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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3)_프린트물_2024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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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10-01 07:08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3)

[ 제3권 제20장 15항 – 제20장 17항 ]


       성경본문: 시편 51:17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항)

15항.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고 고요하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담은 충분한 까닭은 있었으나, 격분과 복수심에서 세겜 주민들의 멸망을 기원했고, 후에 그대로 되었습니다(삿9:20). 그 저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제력이 없는 격분을 시인하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삼손도 이런 격정에 못이겨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라고 말했습니다. 의분도 다소간 섞여 있었지만, 지배적인 것은 타는 듯한, 따라서 사악한 복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법칙대로 하지 않는 기도라도 효과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보편적인 법칙은 개개의 예에 의해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간혹 특수한 충동을 받은 소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배려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엘리야의 예를 따르도록 경솔하게 청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9:55, 어떤 고대 사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라해서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실례를 보더라도 성경의 교훈은 분명한 증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부당한 고통을 받아 그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과 호소가 그의 앞으로 올라갈 때에, 비록 그들에게는 티끌만큼도 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는 그의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부당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여 허공을 치듯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 강탈, 폭행, 정욕 및 기타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당돌함과 광분을 억압시키시며, 그들의 포악한 권력을 전복시키셔서 눌린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이 없이 하늘에 닿지 못하는 기도라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시편에서는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기에서는 곤란을 당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자연적인 감정으로 토로한 기도를 구별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시107:6,13,19).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 것은 그들의 기도가 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의해서, 불신자들의 기도가 버림을 받지 않을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역설 또는 명시하시려는 것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의 호소도 때로는 유익한 것을 보고 진정한 경배자들이 더욱 더 기도하도록 격려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떠나거나, 혹은 불신자들이 소원대로 된 것을 보고, 그들이 큰 이득이라도 얻은 것같이 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합이 회개하는 체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말을 했습니다(왕상21:29).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 분의 노여움을 풀려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는 곧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06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서도 유대인들이(시106:8-12)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완악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시106:43,106:13 이하 참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사사기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울 때마다, 비록 그들의 눈물은 거짓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삿3:9 참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마5:45), 동기가 정당하고 곤경에서 구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그 애원을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큰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무엘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시하지 않으셨는데도 소돔을 위해서 기도했고(창18:23), 사무엘은 분명한 금지 명령이 있었는데도 사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삼상15:11). 수도가 파멸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예레미야도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렘32:16 이하). 그들의 기도는 거절되었으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건한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해답이 있습니다. 즉, 무가치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원칙에 비추어 볼 때에, 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나, 그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현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기원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 뜻은 감추어 있고 변함 없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현명하신 결정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사건들의 결과를 조정하셔서, 믿음과 과오가 섞여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 자신의 변명은 될 수 있으나 타당한 모범으로 삼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적당한 정도를 지나친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약속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조건이 붙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다윗의 말은 적절합니다.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시7:6). 여기서 그는 현세적인 어떤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6항.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만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유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나는 올바른 기도를 위한 법칙 넷을 말했으나, 그것은 너무 엄격하게 요구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믿음이나 회개가 없을 때, 열성과 올바른 기원이 없을 때 -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거부하시리라는 것이 그 원칙들의 뜻이 아닙니다. 나는, 기도는 경건한 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이나 우리는 경외와 겸손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잡다한 요구를 함부로 늘어놓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탐내는 일이 없도록 하며, 생각을 고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하나님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법칙을 충분하게 또 올바르게 실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윗의 불평에도 무절제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가 고의로 하나님께 간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항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약해서 넘어질 듯한 그로서는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 내던지는 것밖에 달리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말을 다 관용하시며 우리의 무지를 용서하십니다. 참으로 이런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기도할 자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려 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성과 인내로 기도했지만 감정이 격동하였으며 아니, 때로는 끓어넘쳤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설정한 첫째 법칙과 조화되지 않는 일입니다.


  특히 시편 39편의 끝을 보면, 이 거룩한 자는 격렬한 슬픔에 휩쓸려 거의 자제력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39:13). 이 절망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속에서 썩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의로 격정을 폭발시키거나, 보통 악인들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할 뿐입니다. 이런 시련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과 잘 조화되지 않는 기원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성도들도 합당한 일과 유익한 일을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런 결점이 있는 기도는 모두 배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자기를 책하며 즉시 올바른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들은 제 2법칙에 관해서도 죄를 짓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냉담한 자기와 재차 싸워야 하며, 자기의 부족과 불행에 대한 느낌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서 열렬한 기도를 드릴 만한 자극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자주 기도에서 멀어지고 거의 사라져 버립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기도, 또는 중단되고 막연한 기도는 거부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높이 들릴 때에 한해서 그의 기도는 합당하다는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의 마음에 심어두셨습니다. 여기서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겼다는 것은 이미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와 백성에게 공통된 형식이며, 지금도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손을 들 때에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도 냉담한 자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자들이 이 문제를 경시하지 않지만, 기도에 참으로 능숙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라고 말한 제사의 십분지 일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이중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하나는, 많은 죄를 지은 줄 알면서도 그 느낌이 미약해서 자기를 혐오하는 생각이 당연히 있어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올바르게 슬퍼하고 완전히 낙심하여 그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셔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경우에,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의 진노가 자기들에게 내리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신앙의 연약함과 불완전은 신자들의 기도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결점을 용서해주십니다. 그 분께서는 마치 그들의 믿음을 소멸시키기로 굳게 작정하신 것처럼 어려운 시련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시련은, 마치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듯이,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입니다(시80:4,79:5 참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라고 할 때에(애3:8) 그는 격렬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무수해서, 성도들의 신앙은 의심이 뒤섞여 있고 또 의심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므로 믿고 바라는 중에도 무심코 신앙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수록, 성도들은 더욱 더 노력해서 자기의 결점을 시정하며, 기도의 완전한 표준에 매일 더욱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치료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깊은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포함된 많은 결점을 하나님께서 무시하시지 않는다면, 공정한 입장에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타기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신자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자기를 용서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엄격한 자기 응징을 통하여 이런 장애를 극복하도록 노력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들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막으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은 장애를 돌파해야 합니다. 비록 모든 장애를 배제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것을 향해서 분투하고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항)

17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갈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치감과 공포심에 못이겨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 수치감과 공포심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친히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대언자와(요일2:1) 그의 앞에 있는 중보자로(딤전2:5,히8:6,9:15 참조)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도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과 같이,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믿음에 대해서 위에서 가르친 것은 모두 이 점과 관련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희망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기도의 유익과는 단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존엄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순간 떨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의 무가치를 느끼고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우리는 떨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의 교훈에도 우리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며,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히4:16).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는 것과 같이,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16:24).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16:26), 그리고 “너희가...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하는 사람들은 완고하게 그의 명령을 멸시하며 그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없는데, 이 점은 분명하고 논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합니다(고후1:20). 즉, 모든 약속이 확인되고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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