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08)_프린트물_2023년 9월 13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9-13 03:25본문
기독교강요강해(108)
[ 제3권 제11장 6항 – 제11장 10항 ]
성경본문: 로마서 4:4-5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1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6항.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
가령 그가 한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에, 본질의 결합에 의해서 그는 우리 것이 되시며 그것은 그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신성의 본질이 우리 안에 주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상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진미를 먹어도 해가 덜했을 것이며, 이 망상으로 인한 큰 싸움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합니다. 그는 이 논쟁 전체를 통해서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 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첫째 점을 -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은 용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중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하신 후에, 그들의 악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들을 본성대로 버려두시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동시에 양자의 영을 주셔서(롬8:15), 이 영의 힘으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개조하십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의 빛이 지구를 덥게 하고 태양의 열이 지구를 비춘다고 합니까? 목전의 문제에 대해서 이 비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습니까? 태양은 그 열에 의해서 땅에 생명과 열매를 주며, 그 광선에 의해서 땅을 비추며 밝게 한다. 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의 특성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은 이성이 금합니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혼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값 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합니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고전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구원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출발점으로 삼아 - 우리는 거룩하며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논할 때,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합니다.
성경에 관해서 오시안더는 성경 귀절을 인용할 때마다 그릇된 해석을 합니다. “일하는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바울의 언명에 대해서(롬4:4-5), 그는 “의롭다함”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꼭 같이 경솔하게 그는 로마서 4장 전장을 곡해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인용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롬8:33) 그는 동일한 속임수로 변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귀절에서는 단순히 죄책과 무죄 방면이 문제가 된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 대조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변론에 있어서나 성경을 인용하는 데 있어서 오시안더는 자기 자신이 무능한 해석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의”라는 말에 대한 그의 논의도 이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덕에서 뛰어나게 된 후였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는 두 개의 건전한 발언에서 출발하여,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의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과정 전체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었고 장기간 그것들을 견지함으로써 더욱 선을 쌓았지만, 여기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능숙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 사실에서 칭의에는 행위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7항.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힘이 없고 그 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 오시안더는 항변합니다. 나도 이 항의를 기꺼이 인정합니다. 만일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다한다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하는 일을 부분적으로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다하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에게 옮깁니다. 우리는 믿음을 일종의 그릇에 비교합니다.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의롭다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 궤변가가 “믿음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그 왜곡된 비유를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질그릇을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자체는 가치나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가득한 질그릇이 부자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은 의를 받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이자 분배자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우리는 칭의를 고려할 때에 “믿음”이란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였습니다.
8항.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외면적인 말씀의 작용으로 내면적인 말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우리를 제사장이며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내어 그의 외면적인 신성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할하지 않고 그 육신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중보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신성에 관해서 옳게 적용된 것이라면, 특히 그리스도께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한쪽의 의가 다른 쪽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과(고전1:30) 어떻게 조화됩니까? 이것은 중보로서의 위격의 특이한 점입니다. 이 위격에는 신성이 내포되지만 고유한 명칭에 의해 중보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됩니다.
오시안더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 하나를(렘 51:10, 23:6, 33:16 참조) 어리석게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라는(딤전3:16 참조) 사실밖에는 추론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말을(행20:28) 인용했습니다. 이 말에서 죄를 대속한 피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누가 이런 추악한 오류를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안더는 이 대단히 유치한 항변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의기 양양해서 기뻐 날뛰며, 여러 장에 호언장담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은 곧 간단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다윗의 후손이 되실 때에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사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사53:11)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는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그가 의롭게 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서 아들이 의롭다는 것을 부언하신 사실과 가르침 안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시는 그 방법과 수단을 두셨다는 것에 유의합시다. 여기에 있는 “다아트”[히브리어]라는 말은 피동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2:7)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에 따라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만 우리는 의롭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그의 의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적 낮은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9항. 칭의는 중보가 하시는 일
만일 오시안더가 이 사역은 그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신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첫번째 반박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둘째 반박에 관해서는 그가 큰 망상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희생으로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죄책을 사면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제사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의 힘으로는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입니다(롬5:19 참조). 그러나 그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지 않고(빌2:7) 어떤 다른 방법으로 복종하셨겠습니까?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말로서 바울은 의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육신에만 둡니다. 그런데 나는 오시안더가 바울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유령 같은 “본질적 의”를 확인하시는 듯이 개선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은 뜻이 훨씬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이 시인하시는 의라는 뜻이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도 다 아는 일이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요12:43, 5:44).간혹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의의 근원이며,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도 나는 압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이 표현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오시안더가 우리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의와 구원에 인을 치시고자 하셨을 때에, 자신의 육신으로 확실한 보증을 삼으셨습니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고(요6:48),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부언하셨습니다(요6:55). 이런 교수 방법은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 성례전은 우리의 믿음을 부분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와 구원의 두 가지가 그의 육신에 내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하며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중보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서 열려 있는 샘이라고 말합니다. 깊고 은밀한 샘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이 샘에서 길어내며 또 중보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로 나옵니다. 이런 방법으로 또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제시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들을 오시안더가 수락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이 일은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나누게 하시는 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10항.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오시안더의 트집에 속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이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믿음을 의로 생각한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중상을 반박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비우고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만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빼앗는 것같이, 그는 우리를 중상합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유대를 멸시하는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여 큰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광적인 오류 즉 “본질적 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쯔빙글리파”라고 불러 그의 악의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본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교만하고 자신의 기만에 걸린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공경해야 할 세계적 학자들까지도 공격합니다. 나는 나 개인의 문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공격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변호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와 본질적 내주를 열광적으로 고집하는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릅니다. 우선, 그가 성만찬에서 몸을 먹는다고 공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일종의 조잡한 혼합물로서, 우리 속에 자신을 주입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불어보내어, 우리가 그와 함께 참으로 의롭게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 또는 거룩이나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증명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허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릇되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 뜻을 왜곡하여 하늘의 삶을 현세의 상태로 바꿔버립니다.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너희로…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라고 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이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3:2) 나는 한 작은 예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 무가치한 일들을 무시합니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첨부파일
- 기독교강요강해108-제3권제11장6항-제11장10항.hwp (67.0K) 119회 다운로드 | DATE :2023-09-13 03:28:06
- 기독교강요강해108-제3권제11장6항-제11장10항.pdf (384.0K) 55회 다운로드 | DATE :2023-09-13 03:2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