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26)_프린트물_2024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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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6-11 12:31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6)
[ 제3권 제19장 1항 – 제19장 6항 ]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5:1-4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분중에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 1-3항)
1항. 자유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신자의 자유를 논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제목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모르고는 양심은 거의 아무 일도 확신 있게 시도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일에 주저하고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낍니다.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며,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교리에서 오는 비길 데 없는 유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하고 루키아노스(Lukianos)적인 인간 즉 비꼬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교묘한 말로 희롱합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취한 자들이어서, 어떤 파렴치한 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앞에서 몇 번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일이 있으나, 자세한 논의는 지금까지 미룬 것이 유익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방자한 인간들에게 제때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자마자 정욕이 끌어오르거나 큰 소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버려두면 가장 선한 일까지도 가장 사악하게 더럽힙니다. 어떤 자는 이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 없는 방탕 생활에 뛰어듭니다. 또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혼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기독교적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이런 위험 사태의 원인을 일소할 것입니까?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리의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보통 제기되는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2항.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자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리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즉, 행위를 전연 계산하지 않아야 합니다. 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행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의 분량이나 한도를 측정할 수 없고, 율법 전체에 대한 채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논의할 때 율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에 확신을 얻고 싶으면 율법을 일체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다르므로, 우리는 바르게 또 양심적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살전4:7,엡1:4,살전4:3참조). 이 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 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갈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며 어떤 확신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양심이 고민할 때에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완전성이 전연 미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서 제시해야 합니다.
3항.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논증은 거의 전부가 이 점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의식에서 해방되는 자유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석가들입니다. 그들이 인용하는 귀절들이 이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1-4). 이 귀절들에는 확실히 의식에서 풀리는 자유보다 더 고상한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의식을 논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폐지된 율법의 옛 그림자를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거짓 사도들과 논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 전체의 근본이 되는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저 유대교적인 그림자가 복음의 명료성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모세의 의식에서 예시된 일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나타났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다음에, 이 순종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는 극히 사악한 관념을 저사기꾼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불어넣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강경한 태도로, 신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더군다나 저 무가치하고 유치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것과(갈4:5),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당연히 우리가 논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고 다짐하여, 그들이 불필요한 일에 의무를 느끼지 않도록 합니다.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항)
4항. 율법의 강요에서 해방되는 것이 신자들의 진정한 순종을 확립한다
첫째에 의존하는 둘째 부분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지배 하에서는 양심은 항상 전전 긍긍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순종할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뜻을 곧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신6: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며,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합니다. 주의 길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전진한 사람도 이 목표로부터는 아직 멉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지한 애정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많은 부분에는 육적인 욕망이 차 있어서 그들을 끌어당기며, 하나님을 향한 급속한 전진을 방해합니다. 그들이 분투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나, 육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완수하는 것같이 어려운 일이 없다고 느끼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옳을 것입니까? 그들은 의욕과 열망이 있으며 노력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도 요구되는 완전성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해보아도 또 하려고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뿐입니다. 만일 누가 생각하기를, 그의 행위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있는 선한 점을 받아주시리라고 한다면, 이런 결론은 그를 속일 뿐이요 아무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엄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든 불완전을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선하다는 판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 바로 이 이유 때문에 - 율법에 대한 위반이란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5항. 강요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표준으로 측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저주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가련한 영혼들은 어떻게 진지하게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율법의 이 엄격한 요구에서 아니, 율법의 전체적인 준엄성에서 해방되며, 아버지같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그들은 쾌활하게 또 열렬하게 응답하며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것입니다. 요약하면, 율법의 멍에에 매인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매일 일정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종과 같습니다. 종들은 명령받은 일을 정확하게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느끼며 주인 앞에 감히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너그럽고 솔직한 대우를 받는 아들들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일까지도 아버지 앞에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순종한 행위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가 아무리 사소하며 졸렬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을 확약하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 여기에서 “섬긴다”는 말이 사용되는 한편, “아낀다”는 말은 분명히 “관대하다, 또는 인자하게 허물을 묵인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이 확약이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애쓰는 일은 모두 무익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므로 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그에게 대한 공경을 표시한다고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해서 불경이 되는지 또는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를 모르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6항. 은혜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또 히브리서 기자가 거룩한 조상들이 행했다고 기록한 모든 선행을 믿음에 돌리며, 믿음만으로 그 행위들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히11:2이하). 로마서에는 이 자유에 대해서 유명한 귀절이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롬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전개합니다(롬6:12,14). 그는 그 앞에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죽을 몸에” 대해서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며(롬6:12),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충고했습니다(롬6:13).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들이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다고 항의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이 자유의 위안을 첨가합니다. 그가 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들은 아직 죄가 근절됐다든지 또는 의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는 듯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의 목적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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