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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1)_프린트물_2024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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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9-02 23:3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1)

[ 제3권 제20장 8항 – 제20장 11항 ]


       성경본문: 다니엘 9:18-1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셋째 법칙: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항

8항.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여기 우리는 세째 법칙을 첨가합니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곧, 자기 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해서 허영과 교만에 부푼다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순종하여 모든 교만을 없애버린 예를 여러 번 말한 바 있는데 그들 모두는 거룩할 수록 주 앞에 나갈 때에 더욱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칭호를 주셔서 칭찬하신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단9:18-19). 다니엘은 어떤 사람들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 섞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그로부터 피난처를 구합니다. 그는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라고 하는(단9:20) 웅변적인 말을 합니다. 다윗도 자기의 예를 들어 이 겸손한 태도를 가르칩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이와 같은 모범으로 이사야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64:5-9).


  그들이 의지한 확신은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아주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도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14:7)라고 했습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쓴 사람이 누구였던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당신 앞에서 자비를 비옵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의로왔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바룩2:18-1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3:2).


9항.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요약하면,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너그러운 화해를 얻기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용서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신자들이 이 열쇠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는 때에도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25:7). 또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25:18). 이것을 보면 우리는 매일 최근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은 듯한 죄까지도 고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예언자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중대한 죄 하나를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그 죄에 감염된 곳, 곧 모태를 말합니다(시51:5). 이것은 타고난 부패성을 근거로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전생애의 죄들을 종합해서 더욱 더 엄격하게 자기를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쉽게 받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자들이 항상 많은 말로써 죄의 용서를 빈 것은 아니나,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기도할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우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양심을 조사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용기가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무서워 떨 것입니다.

  사람들이 벌을 면하기를 기원할 때에 특별한 고백이 하나 더 있습니다. 즉, 그들은 동시에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을 제거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증세만을 치료하고 병의 원인 자체를 등한시하는 미련한 짓을 배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표징으로 우리에 대한 호의를 증명하시는 것보다, 우선 우리에게 대해서 호의를 가지시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와의 완전한 화해를 느끼며 그를 전적으로 “사랑스럽게”(아5:16)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도 우리에게 이 일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특히 원해야 할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의 은혜 가운데 두시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화해의 열매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특히 현재의 죄를 고백하여 모든 죄와 벌이 용서되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용납되도록 하는 일반적인 전제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께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한 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도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용납되게 하기 위해서 피의 대속으로 기도를 성별했습니다(창12:8,26:25,33:20,삼상7:9 참조).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만을 믿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큰 특권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항.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빌 때에 간혹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듯합니다. 예컨대 다윗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고(시86:2),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왕하20:3,사38:3 참조). 그들이 이런 말로 표현하려고 한 뜻은, 자기들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종과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시34:15). 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고 가르치십니다. 이 여러 귀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에 따라서 기도의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실하며 정직하며 무죄하다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 그러한 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한 말은(요9:31)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인”이란 말이 보통은 의에 대한 아무 욕망도 없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동시에 경건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아무도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약속과 성도들의 증거는 부합하는데, 이 성도들의 증거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순결이나 무죄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바라는 것이 자기들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들의 불의에서 구제되기를 원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보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비교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과 순진함을 내세움으로써 문제의 공정성을 보아서도 도움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시게 했다고 하여,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가짐으로써, 주께서 진정한 경배자들을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주신 약속들로 자기의 입장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이 복을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고 믿는 그의 확신은 다만 하나님의 관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째 법칙: 확신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항

11항.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

  네째 법칙은, 이와 같이 우리는 참으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과 그의 공정한 벌을 느끼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악행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잘 조화됩니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은 뗄레야 뗄 수없이 굳게 결합되어 있습니. 그 중 하나는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다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와 같이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치점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5:7). 그는 하나님의 인자에 믿음을 포함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경외를 빼놓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를 깨닫고 모든 교만과 자기 신뢰를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신”이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감미롭고 완전한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평안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일이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고, 어떤 욕망도 타오르지 않고,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가장 잘 자극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기회는 그들이 자기의 부족을 느껴 마음이 괴로운 때입니다. 이런 때에 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껴 거의 미칠 듯하다가 이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 위에 비쳐 마침내는 믿음으로 인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곤란에 눌려 신음하며 장래의 더 큰 곤란들을 두려워하여 고민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곤란을 참을 수 있게 되며 위로를 얻으며 앞으로 곤란을 벗어나리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기도가 두 가지 감정에서 시작하며, 그 두 가지를 내포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즉 그는 현재의 곤경에서 신음하며 앞으로 올 곤란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얻으며, 언제든지 그가 도와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기원하면서도, 그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믿음 부족함에 극도로 노여워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가장 잘 조화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두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확인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야고보의 말도 이것과 일치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5-6). 여기서 그는 믿음을 의심에 대치시킴으로써 믿음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의심과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고 그가 첨부한 말도 주목할 만합니다(약1:7 참조). 그는 이런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합니다(약1:6). 그래서 다른 귀절에서 올바른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릅니다(약5: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믿는 대로 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마8:13,9:29,막11:24),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약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나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라는 바울의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기도가 시작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은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알게 된, 아니, 그것이 깊이 계시된 사람들에 한한다고 분명히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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