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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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리교회 작성일 17-03-23 11:58본문
이안 머리/부흥과 개혁사
- 책 소개 나는 목회를 준비하던 무명의 신학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 박사는 내게 시간을 할애하고, 수없이 다른 젊은이들에게 해 준 것처럼 내게도 자상하게 조언을 해 주셨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때 로이드 존스 박사가 자기에게 보여 준 친절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열렬하게 추구한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누구든 대화를 나누고 그 앞을 떠날 때 로이드 존스 박사가 갖고 있던 관심에 자극을 받지 않고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근본 진리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것이 로이드 존스 박사에게는 저주와 같았다. 그래서 근본 진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엄격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사랑을 모든 증인의 필수 의무로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필요로 할 때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 고집을 피울 자격을 가진 신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신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철두철미하게 칼빈주의자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인본주의-복음 전도나 세속 대학들이 추구한 신학 속에 나타나 있는-를 현대 복음주의의 약점의 뿌리로 보고, 교회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것”(사 2:22)을 배우지 않는 한, 결코 좋은 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과학적 학문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신앙에 의존했고, 한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모두 로이드 존스 박사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이 오늘날 세계의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그의 사역이 그가 설교한 것보다 훨씬 방대한 지역에 미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특별히 이 오해 가운데 하나가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일 뿐 그 외에 다른 할 말은 없다고 보는 관념이었다. 그 러나 한 마디로 이런 관념은 충분한 판단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바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이자 설교자요……신학자이자 교사였으며, 동시에 다정다감한 목회자였습니다.” 말하자면, 로이드 존스가 추구한 것은 포괄적 목회 사역이었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지만, 로이드 존스가 생애 말엽에 “저는 설교하기 위해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사실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로이드 존스가 알고 있던 가장 큰 일이었다. 하나님은 재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지 않는다. 사역을 통해 시대를 구한 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유사점이 있고 이 공통 요소는 안심하고 따를 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남이 모방할 수 없는 개성 또한 갖고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을 흉내 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차이가 있고, 어느 정도는 모두 불완전하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의 종에게도 해당된다. 단순히 한 지도자를 단독으로 고찰하는 것은 별로 유익이 없다는 믿음에 따라, 로이드 존스와 스펄전을 비교하는 글을 한 장에 담았다. 두 사람은 본질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동일한 주장을 했지만, 실제로는 차이점이 많이 있었다. 두 사람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로이드 존스 사역의 다양한 국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는 1966년 복음주의 연맹 국민 대회로 인해 드러난 차이점에 대한 이후의 비판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로이드 존스는 ‘분리주의’복음주의자로 계속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 한 저술가는 이와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를 “완고한 배타주의”의 핵심 인물로 간주하고, “분리주의자를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개혁파 고립주의의 광야로 이끄는 길을 만들어 놓은 자”로 낙인찍는다. 나는 이런 견해가 얼마나 참된 사실을 혼동하는 것인지 보여 줄 것이다. 독자는 1957년 복음주의 연맹 대회에서 로이드 존스가 국교회 소속 복음주의자들과 공조하여 균형 있게 전한 강연의 녹음을 들어 보고, 왜 그때에는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물어 보라. 이에 대한 대답은 1957년 이후로 10년 만에 국교회 소속 복음주의자들이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고 추진함으로써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적절한 판단인지는 현재도 증거가 남아 있는데,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교인의 연합’ 같은 운동과 ‘동성애 문제에 대한 잉글랜드 교회의 위험한 분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가 연약한 모습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지 못한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로이드 존스는 믿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가 교회에 대해 관심을 둔 핵심 이유였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방법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자신이 참여하던 청교도 그룹과 한 가지 사항에 의견이 달랐고, 당시 막 싹이 트기 시작한 은사 운동과는 견해 차이가 더욱 컸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그룹에 대해서는 경험적 요소에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과 은사 운동에 대해서는 성령의 경험을 감정주의와 너무 쉽게 혼동해 버리는 것에 대해 염려했다. 확실히 현대에는 이 주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독자는 이 주제에 대해 내가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대로 무조건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래의 부흥을 기다리기 위해 현재의 노력을 무시했다고 로이드 존스를 비판하는 관념을 거짓으로 생각하고 거부한다. 로이드 존스가 교회의 쇠퇴는 성령의 새로운 부어지심의 역사 외에는 회복될 길이 없다고 볼 정도로 심각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중대한 구속 목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할 보증이 있다고 믿었다. 로이드 존스는 장래의 기대와 현재의 승리에 대한 믿음의 감사 사이에 전혀 모순이 없다고 보았다. 시대는 어떠하든 간에, 로이드 존스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바울의 명령을 몸소 실천했다. 필요한 자료들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또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전도 설교를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내가 들은 설교 중 가장 기억할만한 설교 가운데 하나로서, 여러 번에 걸쳐 이 설교를 듣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무엇보다 지금 이 설교가 처음 전해진 이후로 이토록 자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른 많은 설교들도 현재 마틴 로이드 존스 레코딩 트러스트사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그들의 수고에 대해 우리는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호주에서 편지가 하나 왔는데, 그 편지에는 호주에서 카세트와 CD를 통해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보급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내에게도 힘을 입었다. 아내는 본문의 내용에 문제는 없는지 꼼꼼하게 읽으면서 필요한 검토를 해 주었다. 인재로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하기도 했고,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년 목회를 하기도 했다.그의 가장 중요한 사역 혹은 업적이라면 1957년 잭쿨럼과 함꼐 진리의 깃발사( The Banner of Truth Trust)를 공동 설립하여, 개혁 및 청교도 신학과 부흥 신학을 중흥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20세기 최고의 전기작가이자 부흥 신학자로서 로이드 존스 (20세기), 아더 핑크 (20세기), 존 머레이 (20세기), 찰스 스펄전 (19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8세기)등의 여러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를 집필했으며, 또한 「부흥과 부흥주의 (Revival and Revivalism」,「오래된 복음주의」, 「성경적 부흥관 바로세우기」등의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저서들을 집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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