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43)_프린트물_2025년 7월 9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7-08 07:43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3)
[ 제3권 제21장 3항 – 제21장 5항 ]
성경본문: 시편 65:4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3항. 둘째 위험성: 선택의 교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심히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합니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라고 하는(잠25:2)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으로 보아서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침착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신29: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도록, 모세는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또 그는 이 이유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4항.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겨야 할 것입니다.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위가 있다고 들었을 때에 못지 않게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5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합니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까?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 점을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정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 게다가 이 점에 있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생각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적당한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이 생각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입니까?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항)
5항.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설을 덮어버립니다.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앞에 항상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이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주 전체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 미칩니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8-9). 그 선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밝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 나무와도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세가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우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신4: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합니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신7: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10:14-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신7: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신23:5). 신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47:4)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상 자신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책망하십니다(출32:9,신9:6 참조). 예언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습니다(암3:2).
여하간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결부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한 백성을 총애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 사람들까지도 애호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를 할 것입니까?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서 모욕의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 원칙을 상기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는 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구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라고 합니다(시105:6).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시105: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리와 일치합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44:3). 그런데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포함한 비밀한 선별을 의미한다는 데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합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라고 백성들에게 소망을 고무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65:4)라고 하면서 무장을 갖춥니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첫째 해방과 둘째 해방,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은혜로 확인되었으므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14:1). 예언자는 미래를 묘사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보였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 순간에는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부동하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여(사41: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속됨을 역설합니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합니다(슥2:12). 마치 하나님께서 혹심한 징벌로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중단된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 자체는 여전히 침범할 수 없습니다.
첨부파일
- 기독교강요강해143-제3권제21장3항-제21장5항.hwp (115.5K) 246회 다운로드 | DATE :2025-07-08 07:45:44
- 기독교강요강해143-제3권제21장3항-제21장5항.pdf (339.8K) 147회 다운로드 | DATE :2025-07-08 07:4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