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최고의 신랑 그리스도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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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리교회 작성일 17-03-23 15:47본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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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을 회심케 했던 휫필드 설교의 강한 힘의 근원은 깊은 기도와 성경적으로 굳게 붙들었던 견고한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 교리는 전 인류를 영원한 형벌에서 피할 수 없게 만든 "원죄의 전가"와 "거듭남",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오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믿는 자의 의로 전가"됨으로써 믿는 자가 원에 이른다는 성경적 핵심이었습니다.
그러한 교리적 주장이 그의 설교 전편을 통해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독자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갓 질그릇 같은 우리가 어떻게 전능하신 토기장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수 있는가, 이세상 최고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떤 유익을 누릴수 있는가를 그는 아무도 흉내 낼수없는 불같은 외침으로, 그리고 잔잔한
시냇물 같은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와서 최고의 신랑, 그리스도를 보라", 그리고 그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바쳐 혼인하라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필경은 영원한 불 속에서 탄식하며 후회할 것이라고 그는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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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한 세력이 뭉치기에 성도들을 결집해야 합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다면 종교적인 모임, 즉 교회공동체 모임은 여러방면에서 유익하고 위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각 사람은 이 모임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가능한 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이 세상에 참된 기독교가
부흥된다면 서로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함께 일어서자고 격려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동기가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다같이 마음을 모아 수고하는 것은 마땅한데,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가지는 행복의 한 단면이
성도들의 교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달리 살아온 경건한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이 분명
주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화되고 힘을 얻게 됩니다.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들과 교통하며 그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둠의 나라도 그들끼리 서로 협력하며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우리들이
어둠의 세력들을 대적하며 승리하도록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벨리알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강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게 모여 서로 경건하게 살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임들은 한밤중에 일어나는 반역이나 사악함을 은근히 부추깁니다. 실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은 거의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경악을 금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여, 함께 모이십시오.
(p.184~185)
Contents
추천의 글
옮긴이 머리말
강론 1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강론 2 하나님과 동행하라
강론 3 독자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강론 4 가정 예배의 중요성
강론 5 와서 최고의 신랑, 그리스도를 보라
강론 6 영국의 자비와 임무
강론 7 밝은 은혜를 감사하라
강론 8 신앙적 모임의 필요성과 유익
강론 9 충분히 의롭지 않은 자의 어리석음과 위험
강론 10 칭의와 기독교인의 완전성에 대한 바른 견해
강론 11 젊은 시절의 경건의 유익들
강론 12 성도의 신랑이신 그리스도
강론 13 토기장이와 질그릇
강론 14 우리의 의이신 주님
강론 15 영원한 의이신 그리스도의 의
부록
1. 저자 약전
2. 저자 평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지 휫필드는 1741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Gloucester)의 벨 여관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토마스 휫필드(Thomas Whitefield)와
엘리자벳(Elizabeth)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죄에 대한 자각을 했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감화를 주고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 대목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큰 그릇"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들어온 의붓 아버지의 방만함으로 인해
번창했던 벨 여관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열다섯 살때 휫필드는 어려워진 여관 일을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1년여 후에 다시 학교에 나갔고, 17세가 되는 해에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와 함께
18세기 대부흥을 주도했던 웨슬리를 만나게 됩니다. 연대기는 21세에 회심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 회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큰 결심과 전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후 그의 생애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임을
우리는 그의 육필 일기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세에 그는 준목이 되었고 24세 되던 해 1월 14일,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웅변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그는 그 웅변력을 그릇으로 하여 뜨거운 영성을 셀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양식으로 제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23세 때 이후 여러 차례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6개주)로 건너가
선교 사역을 감당하여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빈민 구제에도 크게 힘을 썼습니다. 그는 설교할 강단을 얻지 못하여 주로
순회 노천 설교를 했는데, 배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동역자들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25세가 되던 1740년 10월 20일
일기(본문656쪽)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죠나단 에드워즈를 만난 후 다음 설교지로 이동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거듭되는 설교 요청에 일일이 응하다가 건강 또한 급속히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휫필드는 영국과 뉴잉들랜드를 오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일에 피땀을, 아니 생명을 쏟다가 보스톤으로 여행하던 중 엑세터의 여관에서 한밤중에
몰려온 청중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갔습니다. 1770년 9월 30일 주일, 향년 55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