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11)_프린트물_202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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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0-10 21:56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1)
[ 제3권 제11장 20항 – 제11장 23항 ]
성경본문: 사도행전 13:38-3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1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20항. “율법의 행위”
사도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라는 제한을 첨부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설명할 수 있습니다. 행위는 귀한 것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시인하시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인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행위에 대한 의를 하나님께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당연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가 의라는 이름과 보상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한 후 사백 삼십 년이 지나서 율법을 주셨다고 선언합니다(갈3:17). 무지한 자들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의로운 행위가 있을 수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 논법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와 허락이 있어야만 행위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는 행위에 의롭게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칭의의 조건을 율법의 행위에서 빼앗으려고 할 때에,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분명히 쓴 이유는 율법의 행위만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이 명백합니다.
그는 간혹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부정합니다. 예컨대 다윗의 증거를 근거로 삼아서, 행위와는 별도로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롬4:6,시32:1-2).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트집을 잡더라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저 특수한 표현을 일반적 원칙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세밀하나 어리석은 구별을 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합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으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갈5:6)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가 역설하는 일이 모두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4:4). 바울이 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 이외에는 믿음의 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항)
21항.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돌아가야 할 원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라고 잘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며, 하나님의 얼굴을 죄인에게서 돌이키시게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이질적인 일이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가르칩니다(롬5: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합니다. 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22항.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내가 이미 인용한 바울의 말은 이 두 가지 점을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증거를 인용하여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행위와는 별도로 의를 돌려주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다윗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4:6-8,시32:1-2). 분명히 다윗은 여기서 의를 말하는 대신에 복을 말합니다. 그는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므로 우리는 다른 정의를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노래합니다(눅1:77). 바울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구원의 요점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도 이 원칙을 따릅니다.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는 말로 끝맺습니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꼭같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얻는 의는 값 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바른 추론을 합니다.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23항.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신중히 고찰할 만한 점입니다.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밖에서 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의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극히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또 풍부하게 가졌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다고(롬8:3-4)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 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 그것을 얻습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 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도 꼭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 명백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이 의의 한 예로 해석한 암브로시우스의 말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의 옷 안에 숨고 향기 나는 형의 겉옷을 입은 후에(창27:27)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위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맏형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암브로시우스의의 말은 이렇습니다. “이삭이 옷의 향취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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