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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S_Joshua_여호수아 제15과

공부할 내용: 여호수아 7장 6-15절

본문

202311월 12(주일) 오후 4 줌zoom 그룹성경공부


1.아이 성 전투에서 패하였을 때에, 여호수아는 옷을 찢었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릎쓰고 저녁 무렵까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 여호수아가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불평하는 듯한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같은 종류입니까? 아니면 선한 사람이 일이 어그러질 때에 최악을 상상하면서 하는 말과 같은 종류입니까? 궁극적으로 여호수아의 변론적인 이러한 기도의 말에는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7:5-9, 14:11, 14:2-3)

  )매튜헨리주석-이 같은 슬픈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는 깊은 근심에 빠진다. 여호수아는 공인으로서 이 같은 공적 손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신을 더 많이 연관시켰다.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방백들과 권세자들의 본이 되고 있는데,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겪는 불행에 더 많이 마음을 쓸 것을 가르친다. 여호수아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그분에게 있어 자기 종들의 피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72:14,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다음을 주목하라. I.여호수아는 어떻게 슬퍼했다. 그는 옷을 찢었다(6). 이것은 국가적 재앙에 대한 큰 슬픔의 표현이었으며, 또한 특별히 이것의 원인이 된 하나님의 싫어하심에 대한 두려움의 증표였다. 이것이 만일 전쟁에서 흔히 있는 통상적인 일에 불과했다면(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한 장군을 이토록 실의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이와 같이 느끼는 것은 장군으로서 마땅한 바요 명예로운 일이다. 이 땅에 태어난 가장 용맹한 군사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119:120).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있는 한 사람의 겸손한 사람으로서,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낮아지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또 여호수아는 자기 눈을 여호와의 궤로 향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증표를 나타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여호수아의 본을 따라 그와 함께 엎드려 깊은 슬픔의 증표로서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애곡자로서 뿐만 아니라 참회자로서였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들과 다투신 것은 어떤 죄 때문임을 의심하지 않은 채(비록 어떤 죄로 인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노를 거두어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저물기까지 이런 상태로 있었는데, 이것은 순간적인 감정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위험해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적의 강함과 관련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정탐꾼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또 원정대 병사들의 겁약함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비록 그들이 비난받을 만하기는 했지만, 여호수아의 눈은 하나님께로 향했다. 이스라엘 진에 처리되지 않은 어떤 악이 있지 않은가? 여호수아의 눈은 하나님의 불쾌하심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기도했나. 이것은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변론에 가까웠다. 여호수아는 비천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사정을 간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셨을 때 다윗이 가졌던 시무룩한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여호수아의 정신은 지금 어느 정도 당황하고 안정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기도의 틀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탄원한다. 1.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요단 건너편의 두 지파와 반 지파의 분깃을 나누어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7). 그는 거기 거하며 모자라게 사는 것이 여기 와서 끊어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불평의 맛을 풍긴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자의 경악과 실망이 너무나 컸음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와 같은 말은 광야 생활 동안 불평하는 자들의 입을 통하여 너무나 자주 듣던 말이다(14:11,17:3,14:2,3). 그러나 중심을 감찰하시는 자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영(spirit)으로부터 나왔음을 아셨고, 따라서 여호수아가 부적절하게 말한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오점을 찍지 않으셨다. 만일 여호수아가 이러한 혼란이 분명히 부적절한 그러나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했다면(모세의 때에 종종 그랬던 것처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져 멸망 당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아신다 - 비록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잘못된 일을 행하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하지도 않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3.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지금 처한 위험을 변론한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단념한다.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의 보호자가 떠났다고 결론짓고 우리를둘러싸리니, 우리가 전에는 두려운 존재였으나 이제는 경멸당하는 존재가 될것이며 그들이 우리 이름을 땅에서 끊을 것입니다(9). 이와 같이 선한 사람들조차 일이 조금 어그러질 때 최악을 상상하면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게 결론짓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간청이 내포되어있다: “주여, 당신께 그토록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그토록 큰 이스라엘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2.여호수아가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도망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아이 성 패배를 보면서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또 여호수아는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최고의 관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서로 토론해 보십시오. (7:8-9, 45:5, 13:7, 6:9)

  )매튜헨리주석-2.여호수아는 이 사건이 미칠 파장과 관련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8). 주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그토록 큰 일을 행하셨고 또 이 땅을 차지하도록 약속해 주셨는데, 이런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이 원수들 앞에서 등(문자대로 하면 ’)을 돌리고 도망칠 뿐 아니라 무너지고 또 그들의 먹이가 되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이해해야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능력에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주의 손이 짧아지셨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의 말씀은 도 되고 아니오도 되는 것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제 다 헛되이 끝나고 만 것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현명하고 최고의 사람들조차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리라(13:7). 4.여호수아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돌려질 불명예를 변론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다면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이름을 끊을 것입니다여호수아는 마치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위하여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말한다. “우리의 작은 이름이 어떻게 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여호수아는 이것을 더 큰 재앙으로 보면서 애통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 일로 하나님께 대하여 또 그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하여 나쁜 영향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은혜를 입은 영혼에게 있어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가 끼쳐지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여호수아는 또한 자신의 두려움을 막아주실 것과 하나님의 호의가 회복되는 것을 위해 간청하고 있다. 여호수아의 간청은 아버지여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란 간구와 같은 것인데, 그는 이와 같은 간청과 함께 말을 끝맺는다.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위대한 이름이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일하실 것이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이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것을 믿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것을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한다. 마치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의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우리는 여기에다가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하며, 또한 이것이 우리의 모든 소망의 기초인 것처럼 이것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해야 한다. “주여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찌 하시려나이까?” -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간구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영광을 받으시게 하자. 그러고 나서 그의 전체적인 뜻을 즐거이 받아들이자.


3.하나님께서 낙심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침에 지파대로, 족속대로, 가족대로,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그와 그 모든 소유를 함께 불사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누가 그 일을 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우연처럼 보이는 제비뽑기의 조사를 통해서 범인이 밝혀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어떠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까? 또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에 대해서도 서로 대화해 보십시오. (7:10-15, 51:1-2, 요일1:9, 44:16)

  )매튜헨리주석-우리는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은 여호수아가 엎드려 있었던 법궤와 관련한 신탁(oracle)으로 말미암은 것일 것이다(6).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분명한 신탁에 대한 갈망을 갖고 지혜가 가르치는 바를 위하여 지혜의 문 앞에 기다려야 한다(8:34). 하나님의 싫어하심의 증표 아래 있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분에게 하소연하라. 그러면 평강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에 하나님의 응답은 마치 다니엘의 경우처럼(9:20)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 동안(65:24) 즉각적으로 내려왔다. I.하나님께서 격려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다(10). 여호수아는 지금 낙망 가운데 있으며, 또 이스라엘의 현 상태에 대하여 우울하고 비관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 일어나라. 그 같이 낙담하고 침통해 함으로써 네 영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이토록 낮춘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싫어하심의 증표아래서 마치 자신이 그 일을 행한 것처럼 애통해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됐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그와 같은 침울한 자세로 더 이상 계속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회자의 슬픔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보다 용서를 받고 평강을 회복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애통의 날은 끝나야 한다. 일어날지어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52:2). 여호수아는 저물 때까지 계속해서 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6), 이스라엘은 범인을 찾아내는 일을 그 날 밤에 수행할 수 없었고, 때문에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9:21)과 에스라(9:5)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애통하는 일을 계속했는데, 바로 이것이 그들을 다시 회복되게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시간을 지나서 계속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밤새도록 거기 엎드려 있지 말아라.” 모세는 이스라엘을 중보하기 위해 여호와 앞에 40일을 엎드려 있었다(9:18). 그러나 여호수아는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 엎드려 있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찾아내서 처분해 버려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호수아가 애곡의 상복을 벗어버리고 재판장의 법복을 입을 때이다. 우는 것이 씨 뿌리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한가지 종교적 의무가 다른 의무를 밀쳐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스가냐가 이와 비슷한 경우에 에스라에게 말할 때에 그는 아마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에스라 10:24을 보라. II.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재앙에 대한 진정한 원인을 알려 주시면서 당신이 이스라엘과 다투신 이유를 보이신다(11).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도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팔이 짧아진 것도 아니고 그분의 약속이 실패로 끝날 것도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렇게 큰 화를 만들고, 하나님의 호의를 가로막으며 불화(不和)를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죄, 바로 죄 때문이다. 죄가 언급되는 가운데에도 죄인은 거명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될 때까지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행동으로 언급된다. 그 죄가 여기에서 얼마나 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주목하라. 1.그들이 나의 언약 즉 형벌과 함께 제시한 분명한 경고를 위반했다. 이것은 여리고의 모든 노략물이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나머지 도시들의 노략물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을 탈취함으로써 이러한 언약을 위반했다. 2.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까지 취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물을 침범한 자에게 엄숙하게 선언된 저주를 멸시하면서까지 그렇게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와 같은 저주가 아무것도 아닌 양 여기는 것과 같았다. 3.그들은 도둑질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전지하심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여기는 양 그 일을 은밀하게 행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께서 보지 않으실 거야, 혹은 주께서 그토록 작은 물건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실 거야.” 이와 같이 너희는 나를 너희 중 하나와 같이 생각하였느니라. 4.그들은 또한 거짓으로 가장했다. 여리고를 노략하는 일이 끝났을 때, 아마도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를 불러 노락물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올바로 처리했는지, 그리고 혹시 어떤 위반사항을 알고 있다면 알릴 것을 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간은 결백함을 공언하는 무리들 가운데 끼여 동참했으며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는 마치 잠언30:20의 음녀와 같았다.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5.그들은 온전히 바친 물건을 자기 물건들 가운데 두었다. 마치 자신들이 그것을 취할 권리가 있는 양, 그리고 회계할 것을 생각지도 않고 또 돌려줄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렇게 했다. 비록 현명하고 주의 깊은 통치자였다 할지라도, 여호수아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은밀한 악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누가 이 일을 했는지 여호수아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인을 색출하는 일에 열의를 갖고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죄인에게 회개하고 자백할 기회를 주기위함이었다. 분명히 여호수아는 이와 같은 죄가 있음을 이스라엘 모든 진에 즉각 선포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만일 아간이 스스로 굴복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면,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한”(5:15,16) 것에 대하여 속건제를 드리고 훔친 물건을 돌려줌으로써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아간은 제비뽑기에 의해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자기의 죄를 감추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완악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어떤 자비도 주어지지 않았다. III.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계속 조사할 것을 일깨워 주신다. 1.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투는 유일한 문제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온전히 바친 (저주받은, accursed) 물건과 관련된 죄가 제거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이 한 가지 장애물이 치워질 때, 이스라엘의 성공의 물결은 예전처럼 힘차게 흐르게 될 것이다. 2.만일 이 온전히 바친 물건이 제하여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를 기대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너희가 저주받은 것(accursed), 다시 말해서 저주받은 물건(accursed thing)으로 인해 저주받은 자(accursed person)를 제하지 않고는 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너희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저주받은 것(온전히 바친 것은 제하여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칼을 차도록 맡긴 사람들이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죄에 대해 그 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헛되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회개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저주받은 것을 파괴시켜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다름 아닌 죄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죄를 진지하게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지 않는다면, 그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을 것이다. IV.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조사하고 형벌을 내릴 것인지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다. 1.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도록 명령을 내려야 한다(13). 지도자든 사역자든 성화(거룩하게 함)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또 하나님의 조사에 순복해야 한다. 또 그들은 스스로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만나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9). 지금도 또한 동일한 명령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경우에 모두 하나님께 최고의 경의가 돌려진다. 너희 가운데 저주받은(온전히 바친, accursed) 물건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 다시 말해서, 결백한 자들은 스스로를 정결케 하고 자신을 깨끗게 하는 데 더 주의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우리의 성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치 고린도 교회에서의 근친상간의 죄로 인해 그 교회가 새롭게 개혁되었던 것처럼(고후7:11). 2.여호수아는 모든 백성을 제비뽑기의 조사) 아래 세워야 한다(14). 제비뽑기에 의해서 범죄한 사람이 속한 지파가 먼저 드러날 것이고, 이어서 족속이, 그리고 가족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범죄자가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 범죄자는 점차 후회하는 마음이 들 것이고, 앞으로 나아와 굴복할 다소의 여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벧후3:9). 하나님께서 제비가 떨어지는 지파와 족속과 가족을 나아오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라. 제비가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무한한 지혜와 공의에 의해 인도된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범인을 붙잡은 것은 하나님이었으며, 그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44:16). 의로우신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며 또 죄인과 결백한 사람을 구별하시는 사실 가운데 비록 잠깐 동안은 모두가 동일한 정죄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 하나님이 악한 자들로부터 선한 자들을 골라내실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비록 의인이 악인과 같은 지파와 족속과 가족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악한 자들처럼 취급당하지는 않을 것이다(18:25). 3.범죄자는 어떤 자비도 없이(10:28), 그리고 모든 거룩한 증오의 표현과 함께 죽음에 처하여져야 한다(15). 그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불태워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가운데 저주받은 것’(온전히 바친 것)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가혹한 형벌이 가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그가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겼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신데, 특별히 거룩한 언약의 존귀함에 있어 그러하다. (2)그가 하나님의 교회에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 가운데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며, 주변 나라들로부터 지혜롭고 명철한 백성으로 여겨지는 나라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또 하나님께 대하여 성별된 나라를 오염시켰으며,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시는 나라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것은 본질상 가증한 범죄였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스라엘 가운데 나쁜 선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해진 형벌은 다른 경우라면 지나치게 잔혹한 행위로 비난받을 수 있을지라도 필연적인 공의로서 갈채를 받아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었고,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소유를 횡령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되고 또 성소의 예배에 쓰여져야 할 것을 개인 용도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토록 혹독한 형벌이 부과되었던 그 죄의 속성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형벌은 모든 세대의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조심하도록 경고하는 것이었다.


*참고성경구절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에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4:2-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44:16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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