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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2)_프린트물_2024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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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3-19 12:2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2)

[ 제3권 제17장 9항 – 제17장 12항 ]


       성경본문: 시편 32:1-2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7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9항. 이신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만일 누가 믿음에 의한 의를 부정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사람이 다른 행위에서는 범법자이면서도 한두 가지의 거룩한 행위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묻고자 합니다. 이것은 물론 어리석다고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 범법하는 사람이 많은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다시 묻고자 합니다. 반대자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율법이 크게 선포하기 때문입니다(신27:26). 나는 다시 불순하다거나 결함이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행위가 있는지 묻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별들도 깨끗하지 못하며(욥25:5), 천사들도 의롭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욥4:18).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반대자는, 부수적인 범법으로나 자체의 부패로 인해서 더럽혀지지 않으므로 의롭다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하며 불결하며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고사하고 보아주실 가치조차 없는 행위라도 의로 인정된다는 확정적인 결론이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면 무엇 때문에 반대자들은 행위에 의한 의를 자랑함으로써 이신칭의를 배척하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믿음에 의가 없다면, 이런 행위의 의를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을 낳기를 원합니까? 불경건한 자들의 발언들은 이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들은 이신칭의가 행위에 의한 의의 시초이며 기초이며 원인이며 증명해 주는 것이며 본체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행도 의로 간주되므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문제의 진상을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행위에 의한 의는 그 성격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인정되든지 간에 이신칭의에 의존한다면, 이신칭의는 이 관계로 인해서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욱 강화되며, 그 힘은 더욱 강력하게 빛나게 됩니다. 또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얻은 이후에 따르는 행위를 중시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기능을 떠맡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는 행위가 이 기능을 믿음과 나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신칭의가 전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행위의 불결이 폭로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닙니다.


10항. 죄가 용서된 후에야 행위가 용납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행위의 부분적인 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완전한 것같이 시인하신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근거를 생각해본다면 모든 곤란은 해결될 것입니다. 용서를 받은 후에 하는 행위라야 용납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지 않으신다면 이 용서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행위의 의가 - 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 - 믿음과 값없이 얻은 칭의에 의존한다면, 또 후자에 의해서 실현된다면, 그것은 믿음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를테면 원인에 대한 결과와 같이 믿음에 종속시켜야 합니다. 행위의 의에는 이신칭의를 배척하거나 흐려지게 할 권리가 전연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고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고, 특히 다윗의 말을 역설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있도다…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롬4:7-8 참조). 어떤 자들은 행위에 복을 돌리는 듯한 무수한 귀절들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 1),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시1:1), “시험을 참는 자”(약1:12), “공의를 지키는 자들”(시106:3),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시119:1),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마5:3,5,7)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바울이 말한 진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칭찬받을 성질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그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불행한 상태로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다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로 얻는 복은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만을 근거로 삼은 다른 종류의 복이 이 복을 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별문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자들에게 보통 적용되는 “의롭다”는 단어에 대해서 고심할 이유가 훨씬 적어졌습니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생활이 거룩하기 때문인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지로의 자체를 실현한다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므로, 그들의 의는 이신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신칭의가 그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11항.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반대하는 야고보가 여전히 문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까지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며(약2:21), 우리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합니다(약2:24).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바울을 야고보와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들이 야고보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지 않도록 야고보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언급하십니다(롬4:3,갈3:6). 우리도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동일한 성령이 야고보를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우리의 믿음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성립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가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면 이 귀절들은 어떻게 서로 조화됩니까?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최대한으로 뿌리 깊게 수립하려는 것을 - 믿음에 의한 의를 - 송두리째 뽑아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에 평화를 주는 문제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즉, 그들은 이신칭의를 비방하기는 하지만 양심이 의지하는 의의 표준은 세우지 않습니다. 의에 대한 모든 확신을 제거하는 것밖에 그들의 자랑이 없다면, 그들이 소원대로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또 그들이 진리의 빛을 꺼버리고 거짓의 흑암을 퍼뜨리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그 비참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굳게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고보의 말을 가지고 아킬레스(Achilles)의 방패같이 끈덕지게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 말은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의 의도를 살펴보고, 다음에 그들의 망상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 또 이것은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화이기도 하지만 - 신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전연 소홀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확신을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도는 진정한 믿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경박한 사람들이 내용 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한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반대자들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곧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중의 오류 즉 첫째로는 “믿음”이란 말에서, 둘째로는 “의롭다함”이란 말에서 오류에 빠졌습니다.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허망한 견해를 사도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양보이며 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그는 맨 처음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로 밝힙니다(약2:14). 그는 “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으면”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있노라 하고”라고 합니다. 좀더 내려가서 그런 믿음은 귀신들이 가진 지식보다도 못하다고 조롱할 때에(약2:19) 그의 뜻을 더욱 명백하게 나타냅니다. 그리고 끝으로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약2:20). 이런 정의를 보면 그가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라고 그는 말합니다(약2:19). 만일 이 믿음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뿐이라면, 이런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제거한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서 무엇이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격이 아주 다른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킬 때뿐이며, 그와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 의롭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2항.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둘째 허위까지 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문제를 끝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일부분을 행위에 둔다고 합니다. 야고보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또 야고보 자신을 조화시키려면, “의롭다함”이라는 말을 바울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불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되고 우리가 의로운 자로 인정될 때에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만일 야고보도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운운하는 모세의 말을(창15:6,약2:23) 인용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 말을 인용한 전후 관계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을때 자기의 아들을 제단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위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는 것입니다(약2:21).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약2:23). 만일 결과가 그 원인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모세가 여기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인정되었다고 하는 증언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나타난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났을 때에 이스마엘은 이미 소년이었고, 그 이스마엘이 잉태되기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여러 해 후에 보인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건의 순서를 잘못 거꾸로 만들었든지 이것은 상상하는 것조차 부당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고보에게는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만한 것처럼 이 때에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확실히 야고보는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 공상적이고 속이 빈 믿음의 가면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곤란에서 해방됩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설명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 점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망상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고보의 말을 왜곡하든 간에,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개념을 표현할 뿐입니다. 즉 내용이 없이 겉으로만 믿는 체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 신자는 이런 외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으로써 자기의 의를 공표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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