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32)_프린트물_2024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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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9-10 20:35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2)
[ 제3권 제20장 12항 – 제20장 14항 ]
성경본문: 시편 5: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12항.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상의 요구 조건을 전연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고 인자하시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라는 요구 조건을 우리가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그들은 이것을 가장 불합리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믿음의 힘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상밖에 해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논의할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요구하는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심이 대단히 무딘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울이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고, 그 자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롬10:14).
그러면 예컨대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 “오 주여, 저는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으실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불안에 견딜 수 없어 당신께로 도망을 갑니다. 제게 무슨 가치가 있다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성도들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명령합니다(히4:16). 그는 다른 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가르칩니다(엡3:1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신념을 두 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 점은 주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모범으로 가르칩니다. 만일 굳건한 믿음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에서 생겨난 기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소망에 뿌리를 박은 기도,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용납됩니다. 사도는 믿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확신뿐 아니라, 담대하게 또는 자유롭게라는 말까지 첨가합니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와 불신자들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와 섞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입니다. 온 교회는 시편에 있는 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33:22). 다른 데서 예언자는 같은 조건을 설정합니다. “내가 아뢰는 날에...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56: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이런 말들을 보면, 소망을 첨가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던져진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은 망대와 같아서, 우리는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주는 충고의 순서도 여기 부합합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엡6:18) 권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엡6:16-17).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회상하기 바랍니다. 즉 믿음은 우리의 불행과 궁핍과 부정과 결합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무거운 죄의 짐에 아무리 심히 눌리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무서워할 죄과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이런 느낌이 있으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제정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굴거나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을 높이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 후에, 자녀가 곤란한 문제들을 부모 앞에 털어놓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의 죄는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도록 견딜 수 없는 아픈 자극을 줄 것입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체험으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41:4).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런 창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비할 데 없는 자비로써 이런 경우에 적합한 치료제를 첨부하셔서, 우리의 모든 혼란을 진정시키시며 근심을 덜며 공포심을 없애버리십니다. 그리고 장애물은 물론이고 평탄하지 못한 곳까지도 없이 하여 스스로 길을 준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친절히 이끄십니다.
13항.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우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의 불경한 완고함을 책망하십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보다 더 정확한 명령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 그러나 경건 생활의 의무 중에서 기도처럼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 점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십니다(마7:7). 그러나 이 명령에는 약속이 첨가되었습니다. 이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쉽게 받아주시며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을 환영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점을 확인한다면,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역자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불신하기 때문에 불신앙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위선자들의 행동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합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모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교만한 태도로 무시하며 하나님의 친절한 초대를 의심하여, 하나님께 드릴 예배의 주요 부분을 빼앗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모든 거룩한 일은 제물을 바치는 데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거절하시고(시50:7-13), 사람들이 곤란한 때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시50:15).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것을 요구하시며 정성스러운 순종을 명령하시는 때에, 의심의 깃발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도피할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항상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그 많은 명령의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 눈앞에 세운 깃발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경솔한 짓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13: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따라오기를 원하시며 그가 친히 명령하시는 아름다운 곡조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미입니다. 우리는 이 찬미의 내용을 믿고 모든 장애를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1-2). 하나님께서 이런 찬미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찬미는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것이 그의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언자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시50:15)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에 따라서 다윗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7:27). 이 말을 보아서 우리는 이 약속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워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라는(시145:19) 일반론으로 무장합니다. 사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계속되던 기도의 문맥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혹은 그의 선하심으로, 혹은 그의 신실한 약속으로 그 기도의 문맥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른 보기에 다윗이 이런 말들을 부적당한 곳에 삽입시켜 기도의 흐름을 절단하며 기형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새로운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열성이 식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명상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시들어 가는 우리의 정신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도록 적당한 것을 삽입하며,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14항.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무서워 떨 것은 아니나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심히 감미로운 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전혀 느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매기를 좋아하며,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 없는 웅덩이를 파며(렘2:13),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잠18:10) 솔로몬은 말합니다. 요엘은 장차 올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다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롬10:13)라는 인상적인 말을 첨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행2:21). 백 명에서 한 명도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사65:24)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다른 데서 하나님은 꼭 같은 영예를 전교회에,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 주십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시91:15).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나는 모든 귀절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두드러진 것들을 택하려 합니다. 이 귀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예리한 자극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며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배은 망덕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사야와 요엘에서 인용한 말씀과 같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확약하시며,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을(벧전5:7,시 55:22)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무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이 약속의 특별한 열매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게 될 것이지만, 이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가장 다정스러운 이름을 황송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사하십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권유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기도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기도의 가치와 기도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었고 또 그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다른 데서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리저리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저 거룩한 조상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거룩하였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으나, 우리에게는 거룩한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기도하라는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점에서 당연히 그들의 동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며 친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극도로 가련한 사람에게도 구한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 일반적인 표현 양식에 유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이므로(세상에서 말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조건은 하나뿐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성실하며,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지 않고, 겸손하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위선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오도록 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윗의 기도 태도도 이로 인한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삼하7:27-29). 또 다른 데서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시119:76).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무장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두려워하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상들을, 특히 야곱을 본받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감당할 자가 못 된다고 고백한 다음에(창3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더 큰 일을 구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창32:11-12참조).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실이 무엇이든간에, 곤란한 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영예를 빼앗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경건한 사람들을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동안은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순종 이상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담대한 기도 정신은 공포, 경외, 염려 등과 잘 조화되며, 엎드린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조화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이 서로 훌륭하게 부합됩니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합니다(렘42:9,단9:18). 다른 곳에서도 예레미야는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렘42: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주 “기도를 올린다”고 하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자의 중보 기도를 청하면서 한 말도 같은 것입니다(왕하19:4).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향과 같이” 올라가기를 갈망합니다(시141:2).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그가 너그럽게 약속하신 도움을 서슴지 않고 간구하지만 수치감을 버린 듯이 경솔한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약속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에, 여전히 자기를 낮추어 기원자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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