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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7)_프린트물_202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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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7-09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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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27)

[ 제3권 제19장 7항 – 제19장 11항 ]


       성경본문: 로마서 14:1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무해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항)

7항.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자체로서는 “무해 무익한” 외부적인 사물에 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 의무에도 매여 있지 않고, 그런 사물을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전연 무방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인데, 만일 모른다면 우리의 양심은 결코 평안히 쉴 수 없으며 미신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육식을 자유롭게 먹는 일과 휴일 문제와 옷 입는 문제 등에 대한 논의를 일으킨다고 해서, 이것을 무익하고 경박한 행동이라고 보고, 우리를 몰상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이트, 내의, 냅킨, 손수건 등에 아마포를 써도 좋겠는지를 의심하게 되면, 다음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고, 드디어 거친 삼베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식사할 때에 냅킨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손수건이 없어도 괜찮겠는가의 문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맛좋은 음식을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은 검은 빵을 먹거나 보통 음식을 먹거나 간에, 더 나쁜 것을 먹고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을 느낄 것입니다. 단 포도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양심에 꺼림직해서 맛 없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보통보다 맑고 좋은 물까지도 입에 대지 못할 것입니다. 요컨대, 속담에 있듯이, 길에 있는 짚을 밟아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쓰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거나 실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낙심해서 반드시 깊은 혼란의 와중에 빠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일정한 길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의심에 휘말려든 사람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8항. 하나님의 선물을 그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이유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합니다(롬14:14).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일 그 자유가 하나님 앞에서 근거가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모든 외적인 일들은 우리의 자유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미신적인 생각이 우리 앞에 장애물을 제시할 때는, 그 자체로는 정결한 것도 우리에게 더러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좋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2-23)고 부언합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행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증거합니다(딤전4:4-5).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이 포함됩니다. 이런 의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요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자신의 주관 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9항.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탐식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자유의 힘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의 양심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일이나, 우리의 육의 허물로 더러워진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해서, 혹은 무해 무익한 것들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 불안과 동요와 고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인간들이 현재 더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사치를 누릴만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화 찬란한 연회와 몸 치장과 저택을 즐기며, 이웃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가지려 하며, 부요한 것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일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며, 이런 것은 무해 무익한 일이라고 합니다. 나도 그들이 무해 무익하게 사용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겠으나 이런 것들을 탐내며 크게 자랑하며 낭비하는 때에는, 그 자체로는 용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죄악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바울의 발언은 무해 무익한 것들을 잘 구별합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무엇 때문에 이제 위로를 받고 배부르고 웃고(눅6:24-25), 상아 침상에서 잠을 자며(암6:4),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사5:8),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포도주를 갖추는(사5:12)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합니까? 확실히 상아와 금과 재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좋은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사람이 쓰도록 허락된 것, 아니 지정된 것입니다. 우리는 웃지 말라거나, 배부르지 말라거나, 조상이 물려준 재산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말라거나, 음악을 즐기지 말라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거나 하는 명령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하며, 열락과 쾌락 속에서 뒹굴며, 배불리 먹으며, 현재의 쾌락으로 머리와 정신이 몽롱하며, 항상 새로운 쾌락을 갈구하는 것 - 이런 짓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버리십시오. 무절제한 낭비를 그치십시오. 허영과 교만을 버리십시오. 맑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깨끗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각성하며 절제할 때에 사람은 이런 복된 선물들을 합당하게 쓰는 법을 깨달을 것인데, 이런 절제가 없으면 평범한 쾌락까지도 지나친 것이 됩니다. 옷은 초라해도 마음이 고귀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자색 옷과 비단옷을 입었어도 마음이 단순하고, 겸비한 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활이 빈곤하거나 보통이거나 부유하거나간에, 사람은 각각 그 처지대로 살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생활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요 사치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법칙은 다음과 같은 것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즉, 바울과 함께,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만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빌4:11-1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또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항)

10항.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불가하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듯이,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은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심히 많습니다. 독자들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자유가 없다면 자기들에게 자유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 나는 그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그릇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새 것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그것을 얻는다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하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기를 먹거나 계란을 먹거나, 붉은 옷을 입거나 검은 옷을 입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습니다. 자유는 원래 양심을 위한 것인데 양심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앞으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고, 한 가지 빛깔의 옷만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감해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유하기 때문에 맑은 양심으로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약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잘못입니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을 참으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해를 줄 경솔한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서 이 한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11항.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서 나는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며, 어떤 것을 피하며, 어떤 것을 무시할 것인가를 논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지지가 있고 말의 뜻을 바르게 표현한다는 한도에서 “걸리게 한다” (걸림을 준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통 구별하는데, 나는 이 구별을 찬성합니다.


  우리가 경박해서, 혹은 방종해서, 혹은 경솔해서, 바른 순서나 장소에 어긋나는 어떤 불미한 행동을 함으로써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때에, 그것은 걸리게 하는 것이라고 불려집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행위자에게서 유래할 때 그것은 그가 걸리게 한다고 일컬어집니다.


  악한 행동이나 부당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또는 악한 의도로 그 행동을 변하여 넘어지는(죄를 짓는) 기회를 만들 때, 그것을 걸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걸리게 “하는 것”은 없지만, 악한 해석가들이 그렇게 이해합니다. 첫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약한 사람들만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악한 성품과 바리새적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는 약자의 걸림이요, 또 하나는 바리새적 걸림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입니다. 바리새적 엄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양보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그는 말합니다(롬14:1). 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3). 이밖에도 같은 뜻을 가진 귀절들이 많은데, 여기서 말하기보다 각각 적절한 때에 찾아보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요점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15:1-2)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요 남의 것이 아니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10:29,32),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우리의 약한 이웃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사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그들의 종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에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걸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이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니, 그대로 버려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마15:14).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었다고 주님께 고했는데(마15:12), 주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걸림을 무시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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