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09)_프린트물_2023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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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9-18 23:55본문
기독교강요강해(109)
[ 제3권 제11장 11항 – 제11장 13항 ]
성경본문: 빌립보서 3:8-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1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11항.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오시안더 사상의 둘째 단계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의롭다고 하는 데는 더 많은 해독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총명하고 경건한 독자들이 이 사상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다지 유해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냉담하며 내용이 빈약하며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구름 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요한 기도 즉 속죄를 믿고 은혜를 받아들여,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중 의라는 것을 구실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불경건입니다.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와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입니다. 그는 또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5:19)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귀절에서 칭의가 송사와 대립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조법을 보더라도 이 표현이 법적인 용어에서 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이 말의 근원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따라서 그 경향과 뜻이 여기서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시32:1,롬4:7) 행위가 없이 받는 의를 묘사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정의인지 또는 불완전한 정의인지를 오시안더는 내게 대답해 보십시오. 바울이 예언자를 인용한 것은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지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의 전체를 포함시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며, 그 죄과를 그 앞으로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바울이 판단하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원래의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시안더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6:4 참조) 매우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부분적인 의만으로는 우리의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동요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방해하여 평화와 평온과 영적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그런 주장은 패악한 것이며 완전히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대 명제를 써서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갈3:18),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추론합니다(롬4:14). 행위에 중점을 두는 믿음은 흔들립니다. 이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행위에서는 의지할 것을 전연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칭의와 중생을 오시안더는 “이중의 의”라는 말로 혼동하지만, 바울은 명백하게 구별합니다. 그는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해서 자기가 받은 바른 성품,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비통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한 의에서 피난처를 구하며, 거기서 생명과 사망과 비난과 기아와 전쟁과 기타 고난을 영광스럽게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8:33).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롬8:38-3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랑할 확신이 감해지지 않으며, 그가 조금 전에 자기의 처지라고 통탄해 하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 차이는 불의의 짐에 눌려 신음하지만 동시에 승리의 확신을 품고 모든 공포심을 극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또 익숙히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항변을 와해시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 “이중의 의”를 털옷같이 입히지만, 역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본래의 의가 없는 자들이 세상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일정한 비례에 따라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인간적인 의 대신에 거저 주시는 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한 근씩입니까 또는 한 푼씩입니까? 물론 그는 확신이 없을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좌우로 흔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
최고의 심판자가 값없이 사면하실 때에 그를 정죄하며,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고 하시는 말씀이 그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한 행위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견제하신 모세의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용서하시지 말아 달라고 한 뜻이 아니라, 백성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책하지 말고 모두 한결같이 사면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자기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의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2항. 오시안더를 논박함
오시안더가 독자들에게서 숨기고 싶지 않다고 장담하는 그 신비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목하도록 경고합니다. 우선 그는 장황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데 (그의 말을 쓴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의는 중보자로서의 위격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의로써 그의 밧줄을 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논쟁 방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지만(고전1:30), 이것은 영원한 말씀에만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의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참으로 그의 영원한 지혜였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이름을 그에게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골2:3).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것을(요17:5 참조)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관습에 적용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잘 부합합니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도 빛은 암흑에 비취었으나(요1:5),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리고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기까지는(요8:12), 그 빛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또 오시안더는 미련하게도 의롭다하는 능력은 어느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천사와 인간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반격합니다. 천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보속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인간인 그리스도께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율법에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갈3:13,4:4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의 신성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심히 비열한 비난을 가합니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중 한 가지 성은 버리고 더욱이 두 하나님을 만든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애려고(히2:14 참조)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영광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를 밝힐 뿐입니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는 가증한 오류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와 권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 - 즉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합니다. 나는 그가 무분별하고 상식을 벗어나서 성경 귀절들을 무수히 인용하여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며, 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본질적 의”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무시하겠습니다. 예컨대 다윗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의에 호소할 때에 백 번 이상 호소하지만 오시안더는 번번이 서슴지 않고 그 뜻을 곡해합니다.
그가 제기하는 다른 반대도 더 강력한 것이 못 됩니다. 그는 우리를 바르게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며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키며 일을 행하게”(빌2:13 참조) 하신다고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개조하셔서 우리 생활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째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손을 통해서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성령의 모든 충만하심을 맡기셔서, 그의 풍성함에서 지체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십니다. 다음에, 비록 의는 그의 신성의 은밀한 원천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요17:19)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우셨으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 그를 밀어주시지 않았다면,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시안더가 첨부하는 내용도 이에 못지않게 불합리합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오시안더 자신과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인 그의 공상에 아무것도 더 첨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의 원천이며 시초이시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로우며,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이런 추론을 누가 누구에게 허락합니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다”고 합니다(사59: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무장을 빼앗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속자가 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까? 예언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 이외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시지 않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무 도움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뜻을 간단하게 다른 말로 바꿔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합니다(롬3:25), 그러나 이 말이 그가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롬5:19)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가련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에 전적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희롱으로 그리스도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자입니다(막15:17).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항)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합니다. 우선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한 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넘어져야 할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로 합시다. 사도는 “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8-9)고 합니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멸망한 원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자랑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롬3:27). 여기서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자랑을 없애버린다면, 행위에 의한 의를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4장에서 불평이나 구실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2).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음에 바울은 반대 개념을 써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삶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4:4)라고, 다른 논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은혜로서 주시는 의는 믿음에 따라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의 공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 이런 의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는 작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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