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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5)_프린트물_2024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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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6-04 00:4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25)

[ 제3권 제18장 2항 – 제18장 6항 ]


       성경본문: 마태복음 19:17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8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7항.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그들은 사도의 말을 빌려 더욱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이런 환난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보낸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살후1:5). 참으로 사도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하늘로부터…나타나실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살후1:6-7)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고 말합니다.


  첫째 귀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택하신 우리를 맏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롬8:29), 그리스도께서 우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드디어 예정된 영광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눅24: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행14: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환난을 겪을 때,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보통 그의 양들에게 찍으시는 표를 우리에게도 찍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됩니다. 그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갈6:17)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의 발언들을 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집니다(고후4:10). 우리는 그가 고난을 받으신 그 모양대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빌3:10-11).


  바울이 첨가하는 이유도,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여러분을 괴롭힌 원수들에게 그 괴롭힌 데 대한 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일치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평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과 일치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둘째 귀절은(히6:10)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봉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은 그의 공의에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치며, 만일 잊으신다면 그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가 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만한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감수한 수고는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약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도 다른 모든 약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언약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리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만이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이 근거 위에 서서, 우리의 봉사가 아무리 무가치할지라도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 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지 않으시며 한번 하신 약속은 지키시리라고 확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은 당연히 줄 것을 준다는 공정성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실성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한 말은 유명합니다. 이 거룩한 분이 그 말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 자주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 말을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인용하겠습니다. “신실하신 주께서는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8항. 사랑에 의한 칭의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들을 인용합니다. “내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4). 이 두 귀절을 근거로 삼아 이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믿음보다 사랑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며, 물론 사랑의 힘은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궤변도 문제 없이 반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처음 귀절에 있는 말은 진정한 믿음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둘째 귀절도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입장에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사랑을 믿음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사랑에 더 많은 공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더 효과적이며, 영향력이 많으며, 더 많이 봉사하며, 영원히 창성하지만, 믿음은 얼마 동안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고전13:2 이하 참조). 만일 우열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첫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바울의 발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참으로 그가 역설하는 점은,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는 한 가지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사랑이 믿음보다 더 크다고 가정한다면, 건전한 판단력을 아니, 완전히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이 가정을 근거로 사랑이 더 많이 의롭다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까? 믿음에 있는 의롭다하는 힘은 행위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칭의를 믿음이 붙잡을 때에, 믿음이 의롭다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반대자들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의롭게 한다고 주장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사랑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선하신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그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의 논법은 훌륭하게 전개됩니다.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에 가치가 있기때문에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값 없이 얻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며, 의의 전체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사랑이 믿음보다 나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왕은 구두 직공보다 무한히 훌륭하기 때문에 구두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법입니다. 이 한 가지 삼단 논법만으로도 소르본느 학파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됩니다.


  만일 어떤 궤변가가 여기에 뛰어들어,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단히 훌륭하고도 든든한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열거하는 은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관련되기 때문에, 요약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모두 “믿음”과 “소망”에 포함시킵니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 해석하는 재능, 그리고 지식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우리는 다만 소망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과 소망을 말할 때에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13:13 상반절) - 즉, 은사의 종류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모두 이 셋에 연결되는 것인데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전13:13 하반절).


  세째 귀절에서 그들은 만일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면(골3:14), 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므로, 사랑은 의의 띠일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우선 바울이 완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르게 조직된 교회가 서로 잘 단결된 때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묻지 않겠습니다. 또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이런 추론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을 제시합니까? 나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들을 모두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이 완전성을 얻지 못하리라고 언제든지 그들을 반대하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나는 사람은 모두 사랑을 이루는 경지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완전성을 실현할 희망도 전연 없다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9항. 마태복음 19:17

  미련한 현대 소르본느 학파는 아무 근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성경 귀절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던집니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어떤 말은 너무도 엉뚱하여 나는 그것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끝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하겠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십니다(마19:17).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은혜의 주께서 명령하셨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그들은 묻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시고 그 사람들에게 알맞도록 대답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모르는 생각입니다. 여기서는 율법사가 주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다. 묻는 사람의 인품과 질문 자체가 이와 같은 주의 대답을 유발시킵니다. 율법의 의를 굳게 믿는 습성이 몸에 밴 율법사는 행위에 대한 확신 때문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의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완전한 거울이 있는 율법으로 그를 돌려보내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우리도 행위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똑똑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구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생명의 길에서 벗어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립되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들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식별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회복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계명에 의해서 완전한 의를 배웁니다. 그러나 도중에서 실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도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율법에 의한 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다른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사가 행위에 대한 허망한 자신감을 가지고 교만한 것을 아시고, 그가 영원한 사망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그에게 율법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와 같이,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겸손하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은 전연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의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10항.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성경을 잘못 이용하려고 하다가 지친 그들은 드디어 교묘한 궤변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일”이라고(요6:29) 한 사실에 관해서 그들은 트집을 잡습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은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추론합니다. 그들은 마치 믿음이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이것은 복음 선포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들여 이 어리석은 말들을 분쇄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용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말은 외부의 압력이 없더라도, 그 자체의 약점에 의해서 충분히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반론은 참된 듯해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으므로,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처리하려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에는 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 상식이며, 죄는 그 하나하나가 우리의 불의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선행에 대해서도 그 하나하나를 의로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사람이 정죄를 받는 것은 원래 불신앙에만 기인하는 것이고, 개개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물론 그들과 생각을 같이합니다. 불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첫걸음이고, 그 후에 개개의 범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와 불의를 잴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꼭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듯해서, 이 점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행위에 의한 의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테면 이 직선을 일평생 어김없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로와질 수 없습니다. 이 직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불의에 빠집니다. 이것을 보면 의는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복종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싫증나는 일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불의를 판정하는 척도는 아주 다릅니다. 음행하는 자나 도적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거느린 자이므로 한 가지의 범행으로도 죽음에 해당합니다. 이들 궤변가들은 야고보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약 2:10-11)이라고 한 말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각 개의 죄에 대해서 공정한 벌이 죽음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죄는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공정한 진노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 즉 많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경우에도 선한 행위 하나를 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이론가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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