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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1)_프린트물_2024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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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3-13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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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1)

[ 제3권 제17장 5항 – 제17장 8항 ]


       성경본문: 신명기 7: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7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5항.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사람을 멸망의 구렁에서 구출하신 주께서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그를 자신의 자녀로 성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모습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의 영의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를 포용하십니다(고후5:17 참조). 이것이 베드로가 언급한 “받으신다”는 것이며(행10:35,벧전1:17 참조), 신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 용납에 의해서 그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벧전2:5 참조). 이는 주께서 자신의 영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한 일을 사랑으로 포용하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받으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한층 더하는 의미로 그가 주신 행위까지도 “받으신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주께서 그들을 귀히 쓸 그릇으로 택하시고(롬9:21) 기꺼이 진정한 순결로 장식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선행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또 이런 행위에 붙어 있는 결함과 오점을 인자하신 아버지께서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같이 선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요약하면, 그가 이 귀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얼굴을 보실 때마다 당연히 그것을 사랑하시며 존중히 여기시므로, 거룩과 의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도 죽을 육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선행은 아직도 불완전하며 육의 죄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나 그 행위에 대해서나 그대로는 받으실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친절하시며 자비로우시다고 증거하는 귀절들은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는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7:9) 라고 말했습니다. 이 귀절을 후세 사람들은 격언같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라고 엄숙하게 기도했고(왕상8:23), 느헤미야도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느1:5).


  참으로 주께서는 그의 모든 자비의 언약에서 그의 종들이 바르고 성결한 생활로 보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주의 선하심을 조롱하는 자가 없도록 하시며, 교만한 자가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악한 생각대로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신29:19). 따라서 주께서는 언약으로 맺어진 자들이 항상 의무를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언약은 처음에 자유로운 합의로 성립한 것이었고, 영구히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손이 깨끗하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언명하면서도(삼하22:21,시18:20 참조), 내가 말한 근원을 가리키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다고 하였습니다(삼하22:20). 거기서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모든 선물에 선행하며 그 원인이 되는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칭의를 행위에 연결시키는 귀절들을 검토함, 6-15항)

6항.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런 표현들과 율법의 약속과는 다르다는 것을 겸해서 고찰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내가 “율법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책들 여러 곳에 보이는 약속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 중에는 복음적인 약속도 많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의 시행에 직결된 것을 나는 율법의 약속이라고 부르며, 이런 종류의 약속은(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할 때에(신7:9,왕상8:23,느1:5 참조), 이 말씀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와 언약을 맺은 주의 종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며, 주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보여주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두려워하며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자비의 약속들은 당연히 이 목적 즉, 우리가 그 유익을 주시는 분을 경외하며 공경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항구적인 의무를 지적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외하기 위해서 그의 자녀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양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부르심을 받은 쪽을 향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신자들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생활로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실행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그의 영의 지도를 받아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자녀의 정직한 휘장을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5:1에 교회 백성에 관해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은 것도 이에 관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 대답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시24:4 참조). 마찬가지로 이사야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라고 했고(사33:14), 그 대답은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등입니다(사33:15). 여기에 묘사된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는 그 기초가 아니라,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자신과의 교제에 인도하시며 그 교제 안에서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므로, 신자들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영으로 자신과 연결된 그들을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성도들에게 열어 주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설 영원한 자리를 마련하는 제 일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주께서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고, 계속 보호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묻는다면, 우리는 다윗의 시에(시15:2 이하 참조) 묘사된 중생과 그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7항.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를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듯한 귀절들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선행에 “의”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었고, 사람은 그런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대부분은 처음 유형에 관한 것인데, 계명의 준수를 “칭의” 또는 “의”라고 부릅니다. 둘째 유형의 일례는 모세의 글에 있듯이 “우리가...모든 명령을...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는 말씀입니다(신6:25). 만일 이것은 법률적인 약속이고, 불가능한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면,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없는 다른 항변도 있습니다. 예컨대,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신24:13). 예언자도 같은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치욕을 복수한 비느하스의 열성이 그에게 의로 정하여졌다고 합니다(시106:30-31).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기뻐 뛸 이유가 여기 풍부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에 의한 의롭다함이 확립된 후에 행위에 의한 의롭다함이 폐지되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들은 여기에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서, 만일 행위로부터 의가 나온다면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의”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 그러하므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HUCIM”(후킴)을 희랍어의 “의”(디카이오마타)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일러둡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나의 주장을 쾌히 양보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행할 의무가 있으므로, 완전히 복종한 후에도 여전히 “무익한 종”입니다(눅17:10). 그러나 주께서 율법에 의라는 영예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주가 주신 것을 제거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복종이 의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또 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의 일부라고 인정합니다. 다만 조건은 나머지 부분들에 의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의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포기하는 것은 율법의 의 자체에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이 연약하여 우리에게서는 율법의 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의 명령들을 간단히 “의”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행위에도 이 말을 적용합니다. 예를 들면, 사가랴와 그의 처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라고(눅1:6) 할 때에, 그들의 행위를 행위 자체의 성격에 따라서 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도 내가 지금 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주의하게 희랍어로 번역한 사람의 것을 근거로 하여 원칙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에게는 전해 받은 문서에 어떤 변경을 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눅1:3), 나는 이 점을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율법에 포함된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라고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하며, 율법을 범할 때마다 그 의를 깨뜨리게 됩니다. 율법은 의만을 명령하므로,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에 있는 계명들은 그 하나하나가 의로운 행위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범법자가 되었으므로, 한 가지 행위만 가지고는 의롭다는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한 가지 행위도 불완전하고 항상 어디엔가 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8항.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는 이중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제 둘째 유형을 고찰할 터인데, 여기는 특별히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의를 증명하는 말로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한 것보다(롬4:3,갈3:6) 더 확고한 증명은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행위에 대해서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했으므로(시106:31), 믿음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보아서, 우리는 행위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승리를 이미 얻은 듯이,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의를 완성하는 것은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청합니다. 만일 의에 대한 진정한 표준을 성경에서만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성경의 여러 부분을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는 방법을 나와 함께 경건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숙고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신칭의가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롬5장 참조) 바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행위에 의한 의에서 제외된다고 담대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꼭같은 확신으로 바울은 아무도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는 반면에(롬3:20 참조),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행위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과, 믿음에 따라 의가 확립된 후에 행위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릅니다.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하지 못하며, 사람은 자기의 어떤 행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므로, 행위의 도움이 일체 제거된 채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있게 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평가됩니다. 행위에 있는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허물의 죄책이 도말되고, 선행까지도 항상 더럽히는 허물의 불완전이 묻혀 버린 후에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됩니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됩니다(롬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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