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OUNCEMENT

어나운스먼트

주보

그룹성경공부

교회소식

교회소식

기독교강요강해(144)_프린트물_2025년 7월 16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7-15 08:02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4)

[ 제3권 제21장 6항 – 제22장 1항 ]


    성경본문: 말라기 1:2-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6항. 둘째 단계: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의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 성질을 첨가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이 - 거의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습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유사한 일례입니다. 이 일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시78:67-68)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이 변경을 통해서 밝히 드러냅니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된 지위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시편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20)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두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은혜가 값 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합니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충하고 불경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1:2-3,롬 9:13)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지께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 즉, 거룩한 뿌리의 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보다 낮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그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습니다.


7항.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저 독특한 후손으로 인정됩니다(롬9:78,갈3:16 이하 참조). 선택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효과가 나타나며 참으로 영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서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지,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고(롬9: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합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말1:2) 하신 말씀은 이 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예언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대조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바울이 관심을 갖는데(롬9:27,11:5,사 10: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하여 사라지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만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했지만(신32:9,왕상8:51,시28:9,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십니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실은 배제되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롬11: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습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공통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주신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갈4: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반드시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이 영적 후손들에게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으로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귀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선택 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흠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 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십니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짚어 엎기 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습니다. 그런 공상은 말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검토하겠습니다.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항)

1항.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입장과 특히 신자들이 값 없이 선택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악한 의도와 불경건한 생활로 기울어질 성향을 가지리라고 보시는 사람들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결정하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정을 예지의 보자기로 덮음으로써 그들은 예정을 모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예정의 근원이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주장합니다. 이런 생각은 일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각 시대의 중요한 학자들도 품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사실을 솔직히 말해 두는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이 큰 타격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하여 사람의 권위가 그것을 움직이거나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으면서 이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공격하므로 나는 그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하나님과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다고 하는 말은,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했느냐 하는 문제도, 그 평가의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탐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 때문에 소나 나귀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는가를 대답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로 만드실 권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짐승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대해서 마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 듯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허락하려는 것입니까? 반대론자들도 아무 공로 없이 특권을 얻은 사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의 표준에 따라 은혜를 다양하게 베푸시는 것보다 더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논쟁을 개인들의 문제로 돌려, 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떨며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을 인간으로서 잉태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중에서 당연히 천사들의 머리와, 하나님의 독생자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셔야 했던 것은(히1:2 이하 참조) 어떤 덕행에 의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하려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 자신께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택의 가장 분명한 거울이 되어주신다. 따라서 지체인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이 아니라, 값 없이 그 영광을 받으셔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선물을 나눠주시게 되었다.”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모두 그와의 거리가 이렇게 먼가, 왜 우리는 모두 부패했는데 그만 순결 그 자체이신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정신 이상뿐 아니라 파렴치까지 폭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제외됨의 고유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다면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도 빼앗게 해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는 “창세 전에”(엡1: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에, 그는 우리 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받도록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귀절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을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할 때에(골1:12), 이것을 언급하였습니다. 만일 장차 올 생명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은혜보다 선택이 선행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 만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실 것입니까? 바울의 다른 말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곧 창세 전에” “우리로...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엡1:4-5)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킵니다.

첨부파일