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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5)_프린트물_2024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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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11-12 02:09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5)

[ 제3권 제20장 22항 – 제20장 25항 ]


       성경본문: 에스겔 14:14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22항. 성자 숭배

  그러나 우매의 정도가 심해져서 지금은 명백히 미신으로 기울어진 이 경향은 제지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방자하게 되기가 십상입니다. 성자들의 중재를 생각하게 된 후로 사람들은 각 성자에게 특별한 기능을 돌리고, 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성자에게 또 어떤 때는 저 성자에게 중재를 기원합니다. 그 다음에 각 사람이 어떤 한 성자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그의 보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처럼(렘2:28,11:13), 도시의 수에 따라 신을 설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구 수에 따라서 신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모든 소원을 하나님 뜻에만 관련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명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고 어떤 다른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자들에 대해 우매하며 육적이며 모욕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각 성자는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적인 편애를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성자들을 돕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구원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기도하는 무서운 신성 모독을 여전히 감행하는 자들이 지금도 아주 많습니다. 가련한 인간들은 정당한 입장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질 때에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됩니다.


  이런 무신앙의 더 큰 기괴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바르바라(Barbara), 카타린(Catherine), 기타 성자들의 조각이나 그림 앞에 엎드려 그들은 “우리 아버지”라고 중얼거립니다. 사제들은 이런 미친 짓을 고쳐 주거나 억제하기는 커녕 도리어 이득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시인하며 장려하면서 이런 추악한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엘리기우스(Eligius)나 메다르드(Medard)에게 하늘에서 내려와 종들을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하도록 거룩한 동정녀가 그 아들에게 명령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구실로 변호하려는 것입니까? 고대의 칼타고 회의에서는 제단 앞에서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시의 거룩한 사람들은 악습의 세력을 완전히 꺾지 못했으나, 적어도 극단화를 방지해서, “성 베드로시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하는 식의 기도로 공중 기도를 더럽히지 않도록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옮기게 되었으니, 이 악마적인 거만이 얼마나 더 광범위하게 퍼졌겠습니까?


23항.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성경 해석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보 기도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 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들은 천사들이 기도했다는 기사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세를 떠난 성자들과 천사들을 비교하고 싶으면,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 되었고 구원을 얻을 후사를 섬기는 임무를 받았다는(히1:14)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는 임무가(시91:11) 천사들에게 위촉되었고, 천사들은 우리를 둘러진치며(시34:7), 우리에게 경고와 격려를 하며 우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임무를 천사들은 받았지만, 성자들은 받은 일이 없습니다. 죽은 성자들과 천사들에 대해서 성경이 그 직무를 여러 가지로 구별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천사와 성자를 터무니없이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도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감히 변호인의 임무를 행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직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변호인들을 하나님께 강제로 떠맡기려고 하는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은 어디서 이 위대한 면허를 얻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돌보는 직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성회에 참석하며,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각양 지혜를 보고 경탄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엡3:10). 특히 천사들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데로 옮기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그 민첩한 두뇌로 다른 증거를 끌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렘15:1).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서 중재한다는 것을 모르셨다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셨겠느냐고 묻습니다. 나의 추론은 그와 반대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대로 모세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중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이 직접 나오게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성자가 그 일을 하리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훨씬 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렘15:1참조)라고 하셨으므로, 죽은 사람들은 확실히 산 자들을 위해서 중재한다고 논쟁자들이 이런 무가치한 궤변을 계속한다면, 나는 더욱 그럴 듯한 추론을 하겠습니다. “만일 모세가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라고 하였으니, 자기 백성이 극도로 곤란했을 때에도 모세는 중보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다른 사람은 중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온유함이나 인자나, 아버지 같은 관심 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세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 궤변가들은 냉소함으로써 자기들을 훌륭히 무장시킨 줄로 생각한 바로 그 무기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발언을 그와 같이 곡해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전에는 모세나 사무엘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이 백성의 변호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에스겔서에 있는 비슷한 귀절에서도 아주 분명한 뜻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그 자녀를 구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14:14). 여기서는 “만일 이 셋 중의 둘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하는 뜻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째 사람 즉 다니엘은 그 때에 살아 있었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년 시대에 경건의 가장 훌륭한 증거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히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기도로 후손들을 도왔다고 하지 않고, 다만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습니다(행13:36).


24항. 죽은 성자들은 지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일생을 통해서 순전히 경건과 자비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경건에 대한 욕망을 모조리 빼앗을 것이냐?”고 항의합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조사하려는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아마 그들도 여러 가지 특별한 욕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일에만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신자의 구원에 못지않게 악인들의 멸망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친교의 범위 내에 머물며, 그 교제의 성격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안식을 버리고 지상의 근심 걱정에 끌려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해서(딤전2:1-2, 약5:15-16) 성자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신자 상호간의 기도는 그들이 서로 곤란과 짐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사랑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며, 주의 약속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교훈과 약속 이 두 가지는 언제든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죽은 이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우리에게서 데려가셨을 때에, 그들과의 접촉점을 우리에게 전혀 남겨놓지 않으셨으며(전9:5-6),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는 그들에게도 우리와의 접촉점을 남겨놓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믿음으로 우리와 연결되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한결같은 사랑을 지금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묻노니 우리의 음성을 들을 만한 귀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또는 우리의 곤란을 지켜볼 만한 밝은 눈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습니까? 사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성자들에게 비치고 그 빛에 의해서 성자들은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인간 만사를 내려다본다고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지껄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특히 그들같이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머리속의 몽롱한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의 내부로 뚫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하며 성경을 짓밟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와 원수가 된다고 자주 언명합니다(롬8:6-7 참조). 또한 우리의 헛된 생각을 전적으로 정죄하며(엡4:17), 우리의 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우러러보라고 명령합니다(신12:32참조).


25항.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옹호하려고 성경에 있는 다른 증거들을 가장 사악하게 왜곡합니다. 그들은 야곱이 자기 자손들도 자기 이름과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다고 합니다(창48:16). 우선 우리는 부른다는 이 형식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기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례는 성자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매한 자들은 미련하게도 야곱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나 그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형식까지도 유치하게 오해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이사야에는 여자들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그 보호 하에서 살 때에, 남자의 이름으로 칭함을(=부름을)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사4:1).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른다는 (“칭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민족의 조상임을 말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시조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이름을 퍼뜨리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의 후손이 완전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후손들이 최고의 복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의 혈족으로 인정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손들로서는 이런 기억을 기도에 삽입함으로써 죽은 이들의 중재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을 생각하시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조상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언서에서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증거합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습니다.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 그들은 중보 기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유익에만 유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 예수께서 계시고, 그의 손으로 영원한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에 다른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성경 말씀이 족장들을 중보 기도자로서 확인한다고 이 훌륭한 교사들은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많은 중보 기도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가장 낮은 자리도 그들 사이에서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저 교사들이 어떤 종류의 찌끼에서 그들의 대언자를 만들어내는가는 세상이 잘 압니다. 교사들은 내게 대답해 모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보다 앞에 두셨고,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올리셨는데, 아브라함을 버리며 묵살하는 것이 어떻게 합당하단 말입니까! 이런 관습은 고대 교회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습이 새로운 것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옛 족장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다양하면 최근에 생긴 부패한 관습을 용서받을 것같이 생각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위해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고(시132:10 참조) 항변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과오를 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강력하게 반박합니다. 다윗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성도들과 구별되어, 그의 손을 거쳐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립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언약을 고려한 것이고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선포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점에서 본다면, 다윗에게 특별했던 것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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