는 동반자와 친구로서 공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막이 내린다. 신부가 겪는 고통스러운 체험에는 영원한 행복이 실려 있고, 더 이상 친교가 중단되는 흔적을 볼 수 없으며, 이후로는 기쁨과 결실만이 남아있다.

 

 

 

 

허드슨 테일러, 연합과 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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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미선님의 댓글

한미선 작성일

<p>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은 자들이 회개함으로 천국에 반열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 필수인 것처럼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 또한 회개가 필수 임을 깨닫습니다... 계시록의 말씀은 해도 되고 안해도 별 무리 없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닌 반드시 권고의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천로역정 가운데 회개를 쉽게 생각한 자, 자신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면 할 것이라는 어리석음을 나타낸 자. 회개를 미루다 마침내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 자가 되지 않도록 "회개"는 그 어느 자리에 있든 반드시 행해져야 할 우리의 의무가 된 것을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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