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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3)_프린트물_2024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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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3-26 11:3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3)

[ 제3권 제17장 13항 – 제18장 1항 ]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5:1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7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13항. 로마서 2:13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롬2:13) 인용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그들은 거의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암브로시우스의 해결 방법을 통하여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의 이행이 곧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생각은 단순한 회피에 불과하며, 길이 열려 있으므로 전연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미련한 확신을 공격하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들만 율법을 아노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아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하지 말라는 뜻으로, 율법에서 의를 구하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구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도록 노력하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물론 율법의 의가 행위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행위의 가치와 공로에 의가 있다는 것조차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완수한 사람을 하나라도 내놓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직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뜻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은 전후 관계가 충분히 증명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불의하다고 정죄한 다음, 그는 더 자세히 논합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이것은 이방인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것은 유대인에 관한 말입니다(롬2:12).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결점은 못본 체하고율법만을 자랑했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에서 특히 적절한 말을 첨부하였습니다. 율법을 정한 목적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하면 사람들이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런 때에 한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대들은 율법에서 의를 찾는가? 율법을 들었노라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 그것은 별로 중요성이 없다 - 행위를 보이라. 그대들을 위해서 율법을 정한 것이 무익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공언할 수 있을 만한 행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없었으므로 율법을 자랑할 권리도 전연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 논법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율법의 의는 완전한 행위에 있습니다.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실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오는 의는 없다는 것입니다.


14항.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판단으로 검토되도록 신자들이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대담하게 제시하며, 그것을 근거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귀절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런 귀절들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시7:8),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시17:1),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흠을 찾지 못하셨으니”(시17:3),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시18:20,21,23), 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시26:1),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26:4), 또,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26:9),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시26:10-11) 등입니다.


  나는 위에서 성도들이 행위에서 얻는 듯한 확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인용한 증거들을 그 전후 관계에 따라서, 또는 보통 말하듯이 경우에 따라서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후 관계는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완전히 조사해서 생활 전체의 성격에 따라 정죄 또는 무죄 언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특수 문제에 대한 판정을 원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서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악한 자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의를 주장합니다.


  우선,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이 문제인 때에는, 어떤 특수한 일에서 그의 입장이 올바를 뿐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일종의 의의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을 인정해 달라고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하면서도, 자기가 모든 점에서 죄가 없고 허물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에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두지만, 하나님이 불공평한 박해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복수하시는 것을 믿고, 결백한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제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반대자들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엄격한 검토에서 하나님 자신의 순결에 해당할 만한 결백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반대자들의 악의와 부정직과 간계와 사악에 비교할 때에, 자기가 성실하며 정직하며 단순하며 순결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기뻐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기와 원수 사이를 심판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라고 말했을 때에 (삼상26:23), 그는 여호와께서 각 사람을 그 공로에 따라 검토하시고 상벌을 가하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울의 악한 것과 비교해서 자기가 얼마나 결백한가를 하나님께 언명한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한 것을 자랑하며 이 일에 대해서 양심의 증거가 있다고 할 때에(고후1:12,행23:1 참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랑을 의지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의 중상에 못이겨 악인들의 악평에 대항해서 자기의 성실과 정직을 변호하며, 자기의 입장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지만, 이것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전4: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흐린 시력을 훨씬 초월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위선에 비교해서, 하나님을 증인과 심판자로 모시고 자기의 결백을 변호하지만, 하나님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이구동성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 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라고 부르짖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불신하고 기꺼이 노래합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63:3).


15항. 신자들은 완전한가

  위에 인용한 귀절들과 같은 다른 귀절들도 있으므로, 그것을 기초로 자기의 주장을 세울 수도 있겠습니다. 솔로몬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합니다(잠20:7). 마찬가지로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라고 합니다(겔18:9,21,33:15 참조).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으면 나오십시오. 나올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서는 완전한 생활이 - 비록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 영생을 향해서 일보 전진하는 것임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받아들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 행위의 공과를 검토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안아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스콜라 학자들이, 행위는 “받아 주시는 은혜”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을 이런 뜻으로 해석합니다. 율법의 언약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행위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가치로 승격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행위는 자체의 오점과 다른 범행으로 더럽혀지기 때문에, 주께서 이 두 가지를 다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즉 사람에게 값없이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또 여기서 사도가 신자들의 완전성을 원하므로 신자들이 주의 날에(고전1:8,살전3:13,5:23 참조)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골1:22,엡1:4 참조)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기 적절한 충격을 줍니다. 과거에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추종자들은 현세에서의 의의 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도의 이 말씀들을 힘차게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을 따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간단히 대답하겠습니다. 신자는 모두 이 목표를 향해서 노력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날, 흠이나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골1:22 참조). 그러나 현세에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도 진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완전히 결합될 때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에게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는 “우리가 성도들의 덕을 완전하다고 할 때에, 이 완전성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제18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귀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1-4항)

1항. “행한대로 갚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마16:27) 하는 말씀들을 고찰하겠습니다. 같은 종류의 귀절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2:9,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25:34-35). 여기에 첨가할 것은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수라고 하는 발언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손의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잠12:14와 사3:11의 융합),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13: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5:12),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6:23),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롬2:6) 하는 말씀은 설명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는 이 표현이 원인보다 일의 순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완성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써만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 소유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빌2:12)한 말은 적절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선행에 몸을 바치는 동시에 영생을 명상합니다. 이 말씀과 같은 다른 귀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요6:27 참조). 그러나 곧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됩니다(요6:27). 이것을 보면 “일한다”는 말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것입니까? 신자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주 예수님의 날까지 그것을 또한 완성하실 것입니다(빌1:6). 그러나 이 일이 완성되는 것은 그들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늘 아버지와 같이 되며, 참으로 자녀답게 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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