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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7)_프린트물_2024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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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1-16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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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7)

[ 제3권 제14장 18항 – 제15장 2항 ]


       성경본문: 에베소서 3:1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18항. 그러나 선행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합치점은 이것입니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봅니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합니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됩니다 - 즉,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8: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줍니다.


19항.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14: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24:40,왕하20: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육의 흔적이 섞여있는 것뿐임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됩니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입니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엡3:19).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 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합니다(엡3: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합니다(롬8:37).


20항.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 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138: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77: 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합니다.


21항.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셔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8: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6:23) 가르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습니까?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 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제15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항)

1항. 잘못된 물음과 참된 물음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즉,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봉괴되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로지 믿음에 국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빠지는 망상에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다소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귀절들을 인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위에서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완전성의 최고봉에 올라서서 가장 사소한 범법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칭의를 위해서 행위는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는 있지 않은가라는 점입니다.


2항.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 진지한 믿음에 해독을 주었습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쓰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랍니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써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입니까? 이 말에 얼마나 큰 화근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해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흔히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조그마한 말을 잘못 써서 후세에 과오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귀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잠잠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값 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합니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2: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36: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이 충분한 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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