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10)_프린트물_2023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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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0-02 22:34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0)
[ 제3권 제11장 14항 – 제11장 19항 ]
성경본문: 로마서 3:28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1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14항.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성경의 뜻을 곡해하며 무의미한 트집잡기를 오락으로 삼는 이 궤변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묘한 핑계를 발견했다고 자부합니다다. 그들은 “행위”의 뜻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 자기의 자유 의지의 노력으로 율법적인 문자에 따라서만 하는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의를 가로채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가 미련하다는 것을 설복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도입하는 이 대조에서는 어떤 명칭이 그 행위들을 미화하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배제됩니다(갈3:11-12).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의한 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라는 것입니다(롬10:5,9).
그뿐 아니라, 후에 적당한 곳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의롭다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고 -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 한 바울의 말은 문자적이며 또는 외적인 유덕한 모양이나 자유 의지의 노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5항.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조작품을 유치하게 혼합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에 못지 않게 패악한 사상을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감염시킵니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데도 그들은 영과 은혜라는 가면으로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의롭게 될 만한 특별히 유익한 행위가 없으므로 행위로써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교황주의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속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확신이 믿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 없이 의를 전가해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한 말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유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저술을 보면, “은혜”라는 말을 쓸 때에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 두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다하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극을 받아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합니다. 둘째로, 이 사랑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는 데 사용하는 죄가 소멸되어,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롬바르드가 칭의 안에서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으로 인도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멀리서 따라갈 뿐이며, 바르게 본받지 않고 상당히 어긋난 쪽으로 가기까지 합니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롬바르드는 모호하게 만들며 어거스틴의 생각이 다소 오염된 때에 롬바르드는 아주 썩게 만듭니다. 스콜라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적어도 그의 표현 방법을 -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의를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온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지만, 여전히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며,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16항.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해서 이와는 훨씬 다르게 가르칩니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합니다. 참으로 칭의의 순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 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무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실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으십니다.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하나씩 숙고한다면, 우리가 표명한 의견이 분명히 설명될 것입니다. 여기서 논술한 순서보다 더 좋은 순서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여러 가지 점이 서로 부합하여 우리가 전체 사항을 바르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배열 순서는 문제가 아닙니다.
17항.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믿음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위에서 확립한 것을 여기서 회상해야 합니다. 복음에서 제시되는 의를 믿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가 제시된다고 하므로 행위에 대한 고려는 일체 배제됩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귀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10:5)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율법은 행위에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귀절이며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는 율법의 모든 조항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많은 곤란에서 구출해 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약속과 율법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빈번히 대립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갈3:18). 같은 장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귀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율법에도 그 자체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비교가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면, 복음의 약속에도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약속은 값 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은 것입니다 - 이것이 그 차이점이 아닙니까? 사람이 자기의 힘과 자유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주책 없이 의를 자랑할 때에, 그런 의만이 배척되는 것이라고 하여 나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롬8:3 참조). 보통 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율법의 극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런 사랑을 품게 만들 때에 왜 그것이 우리의 의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성자들도 사랑이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상을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18항.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귀절은 이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3:11-12,합2:4 참조). 행위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믿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관계를 보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은 복음이 말해주는 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롬4:2-3)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장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보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의가 성립된다고 부언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삶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참으로 그가 여기서 쓰는 말들의 뜻은 이 귀절에도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받으며, 이 일은 은혜로써 오는 것이라고 부언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유업은 거저 받는 것이라고 추론합니다(롬4:16 참조). 믿음이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바울의 추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다른 귀절에서도 확실히 같은 의미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롬3:21). 그는 율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행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나 행함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19항. “믿음만으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롬3:28)하는 우리의 교리에 대해서, 궤변가들이 잡는 트집이 어느 정도로 공정한가를 독자는 이제 알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 교리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4:2 이하) 주장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거저 주는 선물과 행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습니까? 바울이 다른 귀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롬1:17)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 수단으로 회피할 것입니까?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구실 - 분명히 어리석은 구실을 만들어서 이 “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합니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에 열거하는 말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1),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3:28).
여기서 그들은 교묘한 궤변을 씁니다.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오리겐과 기타 고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미련한 구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배제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지껄입니다. 끊임없는 언쟁으로 그 방면에 능숙하게 된 그들은 논리의 초보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도가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귀절들을 인용할 때에 정신 없이 지껄인 것입니까?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3:12,레18:5), 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0,신27:26).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의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거나, 의식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만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귀절들이 도덕적인 면의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의롭다하는 권한에서 도덕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논법을 씁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으므로(롬3:20), 의는 생기지 않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하므로(롬4:15),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양심에 확신을 주지 못하므로 의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행함 없이 얻는 것입니다(롬4:4-5).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므로 우리의 자랑은 제거되었습니다(롬3:27).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1-22). 그러면 이런 발언들은 의식적 행위에 적용되고 도덕적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감히 지껄일 수 있으면 지껄여 보십시오. 어린 학생들이라도 그런 철면피를 야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확실히 율법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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