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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5)_프린트물_2023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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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2-1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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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5)

[ 제3권 제14장 6항 – 제14장 11항 ]


       성경본문: 로마서 4: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6항.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 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습니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묘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59: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다른 예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2: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습니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는 원수들이 - 또 그들의 행위가 - 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합니다(롬5:10, 골1: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입니까?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요일4:10), 성실하게 깨우쳐 줍니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꼭같은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고전6: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벧전1: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다면, 이 정결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1: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는다, 7-8항)

7항.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 둘째 종류와 세째 종류가 포함됩니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합니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증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십니다.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2: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 악하게 산 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제거해야 합니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요! 이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릅니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8항.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1:13-16, 참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서 가르치십니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됩니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더 노엽게 할 것입니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잠15: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습니다(창4: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고 지적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5:3) 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습니다(행15: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항)

9항.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네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 더 죽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됩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전7:20,왕상8: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입니까?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십시오.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합니다(욥25: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10항.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습니다(겔18: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2: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 언제든지 성립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1항.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결코 정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자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입니다.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습니다.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 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 포함시킵니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묘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롬4: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합니다(엡2: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2: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롬4: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합니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켜야 합니다. 끝으로,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합니다(고후5: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냅니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합니다(엡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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