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36)_프린트물_2025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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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1-20 21:01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6)
[ 제3권 제20장 26항 – 제20장 28항 ]
성경본문: 시편 22:4-5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26항.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자들의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는 말이 자주 있는 데서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왜 응답이 있었습니까? 물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말에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22:4-5)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 기도하여 저들과 같이 응답을 받도록 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당치 않은 불합리한 추리를 해서, 이미 기도에 응답을 받은 사람들만이 앞으로도 응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야고보의 말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엘리야에게 독특한 특권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그 특권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순수한 기도의 무한한 힘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과 호의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어느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언급하셨습니다.
반대자들은 성경에 많이 있는 경고를 고의로 멸시하는 듯하므로, 그들의 무지는 더욱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권능을 독점했으므로 우리가 그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습니까? 다윗 자신은 아주 다른 주장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시142: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시52:6,64:10),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34:6). 시편에는 이런 종류의 기도가 많고, 다윗은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들어주심으로써 의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그의 예를 보고 용기를 얻어 소망을 가지게 되도록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제 한 가지 예만 더 드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도록 합시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시32:6). 이 성구를 내가 더욱 기꺼이 인용한 것은, 교황 제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고용된 논쟁가임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이 귀절이 죽은 자들의 중보 기도를 입증하는 것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온유와 인자하심에서 생겨날 결과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이 고용된 논쟁가들은 다윗의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같이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의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경험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데 비상한 도움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은혜를 확신의 근거로서 회상하는 귀절들이 많으나, 시편의 독자들은 잘 알겠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인용하지 않습니다. 야곱도 자기의 예를 들어 같은 뜻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32:10). 그는 약속을 말하지만, 약속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대해서 변하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더욱 용기있게 믿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라서, 너그러우심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시며 힘이 다하는 일이 없으시며, 그 자신의 성품으로 인하여 존귀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현명하게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31:5)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은 믿을 만하시다고 첨가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불변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은혜를 받더라도 그를 믿으며 그에게 기도할 만한 충분히 확고한 기대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때마다 우리에 대한 호의와 신의를 예시하시며 증명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속이지 않을까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7항.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종합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성경이 가장 중요시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의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모든 제물은 그 다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다른 데 드리는 것은 분명한 신성 모독입니다. 따라서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시44:20-21).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기뻐하시며,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끝으로, 말씀을 기초로 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멀어지는 기도는 즉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예는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중보하는 직무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리스도 특유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중보자가 성결케 하시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서로 교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중보를 믿으면서 자기와 다른 교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중보의 직무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우리는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한 곳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호 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자주 권하지만,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약5:16) 두 가지 권고를 결합하여 언급함으로써 무언중에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오를 정죄하는 데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즉, 올바른 기도는 믿음에서 생기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생기며(롬10:14,17),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에 불과한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자를 자기들의 대언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신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기도가 가득하나, 이런 중보 기도의 예는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기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미신은 분명히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대언자로서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이런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둘째 점을 쉽게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뻔뻔스러운 주장입니다. 그들은 성자들의 변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고작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출발한 우리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즉 영국에서 숭배하는 성자 죠지(George)나 히폴리투스(Hippolytus)나 이와 비슷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일도 하실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종류:사기도와 공기도, 28-30항)
28항. 사기도
기도는 원래 탄원과 간구에 한한 것이지만, 기도와 감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 이름으로 총괄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바울이 열거하는 것은 처음 종류에 속합니다(딤전2:1 참조). 요구하며 간구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구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은혜를 구합니다.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에 합당한 찬양을 돌리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을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 돌립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50:15). 양쪽을 항상 사용하라는 성경의 명령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무거운 빈곤의 짐과 체험 상의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우리를 사방에서 압박하는 곤란은 많고 또 강력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며 애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거룩한 자들은 역경을 모르는 경우에도, 자기의 죄책감과 무수한 유혹의 침범에 직면하므로,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의 제물을 드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주셔서, 우둔하고 태만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는 크고 많으며 어디를 향하나 강력한 기적이 많이 보여 우리는 거의 압도될 정도이므로, 찬양과 감사를 드릴 이유와 기회가 언제든지 있습니다.
이 일들을 좀더 충분히 설명한다면, 이미 충분히 증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소망과 재산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그의 복을 얻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소유는 번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항상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약4:14-15 참조) 우리가 결정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과 뜻 아래서 즉 그가 도우시리라는 희망으로, 결정하며 말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믿고 계획을 세우며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무슨 일을 착수하는 사람들도 같은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사30:1,31:1 참조). 또 우리가 여러 번 말한 것과 같이,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를 바르게 공경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받을 때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너그러우신 뜻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에 대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 쓸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도 나옵니다. 바울이 모든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딤전4:5) 증거할 때에, 그는 동시에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거룩하며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말씀”을 그는 환유법에 의해서 “믿음”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깨닫고, 아름다운 말로 “새 노래”를 그의 입에 두셨다고 갈파합니다(시40:3). 그의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침묵은 곧 원망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자연히 포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마다 그에게 감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선포하면서, 신자들에게 새로운 특별한 노래를 부르라고 역설합니다(사42:10). 같은 뜻으로 다윗은 다른 데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51:15). 히스기야와 요나도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결과에 대해서 같은 형태로 증명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여 노래하리라고(사38:20,욘2:9) 하였다. 다윗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같은 법칙을 지시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116:12-13). 교회는 다른 시에서 이 법칙을 따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106:4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시102:17,18,21).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도록 간구하며, 자기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감사할 의무를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선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교회가 앞으로 구속을 받을 것을 말합니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14:2).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자연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시116:1).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기가 경험한 도움을 말하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합니다(시18:1). 이 감미로운 사랑에서 흘러나온 찬양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감사와 결합되지 않은 간구는 모두 사악하다고 한 말의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빌4:6). 불평, 권태감, 초조감, 비통, 공포 등의 마음 상태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게 감정을 조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거의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해서 완전히 실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마다 더욱 거룩한 연관을 지어 우리에게 그를 찬양할 의무를 지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기도가 성별되며, 그렇지 않으면 부정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면서(히13:15),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입은 부정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을 보면, 교황주의자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이상하게 흘려 있는 것이라고 추론하게 됩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유는(살전 5:17-18,딤전2:1,8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때와 모든 장소와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며,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며, 모든 일을 위하여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 이는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찬양하며 기도할 확실한 이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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