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12)_프린트물_202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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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0-24 21:59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2)
[ 제3권 제12장 1항 – 제12장 5항 ]
성경본문: 욥기 25:4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2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항)
1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만, 이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이 논의 전체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분명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논의는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행위의 성실성에 대해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놀랄 만큼 경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단정합니다. 사실, 행위에 의한 의를 가장 자신 있게, 가장 요란하게 떠드는 자는 현저한 병에 걸려 괴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뒤뚱거리는 인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느낀다면, 그렇게까지는 우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면 그것을 존중할 줄도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 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수도원의 회랑에 앉아서 누구든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행위 가치에 대해서 쉽게 지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거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경박한 언쟁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유희를 버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의에 관해서 유익한 탐구를 하고 싶으면,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하늘 심판자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 이것이 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자를 우리의 마음이 본래 상상하는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마음에 그려야 합니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욥3: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듭니다(욥9:5-6참조).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며(욥5:13),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며(욥25:5참조),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욥4:18참조), 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욥9:20 참조),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갑니다(신32:22,욥26:6참조).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입니까?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라고(사33:14-15)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와 보십시오.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말이 들려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 또 다른 곳에도 쓰여 있듯이 참으로 모든 사람은 곧 멸망할 것입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4:17-20).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15:15-16)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욥기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를 말합니다. 이 구별은 계속할 가치가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의 앞에서는 검사에 견딜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지만 천사들의 거룩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의를 나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합니다. 기록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우리 생활을 검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저주를 말씀하신 것에 공포와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둔감합니다. 예컨대 이런 일반적인 저주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0, 신27:26). 간단히 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2항.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는 허무한 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과만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할 것을 가졌노라고 누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때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또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관련해서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꼭같은 현상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에도 나타납니다. 가까운 물건만을 볼 때에는 눈의 식별력에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을 볼 때에는 우리의 시력은 엄청난 광채로 마비되며, 땅에 있는 물건을 볼 때에 느끼던 힘은 없어지고 무력함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 껍데기뿐인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동등하거나 또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일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우리의 야성이 길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의를 교만하게 자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의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다른 종은 조금 다른 뜻으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9:2-3)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히 듣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천 가지 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하나도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자기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고전4:4), 그는 이런 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3항.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
이런 예는 성경에 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저술가들도 모두 이것이 그들의 견해란 것을 표시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 썩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가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딤전2:5-6참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희망을 남기지 않습니다. 베르나르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나는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 세상은 위협하고, 육체는 내리누르며, 마귀는 올무를 놓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대한 죄를 지었으며 나의 양심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후에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분명히 그에게 자비가 있으면 나에게도 공로가 있다. 주의 자비가 풍성하면, 나의 공로도 꼭같이 풍부하다. 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의 의는 또한 저의 의이옵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분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고 했고 같은 뜻으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당신의 영광이 여전히 쇠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평화가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겠나이다. 또한 일체의 영광을 거부하나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한다면, 주신 것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 귀절이 있습나다. “무슨 까닭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자랑할 더욱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지 않은가?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특히 예언서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겔 36:22,32). 공로로는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입니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은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 베르나르드가 선행에 대해서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목적은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은 방자한 죄악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곧 이 점을 설명합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행복하다. 교회는 담대할 이유는 있으나 공로는 없다. 공로가 있으나, 가치 있는 공로가 되게 하려면 있는 체하지 않아야 한다.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공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자랑한다. 주의 풍성한 자비가 자랑할 까닭을 넉넉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 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4-8항)
4항.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각성한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만이 안전한 피난처이며 마음 놓고 호흡할 곳임을 깨닫습니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사람의 가장 희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이 비교는 지극히 엄격한 시험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생각까지도 드러낼 것입니다. 바울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고전4:5). 이렇게 되면 게으르게 숨어있던 양심은 이미 잊어버린 일까지도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는 지금까지 우리를 시켜 짓게 한 죄악을 모두 알므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 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때에는 당황하며 붕괴될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난 체하는 그 위선뿐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입니다. 꿈에 많은 재물을 쌓았다가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입니다.
5항.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본래 맹목적입니다. 이는 아무도 잘난 체하는 악폐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악폐가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잠21:2). 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잠16:2)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망상 때문에 무죄 방면이 됩니까? 물론되지 않습니다. 같은 귀절에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잠16:2)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십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런 아첨에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알면서 자기 기만에 빠져 멸망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검토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패악성의 비밀한 곳을 심판대의 빛으로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욥25:4, 6),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15:16).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14:4). 그 때라야 우리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욥9:20)는 욥과 같은 체험을 할 것입니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평한 말인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이란 말은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됩니다. 참으로 그는 여기서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검토의 엄격성은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할 때까지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약 4:6,잠3:3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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