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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4)_프린트물_2024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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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10-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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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4)

[ 제3권 제20장 18항 – 제20장 21항 ]


       성경본문: 요한복음 14:6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18항.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는 자신의 중보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그 때의 상황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26).


  처음부터 중보자의 은혜가 없으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응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제사장뿐이었고, 그는 두 어깨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메고, 같은 수효의 보석이 달린 흉패를 가슴에 붙이고 들어갔습니다(출28:9-21). 그리고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성전 뜰에 서 있었고, 거기서 제사장과 함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참으로 제물까지도 그 가치는 기도를 확인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있을 일을 예시한 이 율법의 의식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며, 이 분이 우리를 그 두 어깨에 메고 그 가슴에 달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서 실현되도록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불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피를 뿌려 정하게 하신다고 율법의 의식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얻고자 할 때에 제물에 소망의 근거를 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기도를 용납하게 하는 것은 제물이란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시20: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중보로 노여움을 푸시고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우리는 추론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새로운 시기를 정하셨습니까? 이 은혜가 지금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더욱 인정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는 같은 뜻으로 조금 전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요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이 중보자의 직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모두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승천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이전보다 더 확실한 변호자가 되시리라는 것을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특별한 은혜로 위로하시기 위해서 중보자의 직분을 취하시고, 그들이 지금까지 받지 못한 특별한 복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그들은 그의 보호를 믿고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복을 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새로운 길을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히10:20). 만일 우리만을 위해서 예정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은혜를 우리가(속담같이) 두 팔로 껴안지 않는다면,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은 더욱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19항.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시므로(요14:6), 이 길에서 벗어나며, 이 통로를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그들을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은 진노와 심판과 공포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인을 치셔서(요6:27 참조) 우리의 지도자와(마2:6) 머리로(고전11:3) 삼으셨으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에게서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찍어 놓으신 표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려고 꾸준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중보자로 제정되었고, 그의 중보에 의해서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분, 기도를 쉽게 들어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서로 중재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를 통해서 상호의 구원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사도가 이런 기도를 언급했으나(딤전2:1), 신자들의 상호 중재 기도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자발적으로 아무 이해타산이 없이 사랑하며, 그 사랑하는 감정이 넘쳐 중재 기도로 나타나는 것같이, 그런 기도는 또한 한 머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않으면 아무 기도도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하는 모든 중보 기도는 저 유일한 중보 기도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여겨야 합니다. 참으로 특히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각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거절하셔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의 변호인들로 임명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각각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남용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행위이니, 그 얼마나 참람한 일입니까?


20항.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중보 기도의 중보자라고 지껄이는 궤변가들의 무의미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한 번 중보 직책을 다하시고, 영원 불변하는 중보 직책은 종들에게 맡기셨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영광의 작은 일부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베어 내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친절히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매우 다릅니다. 이 사기꾼들을 무시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요일2:1) 요한이 말할 때 그 뜻이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만 우리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셨다는 것입니까, 또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롬8:34) 주장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른 곳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딤전2:5) 할 때에, 그는 조금 전에(딤전2:1-2) 말한 기도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라고 말한 후에 바울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첨가하여 “하나님은 한분이시오...중보도 한 분이시니”라고(딤전2:5) 하였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의하여 서로 다른 사람을 권고한다. 그러나 진정한 중보자는 한 분뿐이시다. 그를 위하여 중보하는 사람은 없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신다”라고 동일한 설명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머리되시는 주님 밑에 있는 탁월한 지체였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였으며, 교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정한 제사장은 상징적으로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확고한 사실로 하늘의 내부 성소, 곧 실재하고 영원한 성결의 자리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롬15:30,엡6:19,골4:3). 또 그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자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이유로서 그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라고 합니다(고전12:25-26). 이렇게 모든 지체가 지상에서 애써 일하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들보다 먼저 승천하신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요일2:2). 만일 바울이 중보자였다면 다른 사도들도 그러했을 것이요, 만일 중보자가 여럿이라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한 말은 성립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엡4:3)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롬12:5). 어거스틴은 다른 귀절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대제사장을 구한다면, 그는 하늘 위에 계신다. 그는 거기서 당신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신다. 또한 당신을 위해서 땅에서 죽으셨다”(히7:26 이하참조).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애원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죽음의 힘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 기도로서의 효과를 가진다고 이해합니다(롬8:34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며, 이 세상의 종말까지 (히9:24 이하참조) 홀로 백성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시며, 백성은 멀리 바깥 뜰에 머물러 있다고 이해합니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항)

21항.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육신으로 죽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성자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기도를 돌릴 때에, 그들이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요14:6) 통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른 이름으로 받아주신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소환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기를 원하십니다(골1:20,엡1:10). 그러므로 그를 떠나서는 들어갈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미친 짓은 아니더라도 우매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입니까? 지금도 이른바 교황 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대개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빈번히 성자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묻노니, 이것은 그리스도께만 속한다고 우리가 이미 주장한 그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성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조작한 소위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한마디라도 계시했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천사였습니까? 마귀였습니까?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조작을 했습니까? 참으로,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가 없는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그런 때에 그것은 자체에 신앙이 없음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자들의 중재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들이 불안에 눌려 있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유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든지,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엄격하신 것같이 느낍니다. 첫째로, 이 혼란한 심리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며 유일한 중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에게서 빼앗습니다. 그러나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특권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또 그들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그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어 결국 그가 하신 일과 받으신 고통에서 그가 당연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박탈합니다! 그의 행적과 수난당하신 것을 보면 그 분만이 중보자이시며, 또 그렇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내던져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로 나타나시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 대해서 형제애를 가지셨고 그의 사랑에 비교할 만한 인자하고 다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형제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명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며, 그의 안에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의 입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말한다. 그는 우리의 눈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손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바친다. 그가 중간에 개입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공중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항의한다면 이런 항변은 무가치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죽은 사람들의 기도나 공로와 뒤섞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예배 때의 글과 성가와 산문에서 죽은 성자들에게 온갖 영예를 돌리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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