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28)_프린트물_2024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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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7-17 05:50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8)
[ 제3권 제19장 12항 – 제19장 16항 ]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19-2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12항.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며 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우리가 누구를 약한 자로 보며 누구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냐 하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구별을 제한다면, 걸림을 주는 문제에 관해서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자유는 항상 큰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걸림의 대가로 치뤄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바울은 교훈과 실천으로 가장 분명한 정의를 내렸다고 나는 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행16:3). 그러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습니다(갈 2:3). 그가 한 행동은 다르나 목적은 같습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19-20),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를 적당히 제한할 수 있습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한 까닭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2:3-5).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약한 형제들의 양심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같이 자신도 자유를 포기하는 지혜를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결코 그 지혜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평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체 자유를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웃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혹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만큼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일에 대한 자유의 권한을 그에게 주신 목적은, 그가 모든 사랑을 실천하는 데 더욱 예민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3항.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걸리게 함을 피하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중간적인 무해무익한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꼭 해야 할 일들을 걸리게 함이 무서워서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랑 자체는 믿음을 순전히 지키면서 그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랑을 - 제단에 이르기까지라도(마5:23-24 참조) - 고려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즉,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노엽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소동을 일으키며, 무슨 문제든지 조용하게 처리하지 않고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무절제를 우리는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온갖 악한 일의 괴수 노릇을 하던 자들이 이웃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고전8:9참조) 행동하겠노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런 말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이웃들의 양심을 악으로 인도했으며, 특히 그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진흙탕에 박혀 있어 빠져나올 희망이 없습니다. 또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젖을 먹여야 된다고 상냥한 태도로 말하면서, 사실은 이웃을 그들의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생각 속에 빠지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젖으로 먹였노라고 합니다(고전3:2). 그러나 만일 그 때에 교황주의자의 미사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면, 바울은 젖을 주기 위해서 희생을 드렸을 것입니까?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젖은 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꾀어서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허위를 일시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 그런 젖을 자녀들에게 먹일 것입니까? 자녀들이 경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면 훌륭한 젖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들을 더 날카롭게 공격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진부한 주장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으며, 건전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당연한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둘째로, 나는 이미 특수 논문들에서 충분히 증명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독자들이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사탄과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우리는 굳세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위험이 앞에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인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불가하다는 사실입니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 14-16항)
14항. 인간의 모든 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우리가 이미 서술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양심이 이제 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즉,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문제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관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큰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도 그 받은 유익을 빼앗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으로 얻어 주신 것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가 금이나 은이 아닌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벧전1:18-19). 바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람에게 예속시킨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갈2:21 참조). 갈라디아서의 몇몇 장에서는,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되며 심지어 말살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 얽매인다면(갈5:1,4 참조),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알아야 할 중요 문제이므로 더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한 것을 폐지하는 문제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말이 나면, 마치 인간의 모든 복종이 동시에 제거되고 타도되는 듯이, 한편에서는 선동적인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중상자들이 즉시 큰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15. 두 개의 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우선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웁니다. 보통 이 두 방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관할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적당한 명칭은 아닙니다. 첫번째 종류의 통치는 그 뜻이 영혼의 생활에 속한 것이요, 둘째 것은 현세 생활에 관한 것 즉 의식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게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관한 통치입니다. 전자는 마음 속에 있고, 후자는 외면적인 행동을 규제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나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나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별한 것과 같이,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한 쪽을 고찰할 때에는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으며, 두 세계가 각각 다른 임금과 다른 법률의 권위 하에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 질서에 잘못 적용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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