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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7)_프린트물_2025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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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2-03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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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7)

[ 제3권 제20장 29항 – 제20장 33항 ]


       성경본문: 이사야 56:7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29항. 공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끊임없는 기도는 특히 개인의 사적 기도에 관한 것이지만, 교회의 공중 기도에도 어느 정도로 연관됩니다. 그러나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여 합의된 방침에 따르지 않으면, 끊임없이 드릴 수 없고, 또 그런 공중 기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하게 되는데 하나님께는 어느 시간이라도 상관없지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당하도록 일정한 시간을 합의하여 결정하며, 바울의 말대로 교회의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고전14:40)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각 교회가 가끔 어떤 감동을 받아서 더욱 자주 기도하며,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욱 큰 열성으로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견인에 대해서는 끝에 가서 논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금하신 중언부언하는 것과는(마6:7)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금하시는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나 긴 기도나 깊은 감정이 섞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말,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거나 사람을 설복하듯이 하나님을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개선식에서 하듯이 기도에서 호화 찬란한 외식을 보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저 바리새인은(눅18:11), 마치 이런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어보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칭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주의자들 사이에는 같은 이유로 빈 말의 반복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도를 자꾸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태산같이 많은 말로 자기 선전을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이런 유치한 조롱을 금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들리는 기도는 진실해야 하며,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한 요소와 근사한 것이 또 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배척하십니다. 위선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목격자가 있기를 갈망하며, 시장에 자주 다니면서 기도하여 세상의 환호를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마6:5). 우리는 이미 기도의 목표에 대해서 말했으므로, - 즉, 하나님을 찬양할 때나 그의 도움을 간구할 때나,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으므로 - 기도의 본질은 정신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기도는 원래 속마음이 감동된 것이요, 그 감동받은 것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롬8:27 참조) 쏟아 놓으며 펼쳐 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교사께서는 최선의 기도법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데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은밀히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들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6:6). 빈 말과 허식적인 기도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멀리하라고 하신 주께서는 또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더 훌륭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주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을 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마음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을 찾아 모든 생각을 집중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감동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속 가까이에 계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십니다(고후6:16 참조). 


  주의 말씀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는 은밀한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무수한 근심 걱정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도 기도에 더욱 집중하시고자 할 때에는 항상 군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고요한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이런 보조 수단을 경시하지 않도록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원래 너무도 불안정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수단으로 기도에 더욱 열성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때에는 군중 속에서도 기도하기를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필요하다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합니다(딤전2:8). 끝으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또는 자기 집에서 기도한다는 뜻도 모르는 자입니다. 또 단독으로 사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쉬지 않고 공중 기도에 참가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중 기도를 멸시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영예로운 명칭으로 장식하셨는데, 특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사56:7,마21:13). 이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뜻은 기도하는 일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전을 깃발같이 세워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에 참가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약속도 첨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65:1). 예언자가 이 시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쁜 노래를 부를 기회를 항상 주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그림자는 없어졌으나 지금도 확실히 옛날과 같은 약속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으로 우리들 사이에 믿음의 단결을 조성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확인하셨을 뿐 아니라, 바울도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30항.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의 공기도를 명하시므로, 우리에게는 이 공기도를 드릴 공공의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짓 구실을 만들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구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마18:19-20). 즉 공기도를 멸시하시지 않는다고 확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은, 이런 공기도에는 외식이나 무가치한 인간적 영광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 진지하고 성실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교회 건물의 합당한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또 사실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수백 년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 건물 자체에 계시며, 거기서는 우리 기도를 더 가까이 들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물 자체가 거룩하므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련한 생각을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에게 일임해 둡시다. 우리가 받은 계명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장소를 구별할 것 없이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요4:24) 구하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전이 기도와 제물을 드리는 일에 제공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에는 진리가 숨겨졌었고 이런 그림자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산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난 지금은 우리가 물질적인 성전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성전 건물 안에 가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성전의 모양을 명상하는 훈련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사야와 스데반은 엄숙하게 책망하였습니다(사66:1,행7:48,49).

(노래와 일상 언어를 사용하는 문제, 31-33항)

31항.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여기서 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기도 중에 쓰여지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킵니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사야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미치는 범위가 더 넓지만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점을 책망하는 데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마15:8-9).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29:1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과 노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의 감동과 관련된 것이면 극력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 보조 수단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불안정하며 쉽게 변하며 해이하여져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체 각부에서 어느 정도로 빛나야 하므로,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혀가 이 일을 하도록 맡겨진 것은 특히 합당합니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전하며 선포하도록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혀는 주로 공중 기도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신자들의 집회에서 하는 것이며, 이런 기도로 우리는 한 공통된 음성과, 이를테면 같은 입으로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영과 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서로 그 교우에게서 신앙 고백을 받으며, 교우의 행위에서 권유와 고무를 받도록 합니다.


32항.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겸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논한다면,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사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 마찬가지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처음 귀절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다음 귀절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습니다. 그 후에 서방 교회들은 밀라노 교회를 본받았습니다. 이는 조금 전에 어거스틴이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는 또 저서 재고론(Retractations) 제 2권에서 말하기를, 아프리카에서는 한창때에 이 관습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칼타고에서 최근에 시작한 이 관례에 대해서 악의를 품고, 기회 있는 때마다 비난 공격을 했다. 그 때의 노래는 성체를 들기 전 또는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권고로 내가 그에게 답변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보다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입니다.


33항. 기도는 일상 용어로 드리라

  그러므로 공중 기도도 종래의 관습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 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이나 친절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바울의 권위와 그가 한 분명한 말에서 다소 감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14:16-17).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고 말하였습니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 기도에서나 사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입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됩니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원인은 여기에 있은 것 같습니다(삼상1:13). 모든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항상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되어 폭발합니다. 기도할 때에 보통 보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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