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S_2Kings_열왕기하 제4과
공부할 내용: 열왕기하 2장 19절 - 3장 3절
본문
2021년 3월 14일(주일) 오후 3시 30분 줌zoom그룹성경공부
1.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물고 있을 때에, 그곳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였고, 그들이 소금을 가져왔을 때에 엘리사는 그것을 물 근원에 던지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엘리사는 좋지 못한 물을 고치는 일에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하였습니까? 소금이 일종의 치료제입니까? 엘리사는 소금을 물 근원에 던지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교훈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소금을 물 근원에 던지는 것은 사람의 삶을 고치는 방법에 있어서 어떠한 영적인 교훈을 줍니까? (왕하2:19-22, 출15:25, 잠4:23)
답)매튜핸리주석-I.여리고의 물이 고침을 받음. 여리고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것을 다시 세우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건축한 자의 자녀들이 죽는 값을 치르면서 세워진 성읍이었다. 그러나 일단 세우지고 난 후에는 그 성읍을 다시 허물어 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도 않았으며 또 하나님의 선지자나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비록 불법과 불순종에 의해 세워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성벽 안에 선지자 학교가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 거주할 집을 짓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인의 재물로 의인의 거처가 마련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여리고에 내려가신 적이 있었다(눅19:1). 지금 엘리사는 요단을 건너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는데, 그것은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선지자의 제자들의 마음을 좀 더 확고히 해 주기 위함이었다. 오십 명이 엘리야를 찾고 있는 동안 그는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1. 그때 여리고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19절). 하나님의 충성된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들의 빛이 잠시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을 활용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그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엘리야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엘리사보다 가까이 다가가기에 더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들이 그들 성읍에 있는 선지자 학교의 영향으로 예전과 비교하여 상당히 새로워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리고는 위치도 좋고 전망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실 수 있는 온전한 물과 소산을 맺는 비옥한 흙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무슨 만족이 있겠는가? 물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물이 부족하다든지 혹은 불완전함으로써 야기되는 재앙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어떤 이들은 여리고 인근의 모든 땅이 불모의 땅이며 모든 물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부 지역만이 그랬을 뿐이며, 바로 그곳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그들이 여기에서 ‘그 성읍 사람들’로 일컬어졌을 것이다). 2.엘리사는 즉시로 그들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발이 닫는 모든 곳을 어떤 방식으로든 더 나은 장소로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적용하여 쓴 영혼을 달게 만들고 메마른 영혼을 풍성하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엘리사는 그들의 물을 고칠 것이었다. 그러나 (1)그들이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그에게 가져와야 했다(20절). 만일 소금이 물을 순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토록 적은 양으로 어떻게 물 전체를 순화시키겠으며 또 굳이 새 그릇에 담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도움을 받을 자들은 이와 같이 협력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 시험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를 준수함으로써 (혹은 어떤 말씀이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작동된다. (2)그는 그 소금을 물 근원에 던졌으며, 그렇게 하여 물이 솟는 땅과 물줄기가 고쳐졌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삶을 개혁하는(고치는) 방법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그것으로부터 나기 때문이다(잠4:23). 나무를 좋게 하라, 그러면 열매도 좋아질 것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그러면 손도 깨끗하여질 것이다. (3)그는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한 것처럼 꾸미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치유를 행하시는데 있어 사용하기를 기뻐하신 도구나 혹은 통로에 불과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말과 함께 은총이 베풀어짐으로써, 이제부터 그들은 똑같은 서언으로 시작되는 그의 책망과 훈계와 명령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말은 이제부터 그들에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었다. (4)치유의 효과는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적이었다. 그 물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22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영원할 것이다(전3:14).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혼을 고치실 때, 더 이상 죽음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의 고유한 성질이 바뀐다. 쓸모없고 추악한 것이 유용하며 정결한 것이 된다.
2.엘리사가 벧엘에 가서 걸어가고 있을 때에, 성에서 나온 젊은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말하면서 엘리사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아이들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이나 죽였습니다. 벧엘은 당시에 어떠한 도시였습니까? 왜 엘리사는 아이들에게 저주를 내렸습니까? 아이들이 저주를 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엘리사가 내린 저주가 어떠한 성격인 것을 보여줍니까? (왕하2:23-25, 왕상12:28-29, 대하36:16-17)
답)매튜핸리주석-II.벧엘의 아이들이 저주를 받음. 저주로 인해 아이들이 멸망을 당했는데, 그것은 그 저주가 까닭 없는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벧엘에 또 다른 선지자 학교가 있었으며, 그는 그 곳으로 갔다. 그의 첫 방문에 그 곳의 학생들은 틀림없이 가능한 모든 경의를 표하며 그를 영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읍 사람들은 그를 모욕했다.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가운데 하나가 벧엘에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하며 좋아하면서,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을 증오했다. 율법은 그들에게 이러한 선지자 학교를 핍박하는 권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에서 선지자들을 만날 때마다 성읍 사람들은 늘상 그들에게 별명이나 조롱하는 말을 던지며 모욕하곤 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모욕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며, 가능하면 그들을 성읍으로부터 쫓아내고자 하였다. 만일 엘리사에게 가해진 모욕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면, 아마도 그토록 가혹한 징벌이 가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신을 조롱하며 선지자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죄였다. 역대하 36장 16절을 보라. 1.우리는 여기에서 그러한 죄 가운데 한 가지 죄의 실례를 보게 된다. 벧엘의 작은 아이들, 즉 거리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에게 왔다. 그러나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마치 엘리사가 바보라도 되는 듯이 그 주위에 모여 조롱했다. 그들은 종종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이와 같이 조롱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대상이 바로 엘리사였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사람의 타고난 결함이나 불구를 가지고 조롱하며 놀려대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와 같이 만드셨다면, 그들을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머리는 결코 결함이나 불구가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다른 뜻이 없었더라면 결코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실상 그들이 모욕하고자 했던 것은 선지자라는 그의 신분이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씌워주신 존귀는 그의 벗겨진 머리를 가려주고 그들의 조롱을 막아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에게 ‘올라가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엘리야의 승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네 스승은 올라갔거늘, 어째서 너는 스승을 따라 올라가지 않느냐? 불수레는 어디 있느냐? 네가 언제 우리 곁을 떠나겠느냐?” 이 아이들은 자기 부모들로부터 듣고 배운 대로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부모로부터 선지자를 추악한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에 대해 나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어린 닭들이 어미 닭들이 하는 대로 지껄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경우 그들의 부모들이 선지자를 자신들의 성읍으로부터 쫓아내기 위해 아이들을 내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2.우리는 여기에서 마침내 이스라엘에게 임할 멸망이 표본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능욕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일은 그들에게 분명한 경고로 의도된 것이었다. 엘리사는 얼마 동안 그들의 조롱을 참고 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심의 불이 아이들의 계속적인 격발에 의해 그의 가슴에 불붙었다. 엘리사는 뒤로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인해 아이들이 당황하여 물러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들의 얼굴에 어떤 순진함의 표징이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저주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심판이 따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해진 모욕에 대해 징벌하기 위해 신적 공의의 입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저주는 즉각 실현되었다. 인근에 있는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24절). 여기에서, (1)엘리사는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 것은 신적 충동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저주가 어떤 나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그에 대해 ‘아멘’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암곰 두 마리는 그들을 고치기 위한 두 개의 회초리와 같은 것이었다. 엘리사는 성령에 의해 이 아이들의 악한 성품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들이 악한 독사의 세대라는 사실과 또 장차 하나님의 선지자들에 대해 더욱 악독한 원수가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아보았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지자를 모욕한다면, 장차 얼마나 더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부모들을 징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2)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비록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반드시 회계하실 것이다. 악하고 파렴치한 무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게 하라. 또한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악한 말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의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로 하여금 정신과 육체에 결함이 있는 자들을 조롱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불쌍히 여기게 하라. 특별히 그들로 하여금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사역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선행을 비웃으면 바로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자녀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하며, 그들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쫓아내는데 때를 놓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홀 주교가 지적하는 것처럼 “훈계하기를 게을리한 자녀로부터 선한 것을 기대하는 것과,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능히 막을 수 있었을 일로 슬퍼하는 것은 너무도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벧엘에 왔으며,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지하고 계신 것을 그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를 떠나 그는 갈멜 산으로 갔는데(25절), 아마도 그 곳에는 은거와 묵상에 적합한 처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왔는데,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왕도로서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였다. 홀 주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혼자 있거나 혹은 한 번도 혼자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유능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
3.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악한 일을 행하였지만 그러나 아버지 아합이나 어머니 이세벨 정도로 악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합이 만든 바알의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금송아지 숭배는 계속 유지시켰습니다. 왜 여호람은 바알의 우상을 제거하면서도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 고수하였습니까? 여호람이 행한 개혁은 진정한 것이었습니까? 그러한 개혁의 특징은 과연 무엇입니까? (왕하3:1-3, 왕상22:49, 왕하10:19)
답)매튜핸리주석-아하시야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동생인 여호람이었다. 여호람 역시도 비록 악한 자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와 관련하여 칭찬할 만한 일 두 가지가 기록된 것을 보게 된다. I.그가 자기 아버지 아합의 우상들을 제거했다는 사실. 그는 악한 일을 많이 행했지만, 그러나 아버지 아합이나 어머니 이세벨 같지는 않았다(2절). 그는 악했지만, 그러나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지나치리만큼 악하지는 않았다(전7:17). 여호사밧은 아합의 집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의 집에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여호람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바알을 섬김으로 멸망을 당한 것을 보았고, 지혜롭게도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오직 그의 선지자들과만 의논하기로 결심하면서 바알의 주상들을 제거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는 아합의 집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아니, 그나마 그의 가문 가운데 그가 가장 나은 자 중에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은 그의 시대에 임했으며 바로 그 위에 떨어졌다(9:24). 왜냐하면 그의 때에 죄의 분량이 다 찼기 때문이었다. 여호람의 개혁은 결국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1.그는 단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만을 제거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여호사밧을 예우하여 한 일이었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신과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호람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마도 여호사밧이 그의 형 아하시야의 제의를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왕상22:49). 반면 여호람은 백성들 가운데 만연했던 바울 숭배는 없애지 않았다(왕하10:19을 보라). 그가 자기 집을 개혁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사용했어야 했다. 2.그는 바알의 주상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정책적인 죄였던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해서 고수했기 때문이다(3절). 그는 그러한 죄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왕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국가적 장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며 개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죄만을 버리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죄를 계속해서 고수했다. 3.그는 바알의 주상을 단지 제거하기만 했을 뿐 부숴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다시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잠시 동안 옆으로 치워 두었다. 그리고 이세벨은 계속해서 은밀하게 자신의 바알을 섬겼다.
*참고성경구절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잠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왕상12:28-29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대하36:16-17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 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왕상22: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라지 아니하였더라
왕하10: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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