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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0)_프린트물_2025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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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5-27 23:19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0)

[ 제3권 제20장 44항 – 제20장 45항 ]


       성경본문: 마태복음 6:11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항)

44항. 네째 기원

  다음에 있는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계합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서 -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10:31) -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십니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7: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일임하여 그가 먹여 주시고 보호해주시도록 합니다.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일로 믿음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악하여 우리의 영혼보다 육신에 대해서 더 민감하며 괴로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혼을 위탁하고도 여전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육에 속한 일을 염려하며, 포도주와 양식과 기름이 풍부하게 자기 앞에 없으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림자 같은 짧은 현세의 생명이 우리에게는 영원 불멸의 생명보다 이렇게도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육신을 위한 근심을 단연 포기한 사람들은 즉시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 곧 구원과 영생까지도 하나님에게서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를 심히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한다는 것은 신앙의 적지 않은 단련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의 골수에 박힌 이 불신앙을 버릴 때에, 우리는 큰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초실체적인” 빵에 대해서(마6:11)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유수 같은 이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께 양육자의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이 기원은(마6:11) 불완전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모독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것이 당연한데, 땅의 근심 걱정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 일에 끌어넣는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마치 아버지의 축복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음식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딤전4:8) 한 말씀은 쓸데없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신체의 영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것을 앞에 두셔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남은 두 가지 기원으로 - 천상 생활에 속하는 기원으로 - 인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둔한 것을 고려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신 정도로 만족하고 부정한 계략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우리는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양식이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의 글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노력이나 노고나 우리의 손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레26:20,신8:17-18 참조). 사실 음식이 풍부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영양있게 변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는 가난한 사람 못지 않게 부자에게도 필요합니다. 풍부한 포도주와 양곡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주리고 목말라 넘어질 것입니다.


  “오늘”, 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라는 말과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합니다. 우리에게는 보통 이런 욕망이 한정없이 불타듯 하며, 여기에 다른 악이 더 붙게 됩니다. 우리는 소유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할 때에는 쾌락과 오락과 허식과 기타 사치에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그날 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여주시니, 내일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물건이 풍부히 들어와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기원해야 합니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의 소유가 계속 불어나게 하시며 유효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소유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까지도 주께서 시간마다 조금씩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자부심이 강하여 좀처럼 믿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셔서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특별한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신8:3,마4:4)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물질적인 수단으로 생명과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그의 권능만이 그 생명과 힘을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보통 반대되는 예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즉, 가끔 빵의 힘을(또 지팡이의 힘이라고도 하신다) 꺾음으로써 먹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지 않고 쇠약해지게 하시며(레26:26) 마시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하십니다(겔4:16-17,14:13 참조).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무수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나, 소유가 풍부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산적한 재물을 믿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사실은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은 철저히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들의 탐욕을 감춥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 온통 쏟아놓는 것이라야 합니다. 또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즉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분께 구합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권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신8:18 참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점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당하고 무해한 노고에 의해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 부르지만, 사취한 것과 강탈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얻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든 간에, 우리 자신의 기술과 근면과 손으로 얻은 것같이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수고가 참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45항. 다섯째 기원

  다음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합니다(마6:12). 이 기원과 다음 기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요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맺으신 영적 언약도 두 부분만으로 성립한 것과 같습니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것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라는 것입니다(렘31:33-34, 33:8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고, 곧 이어 둘째 은혜를 첨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를 지탱하셔서, 우리가 모든 시험에 굴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빚”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빚을 만족하게 치를 수 없는데, 이 용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빚들을 너그럽게 탕감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비로 스스로 만족을 거두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놓아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롬3:24 참조). 그러므로 자신이나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런 만족으로 죄의 용서를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에 전혀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자기들에 대한 고발에 동의할 뿐이며, 심지어 자기의 증거로 자기에 대한 정죄를 확정시킵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혜로 풀림을 받지 않으면 자기들은 빚진 자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며, 자기의 공로와 만족을 하나님께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완전하여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귀의 유혹을 받아 과오에 빠지는 사람들을 그들의 제자로 삼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다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시며 죄인만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첨하는 말로 죄를 장려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아무리 육의 죄악을 벗어버리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세밀한 의무까지도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무 오점이 없는 순결함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하며, 이 일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그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우리의 육에는 항상 다소의 오점이 남아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권위에 의하여, 평생 죄의 용서를 빌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흠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신진 교사들을 누가 용납할 것입니까? 그들은 완전한 무흠이라고 하는 유령으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며,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다짐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요일1:10).


  또 이 악한들은 이런 노력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부를 말살하고 파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언약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결합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독 행위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가련한 영혼들을 절망 상태에 몰아넣어, 불경건하며 잔악한 짓을 합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히 반대되는 나태한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자신과 동류들을 속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을 갈망하는 것은 동시에 죄의 멸절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항변하나, 이것은 심히 유치한 생각입니다. 주기도의 처음 부분에서는 최고의 완전성이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의 무력한 상태가 제시됩니다. 이와 같이, 이 두 부분은 훌륭하게 서로 조화되며,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우리의 곤경을 위해 필요한 대책을 경시하지 않게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도 용서를 받기를 기원합니다(마6: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말로 모욕하는 등,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해한 모든 사람을 우리가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것같이, 우리도 용서받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위법이나 불법에 대한 죄책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사43:25 참조).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사를 기꺼이 말끔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현재 우리를 해하거나 이미 해한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미워하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복수를 계획하며 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의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지 말라고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시라고 빌기 때문입니다(마7:12 참조). 참으로, 이 기도의 뜻은,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하시지 마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끝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니 우리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마치 우리가 받을 용서의 이유가 있음을 말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위로하시려는 뜻도 있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시기와 복수심을 깨끗이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남을 용서해 준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조건을 한 표로서 첨가하신 것입니다. 이 표의 또 다른 의도는, 주께서 그 자녀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시려는 것입니다 - 즉, 복수심이 강렬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약하여 항상 적의를 품고 행동하며, 자기들에게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진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을 자녀들 가운데서 제외시키려고 하십니다.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감히 주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었습니다(눅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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