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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4)_프린트물_2023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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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1-2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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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4)

[ 제3권 제13장 5항 – 제14장 5항 ]


       성경본문: 히브리서 11:6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3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5항.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나는 왜 비교적 모호한 증거를 사용합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롬5:1)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에 평화와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시종여일한 주장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 확신의 근원을 밝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는 때라고 합니다(롬5: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귀절에서 모든 신자를 대표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습니다(롬8:35,39의 융합). 저 피난처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지만, 주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면 죽음의 암흑 속에서도 안전할 것입니다(시23:1,4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중생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 은혜의 감미로움을 맛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터어키 사람이나 다른 불신 국민들같이 올바른 기도법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울이 증거하듯이, 아버지의 아름답고 다정한 이름을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믿음은 - 우리 입이 저절로 열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갈4:6,롬8:15)하지 않는 믿음은 -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이런 일은 중생의 선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육신에 있는 동안 중생은 항상 불완전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각종 원인을 내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천국의 기업에 대한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 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항)

1항.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합니다. 사람은 (1)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2)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3)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외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4)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입니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렘17: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8: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94: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36:1,롬3: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시14:2). 요컨대 그들은 육입니다(창6: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 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입니다(갈5: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습니다.


2항.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선 나는 불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재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티토나 트라얀의 공정과 온건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안의 정신 착란, 방탕, 잔인성 등과 다름이 없다든가 또는 티베리우스의 음탕한 생활과 베스파시안의 이 점에 있어서의 절제 생활이 다름이 없다든가 하는 것, 또는 개개의 덕과 죄악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바른 길과 법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내가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그 죽은 모습까지도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의와 불의를 혼동한다면 세계에 어떤 질서가 남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마음에 착한 일과 악한 일의 차이를 새겨 두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경륜에 의해서 그 차이점을 가끔 확인하십니다. 사회에서 유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현세의 복을 많이 주십니다. 이것은 그런 덕의 겉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비록 외면적이며 가장한 의일지라도, 그에 대한 현세적인 보상을 반드시 주십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방금 인정한 주장 즉, 이런 덕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이런 덕의 형상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결코 칭찬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3항.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여전히 옳습니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 덕망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마음이 오염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에, 상보다도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의와 극기와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이 선한 사업을 심히 망칠 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행에 대한 진지한 열성보다도 단순한 야심이나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 근원인 마음이 불결하고 부패했으므로, 덕과 비슷하여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행과 같이, 덕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른 일의 목적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것을 목표로 삼은 노력은 “바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명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그 패악한 의도로 보아서 죄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훌륭한 행위를 했던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 카토와 유사한 사람들도 행위로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의 광명이 없었고, 그들의 행위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것은 의무 수행이 행동보다 의도에 의해서 그 가치가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4항.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고(요일5:12) 하는 요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간에, 평생 멸망으로 또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과 일치되는 말을 어거스틴도 했습니다. “우리의 종교는 의와 불의를 행위의 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법에 의해서 구별한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 같은 것도 죄로 변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생각을 비유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의 열성은 길을 벗어나서 달음질을 계속하는 사람과 같아서, 힘을 다하여 달릴수록 더욱더 목표에서 멀어지며 더욱더 불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른 길에서 절며 가는 편이 길 밖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그는 말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분명히 그들은 나쁜 나무와 같습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은 맛도 좋을는지 모르나, 몸에는 조금도 좋지 않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의에 대하여 무가치할 뿐 아니라, 확실히 정죄를 받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듯이, 우리는 무슨 까닭에 이 문제를 논의합니까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히11:6) 사도의 말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5항.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 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칩니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5: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합니다(고후5: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합니다(엡2: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합니다(롬4: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41: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11: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귀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2: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2: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1:9) 인정해야 합니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4-5,7) 인정해야 합니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의롭다하심이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귀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롬11: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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