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24)_프린트물_2024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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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4-02 22:46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4)
[ 제3권 제18장 2항 – 제18장 6항 ]
성경본문: 디모데후서 4:8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8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2항. 보상은 “기업”이다
“보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천국이 종이 받는 삯이 아니고 자녀들이 받는 기업이라는(엡1:18) 것을 충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만이 이 기업을 향유할 수 있으며(갈4:7 참조), 그렇게 되는 데는 양자로 삼으신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엡1:5-6 참조).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4:30).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시는 귀절에서도, 그것을 명백하게 “기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것이 다른 원천에서 온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행위를 열거하시고 그것을 실행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으로 갚으시며, 하늘을 차지하라고 부르십니다(마25:35-37).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상속권에 의해서 차지해야 한다고 첨부하십니다(마25:34). 바울은 노예들에게 충실히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을 대망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보상을 “유업의 상”이라고 합니다(골3:24).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규정된 용어로써 영원한 복락을 행위의 결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데 돌려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행위를 동시에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있는 예를 하나만 들면 이 문제는 밝혀집니다. 이삭이 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손은 번성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창15:5,17:1이하,18:18 참조). 여러 해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명령을 받은 대로 아들을 제단에 바칠 채비를 했습니다(창22:3). 이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22:16-18). 우리가 여기서 듣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았습니까? 그 명령을 받기 전에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까? 신자들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고려되기 전에 주께서 주신 그 은혜 즉, 하나님 자신의 자비 이외에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없는 때에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셨다고 우리가 여기서 밝히는 점에는 모호한 데가 조금도 없습니다.
3. 은혜로서의 보상
그러나 행위가 있기 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이거나 희롱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하신 것들을 주실 것 혹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명상하고, 우리에게 제시된 복된 소망을 하늘에서 얻으려고 행위를 통해서 노력하도록, 주께서는 선행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열매가 성숙하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우리의 행위에 그 결실의 공을 돌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사도는,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사랑의 의무를 열심히 이행했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 때문이었으며, 그 소망은 복음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두 가지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골1:4-5). 그들이 복음에서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 소망을 지탱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뿐이라고 언급합니다. 베드로의 발언도 이와 일치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때”가 오면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1:5). 바울은 그들이 이 때문에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일평생 달음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주께서는 그가 약속하시는 보상을 우리가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집주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그들을 포도원에 보내서 일을 시킵니다. 제 일시(오전7시)에도 보내고, 제이시, 제삼시(오전9시)에도 보내고, 심지어 제십일시(오후5시)에도 보냅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었을 때 모두에게 같은 삯을 줍니다(마20:1이하), 이방인들을 부르심(The Call of the Gentiles)이라는 고대 저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쓴 것이라고 하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이 비유를 간단하고도 바르게 해석했으므로 나 자신의 말보다 그의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그의 은혜는 하나뿐이지만, 부르심은 각양 각색임을 밝히 보이신다...제십일시에 포도원에 갔어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꼭같은 보수를 받게 된 사람들은 분명히...날이 저물 때에, 즉 일생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한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탁월성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별도로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많이 수고했으나 늦게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처사를 보고 자기들이 받는 것은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즉,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귀절들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인애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포용하실 때 이루어지는 복된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신 복을 소유하는 것 또는 그것을 소위 “즐기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고(막10:30) 또 다른 곳에서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34).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있을 때에 양자되는 일이 나타날 것을 “양자됨”이라고 부르고(롬8:18이하), 그 후에 그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해석합니다(롬8:23).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영원한 사망인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이 일은 다만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행위에 대한 보상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라고 하는(벧전1:9) 베드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4.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당연히 보상을 받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쓰여진 바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이유가 전연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경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대에서 힘을 얻으며 이런 위로로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즉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약한 우리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도움을 얻습니다.
우선 우리는 각각 자기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초보로 가르치는 첫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의 훈련으로 일평생 그들을 연단시키시며, 그들이 현세의 유익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십니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절망에 부닥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합니다(고전15:19). 주께서는 큰 고난 가운데도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머리를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으라고 하십니다. 주께서는 이 복을 “상”, “보수” 또는 “보상”이라고 부르십니다(마5:12,6:1이하).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불행과 고난과 중상과 그 밖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선례를 따라(고후6:13) 영생을 일종의 “보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영생에서 자신의 백성을 노고로부터 안식으로, 박해로부터 번영하며 즐거운 상태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 빈곤으로부터 부요로,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그들이 당한 모든 재앙을 변화시켜 더욱 큰 복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롬8:30).
다만 우리는 공로와 보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궤변가들은 우리가 밝힌 목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관련성을 고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은 다소의 위로로 육의 약함을 도우시려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허영으로 교만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보상에서 행위의 공로를 결론짓거나, 행위와 보상을 서로 비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 견해에 대한 반대론들에 대답함, 5-10항)
5항.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할 때(딤후4:8),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대답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면류관을 상으로 주셨을까?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 미리 부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당연히 받을 상으로서 주어질 것인가?” 또 나는 다른 말을 첨가합니다. 주의 자비가 우리의 행위에 있는 모든 불의를 덮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는 우리의 행위에 의를 전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에서 벌을 받아야 할 점을 일소해 버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늘 영생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영생이 행위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교만을 더욱 꺾는 동시에 우리의 용기를 돋웁니다. 그 외에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들 행위가 추악한 찌끼로 더럽혀져 있어서 주의 심판의 표준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는 다만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보니파키우스에게 보낸 세번째 책에서 하는 말을 보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두 사람을 비교합니다. 한 사람은 경탄하리만큼 거룩하며 완전한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정직하게 살며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가졌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점이 많습니다. 끝에 가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물론 도덕 생활에서 처음 사람보다 못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이 있다. 그는 그 믿음에 따라 살면서,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을 책하며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치욕은 자기에게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선행에 대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가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행위가 없으면 믿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지만,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기 때문에(갈5:6참조) 버림받은 믿음이 아니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합2:4) 그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도 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선행같이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는 여기서 우리가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 즉 선행의 의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승인하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합니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다음에 있는 귀절들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뜻이 비슷합니다.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16: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여기서 선행은 우리가 복된 영생에서 즐길 재물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나는, 성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대답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마6: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 사람들이 현세에서 즐길 물건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현세의 생명은 곧 꿈같이 사라질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참으로 누리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곳으로 즉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거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미리 보내고, 일시 불편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데 그것은 오래 살 곳으로 재산을 많이 보낼수록 더 기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늘이 고국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재산을 여기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겨지게 되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 그리로 미리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전할 것입니까? 그 방법은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는 모두 자신에게 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마25:40 참조). 여기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잠19:17)라는 유명한 약속이 나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9:6).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주의 손에 저축되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보관인이신 주께서는 때가 오면 많은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무는 우리를 위해 주의 손에 감추어 두는 재산이라고 할이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 일은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또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므로 누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에서부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비약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오류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 증거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증거들에서 바르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행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실 가치도 없는 우리의 봉사가 그 어느 하나라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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