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30)_프린트물_2024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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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8-12 23:42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0)
[ 제3권 제20장 5항 – 제20장 7항 ]
성경본문: 로마서 8:26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5항. 무례하며 불경건한 기도를 배척함
두 가지 일에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하고, 흔히 그러는 것처럼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경외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경박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는 가장 반대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어느새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곁길에 들게 하여 진행을 더디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친밀한 대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섞음으로써 그분의 크신 인자하심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가를 여기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같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여, 세상적인 걱정과 애착을 일체 버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하고 합당한 기도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 것은 생각을 높이 비약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시25:1). 성경에서는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예컨대, 사37:4).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찌끼 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렘48:11,습1:12 참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우리의 근심 걱정을 자신의 가슴에 털어 놓으라고 친절하게 권할수록, 하나님의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이 은혜를 무시하는 우리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더 중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며, 정신과 노력을 정성스럽게 기도에 바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정신은 이 여러 가지 방해물과 굳세게 싸워서 이기고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점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을 그의 앞에 쏟아놓으라고 하셨지만(시62:8,시145:19 참조), 우매하고 사악한 감정은 무엇이든지 날뛰게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방자한 뜻에 양보하시기까지 인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 보통입니다.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감히 조르며, 어떤 망상이든지 닥치는 대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우둔하고 우매해서 사람 앞에서도 말하기를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감히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습니다. 이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행동은 세속 문인들도 희롱하며 미워하기까지 했지만, 이 죄악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야심가들은 쥬피터(Jupiter)를 수호신으로 택했고, 인색한 자들은 머큐리(Mercury)를, 지식을 탐하는 자들은 아폴로(Apollo)와 미네르바(Minerva)를, 군인들은 마르스(Mars)를, 음탕한 자들은 비너스(Venus)를 택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지금도 친구끼리 농담과 잡담을 할 때보다 기도 중에 불법한 욕망을 더 관대하게 버려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한 대우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그의 권력에 굴복시키며 억제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고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완전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능력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보조 수단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간절히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둘 다 훨씬 낮은 곳에 서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둘이 다 기력이 없어 낙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한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 기도의 교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기도에 있어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알려 주시며 감정을 조절해 주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께서 직접 기도하시거나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과 소원과 탄식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또 바울이 신자가 성령의 지도로 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이라고 형용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훈련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은 기도 중에 맹목적인 불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며 가슴이 답답하여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를 모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하려 해도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만을 감싸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의 영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본래 빠지기 쉬운 무관심 상태에 머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실 때까지 우리는 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불경건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무기력하고 침체된 자기를 혐오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면서도(고전14:15), 동시에 깨어 있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고무하여 기도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지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법칙: 진심으로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항)
6항.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둘째 법칙은,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에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듯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읊어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간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치명적이 되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의 곤란에 대한 필요한 대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은 냉담하여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 의무를 이행하며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고 몽롱하게 자기의 부족을 느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 그 느낌이 현실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 기도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서 해방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적어도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이 없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의 거짓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보다 더 가증하고 저주스러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직접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인류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기도라는 행동만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을 기원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도 다른 데서 오리라고 확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보다는 덜 심한 듯하면서도 역시 허용할 수 없는 결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겠다는 한 가지 원칙이 몸에 배어서, 아무 명상도 없이 기도를 중얼거립니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얻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원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구하는 일들은, 얼른 보기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6:9,눅11:2), 우리는 그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일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같이 정성껏 기도해야 합니다.
7항.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꼭같은 절박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약5:13) 구별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너무나 게으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아픈 자극을 주셔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주를 만날 기회”라고 부릅니다(시32:6). 그가 다른 데서도 자주 가르치는 것과 같이(시94:19 등), 곤란과 불안과 공포와 그 밖의 시련이 우리를 가혹하게 압박할수록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듯이,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울이 우리는 “무시로...기도”해야 한다고 한 것도(엡6:18,살전5:17) 옳은 말입니다. 아무리 일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디를 보나 기뻐할 일들이 주위에 가득하더라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은 없습니다. 포도주와 곡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는 떡 한 조각이라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하실과 창고들도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위험이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도 기도를 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많은 죄를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 죄와 벌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좋도록,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열성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서, 같은 기회가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 견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뒤로 미룰 것입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5:17) 권고하며, 우리의 태만을 책망하는데, 그것은 이 끊임없는 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과 교활한 거짓을 기도에서 배제하며 멀리 추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하셨고(시145:18),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29:13-14). 그런 이유로 자기들의 추악한 것을 즐기는 자들은 전혀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하며(요9:31), 그들의 기도는(잠28:9,사1:15 참조) 그들의 제물과 같이(잠15:8,21:27 참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빗장을 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귀가 닫힌 것을 발견하며, 마음이 냉혹해서 하나님의 엄격한 처사를 도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관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5).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11:7,8,11)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평생 더럽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고의 수치로 여기십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책망하십니다(사29:13).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분께 대한 경배의 모든 부분에서 거짓은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야고보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약4:3) 한 말은 이에 적용됩니다. 곧 다음 글에서 알게 될 일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의 가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요일3:22) 경고한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닙니다. 악한 양심은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문을 닫히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성실하게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준비할 때에는 자기의 악한 행실을 혐오하고, 거지와 같은 처지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이것은 회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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