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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8)_프린트물_2024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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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1-30 18:29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8)

[ 제3권 제15장 3항 – 제15장 7항 ]


       성경본문: 누가복음 17:1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5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3항.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줍니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 것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눅17:10). 우리는 주를 위해서 불필요한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감사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6:9,살후3: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습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궤변가들처럼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보존합니다.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선한 일들을 그의 불결로 더럽히고 오염시킨다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씁니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입니까!


  나는 여기에서 각 사람의 상식에 호소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서 토지 사용권을 얻은 후에 그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너그럽게 해방시켜 준 노예가 해방된 노예의 낮은 처지를 숨기고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전의 노예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받은 은혜를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은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그가 우리에게 넘겨준 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는 각각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4항. 반증에 대답함

  “하나님께 대한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궤변가들이 성경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들은 집회서에서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리라”고 한 말을 인용합니다(집회서16: 14). 다른 귀절은 히브리서에 있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말씀입니다(히13:16).


  나는 집회서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여기서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책의 저자가 - 그가 누구였든간에 - 쓴 말을 충실히 인용하지 않습니다. 희랍어 원본에는 이와 같습니다: “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집회서16:14). 이것이 정확한 원문이며 라틴역이 오역이라는 것은 이 낱말들의 구조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장의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합니다. 히브리서의 인용문에는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사도가 쓰는 희랍어의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용납하신다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한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의 선행도 항상 불결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시며, 우리에게 대해서 노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 주십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십니다. 경건한 학자들이 선행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게 하며 영원한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거의 항상 수고에 대한 보상과 싸움에 이긴 면류관을 하늘에 두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는 사실을 행위의 공로에 돌리고 은혜와는 절연시키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시며(마25:29,눅8:18), 적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많은 일을 맡게 되리라고(마25:21) 하시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신자들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값 없이 주시는 그의 자비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십니다(요1:16 참조). 그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사55:1). 그러므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락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고려하신다고 증거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물까지도 이런 영예를 받게 하십니다.


(사람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 데 반대함, 5-8항)

5항.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기초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만일 이런 문제들을 과거에 바르게 처리했다면 그렇게 많은 소란과 분열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3:10 참조).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고전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입니까?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습니다(고전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고전1: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1:4-5). 바울의 말들을 더 인용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으며(골1:14-20 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롬8:17,갈4:5-7 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롬5: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요10: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롬11:19 참조), 이미 영생에 참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이므로, 우리 자신은 미련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우리는 불결하지만 그가 우리의 순결이 되셨으며, 우리는 약하며 사탄에 대항할 무장과 방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타도하며 지옥 문을 분쇄하시려고 그가 하늘과 땅에서 받으신 권세가(마28:18)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몸을 쓰고 다니지만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것이 모두 우리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주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엡2:21 참조), 이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6항.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소멸한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와는 다른 생각을 배웠습니다.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 속에 있다고(요일5:12)하는 성경의 말씀은 거짓말인 듯이 말입니다. 죽음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명이 있는 열매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는(롬14:23)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까!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7:18, 눅6:43 참조). 이 가장 유해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능을 얼마나 남겨놓았습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얻어주셨습니다. 즉,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고 합니다. 아,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한 불경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감히 그의 권능을 박탈하며 그를 사실상 짓밟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는,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자들이 다음 귀절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5:12),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6:40 참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의 후사가 되었습니다(딛3:7,롬5:1-2 참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므로(요일3:24),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굳게 연결됩니다. 그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 자리에 앉습니다(엡2:6).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며(골1:13), 구원을 얻습니다. 이 밖에도 유사한 귀절이 무수합니다. 그 귀절들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를 얻는 능력 또는 구원을 얻는 능력뿐만아니라 의와 구원 둘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와 의에의 참여자와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리고(여기 그들의 거짓을 더욱 잘 논박하는 점이 있다)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부 옮겨 받습니다.


7항.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모든 오류의 어머니인 소르본느(Sorbonne)의 학파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경건의 요점, 즉 이신 칭의를 빼앗았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말로는 사람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고백하나, 뒤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행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를 내세웁니다. 그들은 믿음을 농담처럼 말하는 듯합니다.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자주 반복되므로 믿음을 말하지 않으면 대단히 거북하겠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선행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본다면, 그런 선행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공로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듯이, 선행은 자유 의지의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 의지에 의해서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인 피터 롬바르드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사람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정신이 바르고 건전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롬바르드가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 이 교부가 선행에서 야기되는 영광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심히 주의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소경 같았음을 참으로 분명히 나타냅니다. 위에서 자유 의지를 논했을 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말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 그의 저작에는 비슷한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모든 공로는 은혜로써 온 것뿐이며, 우리의 능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롬바르드가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훈련이 잘됐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그와 그의 제자들을 논박하는 말로서는 사도가 한 말보다 더 명백한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자랑을 금한 다음에, 자랑이 잘못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는…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가 중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서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없으며, 우리의 중생은 전적으로 일점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했노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연 없습니다.


  끝으로,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양심에 가르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확실히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믿음 없이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일을 하려면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반드시 먼저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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