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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3)_프린트물_202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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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1-21 14:50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3)

[ 제3권 제12장 6항 – 제13장 4항 ]


       성경본문: 누가복음 18:1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2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6항.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의 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파멸적인 위선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자기 마음에 느끼는 것이 반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악행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즉시 자기에게 있는 고귀한 듯한 것을 일체 짓밟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시18:27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비참함과 빈곤함을 알고 진실하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나 겸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께서 스바냐서에서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3:11-12)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누가 겸손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의 빈곤함을 알고 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랑한다”고 하십니다. 번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를 바라는 것만을 남겨주셨습니다. 이사야서에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2)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하려 함이라”(사57:1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통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높임을 받으려면, 우리 마음에 이런 통회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힘있는 손에 교만이 꺾이며,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7항.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십니다. 주께서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눅18:13). 세리가 한 행동을 가짜 겸손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더 가까이 오지 못한 것,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그가 충심으로 느낀 것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소개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보통 사람들 즉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주 두 번씩 금식하며, 가진 것의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감사하노라고 합니다(눅18:11-12).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서는 그에게 있는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눅18:14).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을 주께서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즉 우쭐하는 생각이 차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따라서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슬픈 자를 위로하되…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기름으로 그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61:1-3). 이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만을 불러 자신의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마11:28).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마9:13). 


8항.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 만족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자신이 없더라도 자기 만족은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죄인들이 그 죄악 생활의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취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얻으려고 애쓸 줄을 모릅니다.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과 같이, 그런 태만도 버려야만 우리는 비워지고 주린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주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주시는 좋은 것으로 배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그가 우리 안에서 공로를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르나르드도 이와 일치하는 뜻으로,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하인과 비교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지나쳐 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듯이 생각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합니다. 이는 마치 벽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보내지 않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이며 확실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말하겠습니다. 즉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제13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항.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 하며,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의가 문제될 때마다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라는 간곡한 권고가 자주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롬3:25). 그러나 그는 곧 이 의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을 부연하기를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고 인정되며, 자격 없는 자에게 의의 선물을 거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는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롬3:19). 이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는, 우리가 우리의 불의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20:43).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20:44).


  만일 이런 일들이 즉, 우리 자신의 불의를 알고 고민하며, 무가치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의 일부라면, 우리는 그의 거저 주시는 의롭다하심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훔치려 합니까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말라”(렘9:23), 그러나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고전1:31,렘9:24)했을 때에, 그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확실히 바울은 이 말씀을 이런 뜻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1:30-31). 그가 말하는 뜻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2항.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사태는 이렇습니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참으로 바울은, 사람에게서 자랑할 구실을 완전히 빼앗은 때라야 세상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롬3:19 참조).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선포하면서, “자랑하리라”는 말을 첨가합니다(사45:25). 이것은, 선민은 주를 자랑하며, 주 이외의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 위하여 주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앞에 있는 귀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자랑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즉,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힘은 여호와께 있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사45:24). 단순한 고백이 아니고, 맹세로써 확인된 고백을 요구하는 데 유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하면서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생각이 없이 자기의 의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는 이런 자기 평가에는 반드시 자기 신뢰가 따르며, 스스로에게서는 반드시 자랑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은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말대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고(롬3:26)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다른 귀절에서 주께서는 그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엡1:6) 말한 후에, 이 뜻을 반복해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부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벧전2:9). 베드로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독 행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항.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때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의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20:9)라는 솔로몬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확실히,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입니까?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볼 때에, 그의 심판 앞에서 확고한 평화를 느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지옥에 빠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도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만큼 견고한 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의에 관한 논의는 무익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태연하게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런 때에 한해서 우리가 가진 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 점을 역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말보다 그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롬4:14). 사도는 우선, 만일 의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의 행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거나 율법을 준수하는 데 좌우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며 배제된다고 추론합니다. 아무도 그런 약속을 믿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을 완수했다는 확신이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제멋대로 생활하며, 심지어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자화자찬을 대립시켜, 하나님의 법적 절차를 중지하도록 강요하려는 듯이 행동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위선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에 파묻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훨씬 다른 근심과 고민이 있습니다. 우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의혹이 잠입하고, 드디어 절망 상태에 빠집니다. 이는 무거운 빚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보라, 믿음은 벌써 눌리고 소멸되었도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 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고전2:5,고후13:4 참조).


4항.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바울은 약속이 무용하며 무효하게 되리라는 또 다른 점도 첨부합니다. 우리의 공로에 따라서 약속이 실현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경지에 언제 도달할 것입니까? 실로, 이 둘째 점은 첫째 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약속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약속도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에 의한 약속을 확립하기 위해서, 기업은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할 때에 기업은 풍성하게 확인됩니다. 자비와 신실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약속하시는 것은 신실하게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구원을 구하기 전에, 우선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119:76). 이 순서는 바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다만 그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근거로 삼고 그 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깊고 든든하게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 행위를 완전히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행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 안에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약속하셨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맹세하셨다.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 일을 선포할 때에, 아무도 불안을 느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르나르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신다(마19:25-26). 이것이 우리가 믿는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의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품는 이유의 전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우리는 그의 의지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누가 아느뇨’(전9:1 참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4,사 40:13 참조). 여기서 믿음이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고, 진리가 우리를 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모르는 것, 아버지의 가슴 속에 숨겨 있는 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성령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롬8:16) 우리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심으로써 설득해주실 필요가 있다. 확실히 이 일에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중간 통로가 있다.”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합시다. 양심의 완전한 확신으로 붙잡은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은 확립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의심이나 불안이 있으면 약속은 무효라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는 약속은 흔들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가 우리를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행위를 문제로 삼지않고 신앙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는 전연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은 성취됩니다. 즉 이 땅에서 죄악이 제거될 때에는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슥3:10)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언자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쓰는 비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논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외면적인복을 영적 은혜의 모형으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키는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과(사9:6) “우리의 화평”이라고(엡2:14) 부릅니다.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푼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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